가난을 찍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임지영 기자 2020. 12. 19.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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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간 한 가족의 가난을 찍었다. 그들은 가난의 언어를 썼고, 가난의 직업을 가졌으며, 가난의 결혼을 했다. 임대아파트를 얻었어도 가난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사생활도, 계획도 없었다.
ⓒ시사IN 윤무영

조은(사진). 사회학자이자 영화감독이다.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세 직함이 모두 어울리는 날이었다.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일간지 칼럼을 마감하고 인터뷰가 있는 충정로까지 좀 걷는다는 게 그만 목적지를 지나쳐 아현동 가구거리까지 갔다. 요즘 통 걸을 짬이 안 나 그러기로 했다. 집을 수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지은 지 53년 된 집에서 37년 동안 살았다. 그가 그 집에서 살아온 기간과 ‘금선 할머니 가족’을 기록해온 시간(서울 사당동 철거촌에서 상계동 임대아파트에 이르는)이 비슷하다.

조은 감독이 만든 영화 〈사당동 더하기 33〉이 2020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장편경쟁 부문에 올랐다. 사전 모임에서 만난 영화감독 대부분이 한 세대 이상 차이 났다. 그가 교수로 몸담았던 대학을 졸업한 한 감독이 08학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조은 감독이 65학번이라고 말하자 다들 놀랐다. 또 다른 감독은 7년 동안 찍던 작품을 엎으려고 했는데 그가 33년 걸려 영화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반성한다고 했다. 11월27일 압구정 CGV에서 영화가 상영됐다. 관객과 만난 자리에서 감독은 “가난은 상상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986년 여름, 철거를 앞둔 사당동에 들어갔다. 현장 연구를 위해서였다. 조교 두 명도 6개월 이상 거주하며 지역 상황을 파악했다. 여자 교수에 익숙하지 않은 주민들은 그를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조교가 세든 집에서 금선 할머니 가족을 만났다. 일제강점기, 함경도의 한 여관집 큰딸로 태어나 6·25가 터지기 직전에 남쪽으로 내려온 할머니는 첫 만남 당시 월세방 한 칸에서 자식, 손주들과 살고 있었다. 생활보호 대상자였고 남편 없이 파출부로 일했다. 이혼한 아들 수일씨는 건설노동자에, 아이가 셋이었다.

그때부터 이 가족을 지켜보았다. 빈곤의 재생산에 관심이 있었던 그의 처음 질문은 ‘주거공간이 제공되면 빈곤이 완화될 수 있을까’였다. 1989년 노태우 정부가 영구임대아파트 25만 호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할머니 가족은 사당동 가구 중 유일하게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었다. 아들 수일씨가 연변(옌볜)에서 신부를 데려왔다는 말에 카메라로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다문화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 때였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손자 영주씨는 필리핀 여성 지지 씨와 결혼해 아이 둘을 낳았다. 손녀 은주씨는 삼 남매를 낳고 남편과 이혼했다. 덕주씨도 결혼해 아이가 둘이다. 사는 곳과 직업이 자꾸만 바뀌었고 계속해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 영화에는 이들을 중심으로 4대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의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다. 2009년 〈사당동 더하기 22〉가 나왔고, 2012년 〈사당동 더하기 25〉가 책으로 나왔다. ‘한때의 도시빈민이 25년이 지난 뒤 빈곤의 회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질문에 확답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썼다. 사당동 이후 22년, 25년, 33년. 각각은 어떻게 같고 또 다를까. 조은 감독을 만난 자리, 그가 인터뷰를 청한 이유를 물었다. “빈곤이 소재라서? 33년이라서? 사회학자라서?” 셋 다였다. 인터뷰 이틀 뒤인 12월4일, 〈사당동 더하기 33〉은 서울독립영화제2020 장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번 영화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사당동 더하기 33〉은 이전의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1986년 철거 현장에 갔을 땐 영상을 찍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카메라도 없었다. 다행히 녹취를 많이 했다. 〈사당동 더하기 22〉를 만들면서 영화가 영상의 예술일 뿐만 아니라 소리의 예술이라는 걸 알게 됐다. 소리가 있어서 스틸 사진을 가지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영화에 당시 나의 포지션을 알려주는 말이 나온다. 주민들이 전날 백골단이 (사당동에) 와서 철거를 하는데 피를 흘렸다면서 그때 왔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내가 “저는 무서워서 못 왔어요”라고 말한다. 그때의 나는 현장이 무서워서 못 갔다고 말했고 그만큼 거리를 두는 위치였다. 〈사당동 더하기 33〉은 훨씬 깊이 들어갔다. (내가) 화면에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그들처럼 가난을 경험하지 않은 연구자이자 영화감독이 가난을 찍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도 청중도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다. 사람들이 보면서 굉장히 불편해할 수도 있는 지점을 드러내는 게 다큐멘터리에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불편할 거라고 예상했다. 또 불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한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1980년대) 당시 사람들이 월세를 못 내 사당동 안에서도 굉장히 여러 차례 움직였다(이사했다). 재개발 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들이 보상을 받기 위해 옮긴다고 생각했는데 실제와 굉장한 갭이 있었다. 만 40세가 되기 직전, 사당동에 갔다. 정책하는 사람들은 젊은 여자 교수가 현장을 너무 몰라 낭만적인 정책 제안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열심히 연구했다. 유니세프가 연구를 지원했는데 가난한 동네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사회이동에 관심이 있었다. 사회학자로서 던질 수 있는 전형적인 질문을 가지고 있었다. ‘주거를 해결하면 빈곤을 탈출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났던 20여 개 사례 가구의 사당동 이후를 추적하고 있었다. (금선) 할머니네가 유일하게 임대아파트를 얻었다. 전형적인 빈곤 가족, 조손 가족이었다. 할머니가 말을 잘하는 이야기꾼이기도 했고 나를 받아들여줬다. 운이 좋다는 얘기도 듣는데 물론 운도 좋다. 임대아파트를 못 얻었으면 할머니 가족이 흩어졌을 거다. 한편으로는 어떤 가난한 가족을 따라갔어도 같은 이야기를 얻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한 가족만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음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렸나?

