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인터뷰>윤석진 "K-사이언스, 'CAN DO' 아닌 'MUST DO' 연구해야"

노성열 기자 2020. 12. 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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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진 KIST 원장이 지난달 23일 서울 홍릉 본원의 집무실에서 자신의 소신인 ‘빅 사이언스론’을 설파하고 있다. 신창섭 기자

■ ‘빅 사이언스론’ 주창 윤석진 신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기업이 할 수없는 미지 영역

세계 최초의 분야 찾아 연구

기초·응용의 경계 넘나드는

‘빅사이언스’가 세계적 추세

AI·Big data·Cloud 바탕의

ABC랩 통해 예측 연구 계획

국민이 원하는 성과 못내면

50년내 존재의 이유 없겠죠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홍릉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정문에 도착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인 탓도 있지만, 이곳은 국가보안시설로 기본적인 통과 절차가 엄격하다. 기자의 신원과 차량번호까지 꼼꼼하게 확인한 후 임시 출입증이 발급됐다. 몇 번이나 와 본 숲속의 고즈넉한 길이었지만 이날만은 왠지 좀 더 새로워 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1966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출연연구기관으로 설립된 이후 54년 만에 처음으로 해외 유학파 박사가 아닌 국내파, 게다가 KIST에서 쭉 잔뼈가 굵은 내부 승진자가 연간 예산 3000억 원에 2500여 명의 연구자와 직원을 총지휘하는 선장으로 취임하게 됐고, 지금 그를 만나러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0일 우리나라 최초·최고의 종합연구기관 KIST의 부원장에서 승진한 윤석진(61) 신임 원장은 연세대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29세 나이에 KIST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연구원 신분으로 연세대 박사과정을 마저 이수한 뒤 미국에서 박사후 과정을 끝내고 다시 복귀해 선임·책임연구원을 거쳐 박막재료, 재료·소자 연구 총책임 등 연구 현장은 물론 미래융합기술연구본부, 연구기획조정본부, 홍릉클러스터링추진위원회 위원장 등 연구 행정과 대외협력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는 팔방미인이다. 그는 매우 소탈하고 정직했다. 에둘러 가는 법이 없고 묻는 그대로 답변을 해 오히려 맥이 빠질 정도였다.

2시간의 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차 안에서 문득 ‘과학계의 방탄소년단(BTS)’이라는 별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국 등 서구의 주류 대중음악계에서 빌보드차트 등 인기순위와 싱글, 앨범 등 차곡차곡 정상을 향해가는 과거 정통 출세코스를 벗어나 ‘아미’로 불리는 팬들과 SNS 등으로 밀접하게 소통하며 공감의 코드로 세계 1위에 올라선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개척자인 BTS처럼, 과학계에서도 서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닌 우리 정체성을 지닌 ‘한국의 과학’, 다시 말해 ‘K-Science’가 태동하려는 신호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취임 100일을 축하드린다. 어느 인터뷰에서나 같은 질문을 받을 것으로 짐작된다. 50년 전통을 깨고 국내, 내부 출신의 원장으로 발탁됐다. 자신의 SWOT를 분석해 보자면.

“KIST는 내년에 55주년을 맞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기관입니다. 그런 기관에 국내 박사 출신 원장이 제가 처음이라는 게 감사하고 감개무량한 일이기도 합니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 수준도 높아지고, 대한민국의 교육 수준도 높아졌음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국내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해외에서 포스닥(Post-doctoral researcher·박사후 연구원) 경험을 쌓고 KIST에서 연구자로 계속 성장해 왔습니다. 제 강점은 내부 조직의 역량을 잘 알고,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현주소와 문제점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KIST 연구원에서 원장으로까지 성장하면서 연구 현장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됐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파견 당시 융합연구본부장으로 일하면서 출연연구소와 국가 혁신생태계 전반의 융합 시너지를 이끌었던 경험은 넓은 안목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직접 실행해본 실천가라는 것도 제 강점입니다. 반면 시행착오와 우려가 있어도 일단 해보자,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다, 하는 강한 추진력은 제 약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무 밀어붙이는 게 아닐까, 강성이 아닐까,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평소통과 구성원의 공감 얻기에 힘쓰고 있죠. 또 하나는 해외 학위가 없으니 해외 인맥이 약하고, 영어도 잘 못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매일 20분 정도 영어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2003년에 독일·미국의 연구자들과 국제전기전자재료학회(IWPMA)를 만들어 함께 머리를 맞대기 시작한 것도 이런 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입니다.”

