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동물원생활] 국내 처음으로 시도된 삵의 인공수정

김정호 수의사 (청주동물원 진료사육팀장) 2020. 12. 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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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수의사 제공

10월 30일 청주동물원에서 국내 처음으로 멸종위기종인 삵의 인공번식을 시도했습니다. 이번 시술은 5년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한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5년 전 미국 국립스미소니언 동물원에 방문했던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2014년,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미국 국립스미소니언 동물원에 방문하였습니다. 스미소니언 동물원의 조게일 하워드 박사는 1980년대 인공수정 시술을 통해 멸종위기에 처한 검은발족제비들을 건강하게 번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방문 당시, 스미소니언 동물원에서는 자이언트판다와 레서판다 인공번식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직접 관찰하며 인공수정에 대한 기술을 전수받기로 했습니다. 

새벽 5시 스미소니언 동물원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마취총을 맞고 잠든 자이언트판다가 수술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수의사가 전극봉으로 정소와 전립선을 전기 자극해 정액을 채취했습니다. 채취한 정액을 현미경 재물대에 올리자, 연결된 모니터에 수많은 정자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연구원은 정자가 든 관에 영양액과 정자를 얼지 않게 하는 부동액을 넣어 냉동하는 법을 보여주었습니다.

스미소니언 동물원 연구원들이 레서판다의 정액을 채취하고 있다. 김정호 수의사 제공

같은 날 중국에서 한 손으로 들만한 작은 크기의 냉동 병이 항공편으로 도착했습니다. 이 병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자이언트판다의 정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스미소니언 연구원은 중국 자이언트판다의 정자를 미국에 있는 자이언트판다 암컷의 난자와 인공수정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먼 거리에 살고 있는 개체의 정자를 이용하는 인공번식은 멸종위기종을 보전하는 데 가장 현실적인 시술입니다. 개체수가 줄면 혈연이 가까운 개체끼리 짝짓기하는 근친교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럼 유전자 다양성이 줄어들어 결국 기형 등 유전적 결함이 있는 개체가 태어나고, 멸종은 더욱 가속화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전적으로 건강한 개체를 탄생시키기 위해 먼 곳에 떨어진 동물끼리 번식시키는 겁니다.

다음날 스미소니언 동물원 부설 연구기관인 프론트로얄 스미소니언연구소에도 방문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동물 분변을 말려서 가루를 만든 뒤, 호르몬을 추출합니다. 매일 얻을 수 있는 분변을 통해 호르몬을 측정하고 분석하면, 동물들을 매번 마취하지 않고도 번식 생리를 알 수 있습니다. 

성호르몬을 연구하는 내분비 실험실의 벽에는 많은 야생동물들의 번식주기가 그려진 그래프가 붙어 있다. 김정호 수의사 제공

○ 2015년 4월 다리가 잘린 삵, 동물원으로 오다

청주동물원은 2015년부터 전국의 야생동물 구조센터에서 자연 방사가 어려운 삵들을 데려왔습니다. 삵은 환경부 멸종위기종 2급으로, 국내에선 종 보전의 가치가 있는 동물입니다. 동물원으로 처음 데려온 삵은 암컷 ‘긱스’입니다.

암컷 삵 '긱스' 김정호 제공

긱스는 오른쪽 앞다리가 올무에 걸려 구조됐습니다. 안타깝게도 상처가 심해 결국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이후 동물원에서 왼발로만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강인수 담당 사육사가 왼발의 달인이라 불리는 축구선수 라이언 긱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주었습니다. 다른 암컷 삵인 오월이는 새끼 때 구조된 뒤 사람에게 너무 길들여진 탓에 자연 방사가 어려워 동물원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각 동물원마다 적은 수로 살고 있던 멸종위기 동물들을 인공으로 수정시키는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먼저 몸무게가 고양이와 비슷해 사람들이 비교적 포획하기 쉬운 삵이 인공수정 첫 타자로 지목되었습니다. 다리가 잘린 채 동물원에 갇혀 지내는 삵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태어날 새끼들은 돌려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또 만약 삵의 인공수정을 성공하면 같은 야생고양잇과인 스라소니와 표범, 호랑이 등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 2015년 5월 인공수정을 위한 만반의 준비

복강경 시술을 하고 있는 김정호 수의사의 모습. 김정호 제공

인공수정은 복강경으로 이뤄지는 시술입니다. 복강경은 배에 작은 구멍을 내고, 구멍을 통해 내시경으로 배 안을 보며 검사 및 치료를 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복강경 시술 경험이 없었는데, 마침 경상대학교 수의과학대에서 수업이 열려 복강경 시술법을 배웠습니다. 