가난의 고리를 끊을 수 없지만 더 가난하게 하진 않는다. 주거가 해결된다고 가난을 해결해주진 못한다. 고용이 너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사당동 더하기 22〉를  선보이기 전에 사회학자를 초청해 보여주었다. 그들이 중산층 아파트와 임대아파트 사이에 별 차이가 없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들 머릿속엔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 환경이 그려져 있었던 거다. 내가 20대 후반에 결혼해 집을 얻을 때 소원한 게 15평 주공아파트를 얻는 거였다. 상계동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 당시 주변에 민영아파트가 들어서자 혹시 사는 데가 개발되어서 밀려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아들, 아들 다음엔 자녀도 살 수 있었는데 법이 바뀌어서 이제는 당대에서 끝난다.

ⓒ(주) 시네마달 제공영화 <사당동 더하기 33>에는 금선 할머니(맨 오른쪽) 가족 4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세대가 바뀌면서 가난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했는데.

사당동에 들어갈 때는 다문화라는 개념이 없었다. 수일 아저씨가 연변에서 부인을 데리고 오거나 영주씨네가 다문화 가정이 되는 건 예측을 못했다. 3.5평에서 5명이 칼잠 자던 때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주거의 조건이 좋아졌지만 형태가 달라졌다. 사당동에서는 의료보험증이 없어서 옆집에서 그걸 빌리는 게 이들이 할 수 있는 낮은 수준의 꼼수였다. 아픈데 의료비가 너무 많이 나오니까 빌리면 안 되는 걸 알면서 하는 거다. 나중으로 가면 대포통장, 대포차 같은 유혹에 빠지면서 새로운 형태로 간다. 같은 건 결국 맨몸으로 때워야 한다는 점이다.

영화에 한글 자막을 넣었다. 처음엔 의아했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왜 넣었는지 알겠더라.

우리 사회에 계급 언어가 있다는 걸 깊이 생각하진 못했다. 노인들 이야기를 들을 때 이북 사투리라 못 알아듣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계급 언어일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영주, 덕주, 은주씨는 말을 뭉개거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때가 많다. 은주씨는 청각장애가 있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나오는) 영주씨의 설교 내용을 알아듣는 것도 불가능하다. 발음의 문제도 있지만 단어 수도 제한적이다.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하는 단어를 몰랐다. 영주씨가 나를 부르는 호칭을 두고 딸 지선이가 “엄마는 왜 교수님이라고 해?”라고 물어 깜짝 놀랐다. 주변에서 교수를 본 적도 없고 그 단어 자체를 몰랐던 거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담아 전달해야 할까. 그것도 숙제였다.

객관적으로 빈곤을 보여주는 게 관심사가 아니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빈곤을 찍은 다큐멘터리는 굉장히 많다. 이들이 얼마나 가난한지 보여줌으로써 후원금을 받기 위한 다큐멘터리도 있을 수 있고 투쟁이나 운동을 위한 것도 있다. 나는 사회학자이고 3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찍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의도적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가난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게 아니라 가난하지 않은 연구자와 감독이 가난을 찍는다는 게 무엇인지 질문하는 다큐멘터리다. 가난한 사람과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안 만나고 사는 건 아니다. 끊임없이 분리시키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중산층 배경을 가진 대학교수들이 영화를 본 다음에야 일상에서 보는 중국집 배달원이 덕주 같은 아이라는 걸 알고 다시 보게 됐다고 하더라.