“팀 연구 많아 구성원간‘공감’이 필수… 나만 따라와? 이젠 안통해”

KIST도 원로그룹 60대부터 신규선임 20대까지 분포

리더는 솔선수범하고 사적인 자아 내려놔야 조직융화

2년전에 ‘K-DARPA’ 출범시켜 국방분야 연구개발도

워게임은 못하지만 전자파 차폐 · 스텔스 기술 등 연구

윤 원장은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겸양했지만 주요 국제논문만 여러 편을 써낸 그에게 스스로 흡족할 만한 높은 수준은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학자로서의 솔직함이 돋보였다. 그리고 국제학회를 창설해 오히려 외국 학자들과의 교류에 적극 뛰어든 일화도 그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점이었다. 약점을 정면돌파하려는 적극성은 그의 말 그대로였다.

―윤석진에게 기회와 위협은 무엇이 될까.

“제 장점을 살리면 기회가 되겠죠. KIST, 대한민국 과학의 약점을 잘 알고 맥을 짚을 수 있다는 게 기회가 될 겁니다. 융합을 예로 들어봅시다. 융합을 단순히 학술적 정의로 생각하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융합연구본부장으로 일할 때 3년간 세종시에서 11개 융합연구단을 발족, 운영해 보았습니다. 여러 이질적인 연구집단을 하나의 몸처럼 물 흐르듯 협력시킨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KIST 구성원에게도 늘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CAN DO 연구를 해왔다. 이제 MUST DO를 연구해야 한다’고. 하기 쉬운 만만한 연구보다 어렵지만 꼭 해야만 하는 큰 연구에 도전하라는 의미입니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역시 연구 주제 선정과 연구 방식에서 과거 시행착오형이 아닌 데이터 기반의 포캐스팅 리서치(예측 연구)를 해야 합니다. ‘ABC 랩(LAB·연구실)’이라고 해서 인공지능(AI), 빅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Cloud)가 뒷받침된 스마트 랩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리고, 연구실 중간 리더들에게 ‘후배의 앞길을 막지 마라. 세계적 천재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자율적으로 키워주라’고 당부합니다. 마지막으로 위협은 KIST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되겠죠. 국가와 국민이 원하는 만큼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50년 안에 서울에 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KIST의 성격에 대해 국가 연구·개발(R&D)의 구심체, 융합 연구의 허브 역할을 자처했다. 출연연구소의 맏형이지만 KIST 독주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오히려 분야별 전문 연구기관이 심층 연구를 주도하고, KIST는 일종의 연구 기획이나 자원 배분에 주력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말씀하신 대로 다른 연구소들은 단위 전문연구소이고, KIST는 종합연구소입니다. 이렇다 보니 다른 출연연구소와 연구 주제가 중복됩니다. 심하면 대덕연구단지에서 KIST가 연구를 간섭하고 훼방한다는 볼멘소리까지 들린다고 합니다. 저는 ‘빅사이언스’를 주장합니다. KIST는 정해진 답이 없고 일반 기업이 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세계 최초 분야를 찾아서 연구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대 엔지니어링의 비중을 어떻게 가져가느냐를 늘 고민해야죠. 테크놀로지에 비중을 둔다면 다른 연구소와 일부 연구가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이언스에 비중을 두면 기초과학연구원(IBS) 같은 단위연구소의 전문 연구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KIST는 기초·응용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 예를 들어 뇌를 기반으로 한 반도체나 반도체를 기반으로 한 뇌 연구 같은 걸 해야 합니다. 이런 빅사이언스가 새로운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추세입니다. 저는 기후변화 연구를 의무 과제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기후변화 연구는 선진국 데이터와 트렌드를 따라가는 추격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는 지구온난화 속도가 가장 빠른 곳 중 하나입니다. 환경 분야에서 대기·물 같은 현상학적 연구를 환경전문가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처럼 기후변화 중 에너지 분야에 집중하는 연구조직과 별도로, 우리나라 기후변화의 현상과 대책을 함께 파헤치는 연구소를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연구도 사람, 그리고 인간관계가 중요하다고 ‘사람이 먼저’ 철학을 피력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인생관을 갖게 된 경험을 몇 가지 들려달라.