○ 2015년 12월 첫 시도, 그리고 실패

드디어 인공수정을 위한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미국 국립스미소니언 동물원에서 배워온 대로 전극봉를 사용해 삵의 정자 채취를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전극봉과 다른 장비의 작동 방법이 미국에서 배웠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다 단서를 얻은 건 이탈리아에서 나온 고양이 정자 채취 논문이었습니다. 모세관현상을 이용해 전기 자극 없이도 정액을 채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삵의 정자를 채취하는 데 성공했고, 현미경으로 정자들의 움직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정자를 형광염색한 뒤 어두운 배경에서 관찰하는 암시야 현미경으로 보았는데, 마치 밤하늘에 떨어지는 유성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채취한 정자는 혈연관계가 아닌 옆 칸 암컷 삵에게 인공수정했습니다. 하지만 번식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현미경으로 채취한 정자의 활동성을 확인하고 있다. 김정호 제공

○ 2020년 10월 인공수정 재도전의 날

청주동물원에 수의사 어벤져스 10명이 모였습니다. 한국동물원수족관협회 진료종보전분과에 속한 서울대공원, 에버랜드, 대전오월드, 한화아쿠아리움, 전주동물원, 대구동물원의 수의사들입니다. 이들은 서울대공원에 사는 수컷 삵의 정자를 청주동물원의 암컷 삵에게 인공수정 시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날 아침 일찍 먼저 서울대공원 동물연구실 번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서울대공원에 도착했을 땐 수의사들이 수컷 삵을 마취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 2020년 10월 정자, 서울에서 청주로

모세관현상을 이용해 정액을 채취하고 있다. 김정호 제공

수컷 삵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제가 직접 정액을 채취했습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정액을 채취하지 못했습니다. 침착하게 다른 삵에게 두 번재 정액 채취를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이번엔 정액을 채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채취한 정액은 우유빛깔을 뽐내었습니다. 경험상 상당한 수의 정자가 들어있는 건강한 정액으로 보였습니다. 정자가 잘 살아있게 17℃ 정도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아이스박스에 넣고, 바삐 차를 몰아 청주동물원으로 돌아왔습니다.

○ 2020년 10월 27일 15시 정자, 난자와 만나다

청주동물원에서 담당 사육사가 암컷 삵을 그물망으로 포획해, 마취 주사를 놓았습니다. 이내 잠든 삵을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와 건강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했습니다. 마취로 깊이 잠든 삵의 호흡이 너무 느려지지 않도록 인공호흡기로 호흡수를 유지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삵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곧 바로 작은 카메라를 이용해 뱃속을 살펴 보면서 자궁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정액을 자궁에 주입하곤 배의 작은 구멍을 봉합한 후 시술을 끝마쳤습니다.

○ 2020년 10월 27일 16시 새끼 삵, 과연 태어날까?

인공수정을 위해 복강경으로 자궁을 찾는 모습이다. 김정호 제공

원거리 정자수송에 의한 인공수정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프로젝트입니다. 시술은 30분만에 끝이 났습니다. 삵의 임신 여부는 임신 진단용 초음파 검사로 확인할 수 있지만, 삵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해 임신 기간인 두 달을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참여했던 모든 수의사들이 새끼가 태어나 방사 훈련을 거쳐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길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공번식을 위해 한자리에 모인 수의사 어벤져스의 모습이다. 김정호 제공

※관련기사

어린이과학동아 12월 1일 발행 [슬기로운 동물원 생활] 10화 국내 처음으로 시도된 삵의 인공수정

[김정호 수의사 (청주동물원 진료사육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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