영화를 보면 중산층 계급의 창작자라는 걸 계속 의식하고 상기하는 것 같다.

전주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이 말하더라. (저들은) 왜 저렇게 애를 낳는 거냐고. 거기에 (중산층의 시선이) 축약되어 있다. 중산층 이상의 경우, 결혼식장을 빌려 결혼하는 게 더 이상 로망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덕주씨는 계속 강조한다. 우리가 (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식장에서 결혼한다고. 내게 주례를 부탁하며 물어본 게 “교수님 상견례가 뭐예요?”였다. 이 가족은 한 번도 상견례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단어와 생각, 가치가 그들에게는 아닌 거다.

ⓒ(주) 시네마달 제공첫째 손자 영주씨가 필리핀 출신의 지지 씨(왼쪽에서 두 번째)와 결혼하면서 다문화 가정이 되었다.

수일 아저씨와 감독의 나이대가 비슷하다. 어머니, 자식,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나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심지어 사당동 조사에 들어갔을 때 파출부 나가는 여성분들이 내 또래였다. 그런데도 그 생각을 못했다. 이농향도(離農向都)를 개념으로만 배웠던 거다. 시골에서 중학교도 안 다니고 올라와 공장을 다니다 결혼해 파출부를 하는 분들이었다. 이런 삶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나는 연구자였고. 사회학이 필드(현장)를 중시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책상에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재개발 현장만이 아니고 어떤 현장이든 사회학자는 현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난을 소재로 다루며 윤리적으로 고민한 부분이 있다면?

‘얼마나 이들의 가난을 드러내야 하는가’다. 특히 연구 윤리를 보면 ‘사생활 보호’가 나오는데 ‘사생활이라는 게 이들에게 무엇을 의미하지?’, 이런 질문이 생겼다. 첫 영화가 나왔을 때도 가족들이 그걸 찍게 뒀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들었다. 그런데 사생활은 서구 근대의 개념이다. 어떤 경계가 있어야 프라이버시가 생겨나는데 이들은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 청소년일 때도 엄마 아빠와 방 한 칸에서 살았다. 사회학 책에 나오는 개념이 누구의 시각에서 정의되는 걸까. 그 기준에 대해 질문하게 됐다. 사람들은 내가 33년간 한 가족을 따라다니며 연구해서 점수를 높게 주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사회학자로서 가졌던 프레임을 깰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 현장을 가져서 얻은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편집하며 우려한 점이 있다면?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할머니가 (과거에) 포주를 했다는 얘기나 은주씨가 노래를 해서 돈 버는 걸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연 내보내도 되나 하는 질문이 있었다. 실제로 영화를 본 가족은 그런 부분을 얘기 안 한다. 다만 너무 가난한 모습이 나와 쪽팔렸다고 한다. 가난하지만 근사하게 보이길 원하는 거다. 은주씨가 자기 오빠는 영화를 안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본인이 어떻게 돈 버는지 모를 거라고. 그런데 사실 다 안다. 뜻밖의 반응은 은주씨가 이 영화를 청와대에서 틀면 안 되냐고 한 거였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게 하고 싶다고 했다. 덕주씨는 배달 일을 시작해서 (영화를 볼)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뛰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배달 노동자들의 사고 소식이 들려 걱정했는데 인생에서 처음으로 적금을 들었다고 전화가 왔다.

개인적으로 이들 가족의 미래에 바라는 바가 있다면?

상투적인 질문이다. 가난을 좀 벗어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변에서 내게 좀 도와주지 그랬냐고 하는데 개인이 어떻게 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나와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급하게 벌금을 내야 한다든지 하는 경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빈부격차를 좁히지 않는 한 이런 삶의 궤적이나 양식이 재생산되는 걸 막기 어렵고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금선 할머니네 빈곤의 시작도 사실은 한국전쟁이다.

우리 사회가 출발선이 다른 데 대해 너무 너그럽거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출발선을 얼마나 줄여주느냐는 너무 중요하다. 생물학적 가족을 당연시 여기듯 출발선 역시 유전인자가 전달되는 것처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다.

사당동 가족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앞으로도 영상으로 남길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이 우리 가족 근황은 잘 안 묻고 사당동 가족들에 대해 물어본다. 많은 사람들이 사당동 가족을 통해 나와 네트워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점은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번 영화를 보여준 뒤 은주씨 딸들을 만났을 때 녹취를 하긴 했다. 그런데 얘기가 자꾸 끊기더라. 이들에게 계획이 있다고 하는 건 반어적인 거다. 계획이 없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에서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를 썼는데) 정말 잘 포착한 거다. 계획이 없거나 계획의 기간이 매우 짧다. 그 길이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계층을 구분하는 인덱스로 써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옛날 얘기에 대해 물어보면 기억을 못한다. 여러 면에서 내게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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