“이직하려는 KIST 연구원과 면담을 해보면 60%가 사람 간 갈등이 이유더군요. 아시다시피 연구자들이 시야가 좀 편협하기 쉽습니다. 특히 연구소는 자유로운 대학과 달리 집단 연구, 팀 단위 연구를 해야 합니다. 인적 갈등이 있는 상태에서는 팀 연구를 못 하죠. 이런 이유로 우수 인재도 대학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처우보다 문화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제가 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원장실로 불려가면 보통 혼난다고 여겼죠. 원장실도 일부러 삥 둘러 피해서 다녔어요. 당시 그분들 리더십이 ‘나만 보고 따라와’ 스타일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저는 큰 원칙과 방향성만 제시합니다. 본부장·부원장 시절 밤에 연구원들과 밥을 먹으러 가면 업무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공감하는 게 목적이니까요. 지난 몇 개월간 거의 매일 저녁을 먹고 퇴근했을 정도로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고교 시절 대학입시에서 예비고사 점수가 안 좋았어요. 이듬해 재수까지 했는데도 마찬가지라서 자포자기 끝에 대학을 안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한 친구가 연세대 전기공학과에 원서를 접수해놓았다며 시험을 보라고 권하는 거예요. 그 친구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이런 게 전부 ‘사람이 먼저’ 철학의 밑거름이 됐죠.”

―관련해서 요즘 ‘세대 간 격차’를 극복하는 것이 조직 리더의 고민으로 떠올랐다. 학교, 기업 등 모든 곳에서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 밀레니얼, Z세대까지 가치관과 희망 미래상이 달라 갈등이 심하다. 연구 공동체 안에서도 원로·중견·신진 연구자의 하모니가 굉장히 중요할 것 같은데, 이를 극복하는 원장님의 비결은 무엇인가.

“학계가 일반사회보다는 세대 격차가 덜한 것 같습니다. 과거 우리는 도제 형식으로 무조건 선배만 보고 컸죠. 지금 세대는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조직 내에서 당연히 베이비부머, 1990년대생, MZ세대 갈등이 있을 수 있죠. KIST도 원로그룹인 60대 연구원부터 신규 선임이라 불리는 입사자 중 20대 후반까지 분포가 다양합니다. 하지만 금융위기(IMF) 이후 연구계 내에서도 구조조정을 많이 해서 세대교체가 빨리 됐어요. 지금 40대 후반, 50대 초반이 벌써 주류 연구그룹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너무 젊은 원로가 생기는 조로(早老) 현상을 걱정할 정도죠. 저는 부원장 시절 ‘더 좋은 직장 만들기’를 내걸고 소통의 장을 만들었어요. 이 모임에 분기마다 참석해 의견을 듣고 수용할 건 수용합니다. 소그룹 미팅도 하고,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타운홀 미팅도 해서 선후배 간 활발히 의사를 교류하고 있습니다.”

―연세대 대학원의 원우회장을 했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보아 리더십은 어느 정도 타고 난 것 같다. 개성이 다른 구성원들을 이끌 때 가장 중점을 두는 조직의 목표는 무엇인가. 리더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대학원 원우회장 선거를 3, 4일 앞두고 교수님이 ‘회장이 되면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길래 ‘대학원 생활의 활성화’라고 답했죠. 당시 캠퍼스는 민주화운동 등으로 어수선하던 때라 학우들에게 구심점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선거자금도 없는데 당선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도 많이 받았습니다. 맞아요. 전북 익산 출신의 촌놈이 뭔 돈이 있겠어요?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최선을 다해서 며칠씩이나 유선 선거운동을 했죠. 결과는 당선이었습니다. 리더는 어려운 상황에서 먼저 솔선수범하고, 조직의 융화를 위해 스스로 사적인 자아를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안대응형 연구의 하나로 국방과학연구소와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미래국방연구협의체에 참여하고 있다. 군사 분야에 AI 등 미래 선도기술을 적용하는 것은 킬러 로봇 금지 등 다양한 국제협약과 윤리 기준 설정에 저촉될 우려도 크다. 한국의 특수한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해 이런 충돌을 피하면서 주로 어떤 분야의 연구에 주력하고 있나.

“우리가 직접 무기체계를 연구하기는 어렵습니다. 2년 전에 ‘K-DARPA’(DARPA는 미국 고등연구계획국의 준말)를 출범시켜 우리 기술이 국방 분야의 R&D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군집(群集)드론을 제어하고 비행 거리를 늘리거나, 잠수정·군함을 수리하는 데 AI 기술이 필요하거든요. 워게임(모의전투훈련)은 KIST의 임무는 아니죠. 포신의 내부 크롬 도금에 탄탈륨 합금을 개발, 코팅해 내구성을 향상하는 소재 기술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위치인식 같은 감시 기술, 전자파 차폐와 스텔스 기술 등도 하고 있죠.”

인터뷰 = 노성열 경제부 부장 nos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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