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용어의 벽, 어떻게 허무나](1)175년간 5107권에 가장 많이 등장한 용어는
美 대표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175년간 사용 단어 분석
1850년대 ‘물(water)’에서 2000년대 ‘세포(cell)’ 가장 많이 쓰여
과학 용어는 과학기술 발전과 시대상 반영

1845년 8월 4쪽짜리 주간지로 시작한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175년째 매달 한 권씩 발행되고 있는 미국 최장수 과학잡지다. 올해 창간 175주년을 맞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그간 총 5107권을 발행하는 동안 어떤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됐는지 분석해 올해 9월 창간 175주년 특별판에 공개했다.
●아인슈타인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기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175년간의 용어 사용 빈도 조사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한 배경으로 프랜시스 베이컨의 ‘시장의 우상(idol of the marketplace)’을 들었다. 17세기 영국 자연철학자인 베이컨은 경험주의적, 실증적 연구방법을 강조하면서 인식의 왜곡을 일으키는 네 가지 우상을 지적했다.
그중 ‘시장의 우상’은 사람 간 언어를 통한 접촉에서 발생한다. 언어의 불완전성으로 의사소통의 왜곡과 그에 따른 인식 왜곡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17세기 과학 학술지가 처음 발행된 이래 과학은 과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또 과학자와 일반 대중 사이의 소통이 매우 중요했다”며 “그 소통의 핵심이 용어”라고 평가했다.
이런 이유로 근대 과학이 태동한 서양에서는 ‘대중의 과학 이해(PUS·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가 과학 연구와 함께 중요한 주제였다.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해 대중을 설득하고, 정부가 예산을 투입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은 지금도 과학기술 발전과 정책 집행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로버트 오펜하이머, 라이너스 폴링 같은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은 대중과 과학을 소통할 필요성을 느꼈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직접 글을 실었다.
아인슈타인은 1950년 4월호에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일반상대성이론을 직접 설명했다. 폴링은 네 차례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글을 실었는데, 마지막으로 실은 1954년 7월호에는 자신의 노벨화학상 수상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단백질 분자 구조를 화학결합으로 설명하는 글을 기고했다. 흥미롭게도 그해 10월 폴링은 화학결합의 성질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 복잡한 물질 구조를 설명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용어는 과학기술 발전상의 표상"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175년간 잡지에 가장 많이 쓰인 용어(명사, 동사) 4420개를 정리한 뒤 그 가운데 다시 상위 1000개를 추렸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용어는 그 시대 과학기술의 발전상과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다”며 “175년간 크게 두 차례에 걸친 용어 사용의 변화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첫 번째 변화는 1870년대에 나타났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정립(set)’ ‘목적(purpose)’ ‘기술(describe)’ ‘주장(claim)’과 같은 특정 사실을 정확히 지칭하는 용어들이 등장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물(water)’ ‘발명(invention)’과 같은 생활형 단어들이 주를 이룬 이전 시대와는 대조적이라고 분석했다. 이 시기는 루이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부인하고 발생의 원인이 되는 모(母) 생물이 존재한다는 생물속생설을 발표한 이후였고, 영국에 세계 최초로 등대가 들어서고 교류와 직류 등 전기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때였다.
두 번째 변화는 1950년대 전후다. 이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정체성이 변화한 이유도 있다. 그전까지 주로 기술과 발명에 치중하던 잡지가 과학 연구를 일반인에게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했고, 이 과정에서 더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려고 애썼다. 이를 입증하듯 1950년대 중반 ‘새로운(new)’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 분자생물학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하던 1990년대에는 ‘세포(cell)’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나타났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올해의 단어(Word of the Year)’ 175개도 선정했다. 이 역시 시대에 따른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늠케 한다. 가령 1850년 ‘좋은(good)’, 1851년 ‘전환(turn)’, 1853년 ‘위대한(great)’ 등으로 19세기에는 근대 문명 태동기의 과학기술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단어가 올해의 단어로 꼽혔다면 2000년대에는 2000년 ‘추가적인(extra)’, 2001년 ‘신호(sign)’, 2002년 ‘시계(clock)’, 2003년 ‘활동적인(active)’ 등 생체조절 신호, 생체시계 등 생명과학 분야의 용어가 늘었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과학 이론이 진화하고 대중의 인식이 달라지면서 사용되는 용어도 달라졌다”며 “최근에는 이런 단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사진, 일러스트 같은 이미지도 용어와 함께 대중의 과학 이해를 도울 도구로 유용하다”고 평가했다.
※이 기사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국어문화원연합회의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현경 기자 uneasy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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