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인문정원] 산책에 대하여

남상훈 2020. 12. 18. 22:31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걷기라는 행위는 인류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그는 산책을 정신의 영양 섭취, 자기 자신의 휴양을 취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산책자는 날씨의 진정한 향유자들이다.

산책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좇은 속도와 생산성에 대한 반작용이자 저항의 한 형식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칸트·니체 등도 산책광
산책자는 날씨의 진정한 향유자

걷기라는 행위는 인류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걷는 자들은 몸의 가능성과 한계를 가늠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걸을 때 미지의 것을 취하고, 제 상상을 한껏 넓히고 인식의 부피를 키운다. 걷기와 산책은 다르다. 관광, 쇼핑, 거리 시위, 도망은 걷기 범주에 들지만 산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산책은 미학적 양식으로 다듬어진 걷기다. 나는 날마다 산책에 나선다. 날이 궂거나 화창하거나 집 밖을 걷는 습관은 내 일상의 일부다.

탈레스는 기원전 585년 전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개기일식을 예측하고, 수학에서 ‘탈레스의 정리’를 공식화한 철학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인류 ‘최초의 철학자’로 꼽았다. 그는 산책 중 딴 생각에 열중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우물에 빠졌다. 철학자에게 사유의 행로와 걸음의 궤적은 겹쳐지는 바가 있다. 산책의 매혹에 빠진 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몽테뉴, 칸트, 니체 같은 철학자가 공유한 경험이다. 칸트는 오후 다섯 시 정각이면 산책에 나선 걸로 유명하다. 그는 규칙을 지켜 산책을 했는데, 그 규칙을 어긴 것은 딱 두 번뿐이다. 첫 번째는 1762년 루소가 ‘에밀’을 내놨을 때 그 책을 읽는 데 정신이 팔려 산책을 건너뛰었다. 두 번째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다. 그는 큰 충격으로 산책 나가는 걸 깜빡 잊었다. 그 두 경우를 빼고는 칸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섯 시 정각이면 산책에 나섰다.
장석주 시인
니체 역시 산책 마니아다. ‘영겁회귀’의 철학을 담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산책이 준 보상이다. 니체는 1881년 어느 날, 실바플라나 호수를 끼고 있는 숲속을 걷다가 거대한 바위 옆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 순간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영감이 몸을 관통했다고 썼다. 그는 날마다 산책에 나서서 영감을 가다듬으며 책을 써나갔다. “오전에는 소나무 숲을 지나 멀리 바다를 바라보면서 초알리 방향으로 난 아름다운 남쪽 길을 오르곤 했다. 오후에는 건강상태가 좋을 때마다 산타마르게리타에서 포르토피노의 뒤까지 이르는 만 전체를 돌아다녔다.” 약골에다 온갖 질병에 시달리던 니체에게 산책은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그는 산책을 정신의 영양 섭취, 자기 자신의 휴양을 취하는 방식으로 삼았다. 아마도 산책이 없었다면 ‘차라투스트라’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산책은 계절의 오고 감, 기온의 차이, 하늘의 변화나 구름의 움직임, 변화무쌍한 기상의 조건들에 대한 관찰이고 추인이다. 산책자는 날씨의 진정한 향유자들이다. 아울러 산책은 느림의 온전한 향유, 시(時)·날(日)·주(週)·해(年) 같은 단위시간을 거머쥐려는 기도(企圖), 지각의 되먹임을 몸으로 반추하는 행위다. 산책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아가는 신체 이동의 유력한 방식을 넘어서서 전문화된 취향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200년밖에 되지 않는다. 산책은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좇은 속도와 생산성에 대한 반작용이자 저항의 한 형식이다. 시인 보들레르가 19세기 파리에서 보여주었듯이 산책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무위의 한 형태로 나타났다. 산책자의 출현은 걷기를 미학적 경험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

산책은 몸을 쓰는 일이다. 몸의 일부인 다리의 근육을 주로 쓰되 점진적이고 계속적으로 쓰는 일이다. 산책은 이익을 탐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게 무보상의 행위라는 데서 오는 숭고함 속에서 산책의 즐거움은 생겨난다. 주택가를 벗어나 인적 드문 오솔길을 걸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숲속의 쾌적함을 머금은 바람은 이마에 돋은 땀을 씻어주고, 나무의 우듬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일 때 몸에 깃드는 벅찬 희열과 쾌감의 찰나적 섬광은 산책이 주는 진정한 보상이다.

장석주 시인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