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내집, 겨울오니 '서러운 집'

한겨레 2020. 12. 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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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런, 홀로!?][토요판] 이런 홀로
산 좋고 물 좋은 집 어디에
전셋값 올라 이사한 25년 빌라
첫눈에 반해버린 풍광 좋은 집
평지 버리고 온 값 치르고 남아
문제의 겨울 오자 상황 바뀌네
'뼈 시린 40대' 혹독하고 두렵더라
꽃피는 봄까지 무사히 겨울나기를
이제 40대인 나는 추위가 두렵다. 추위에 대한 감각 자체가 20대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추위가 사람을 불행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 역시 해마다 더 많이 깨닫는다. 이제는 겨울이면 몸을 덥혀주는 문명과 기술에 감사해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릴 적 우리 집은 추웠다. 겨울밤 잠자리에 누우면 코끝이 찼고, 아침이면 양말부터 챙겨 신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늘 그런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겨울이면 집에서도 겨울옷을 갖춰 입고 사는 일에 익숙했다. 가끔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반팔 차림으로 후끈거리는 집을 활보하는 그들이 좀 신기해 보였을 뿐이다. 나는 추운 집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카페보다 좋은 내 집 풍광

이 집에 이사 온 지 두 달 남짓이 흘렀다. 새로 이사한 집은 1995년에 지어진, 25년 된 오래된 빌라다. 지난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바람에 서둘러 집을 찾다가 처음 눈에 띈 집이었다. 준비운동 삼아 보러 갔는데 거실 창으로 보이는 전망이 격정적으로 눈을 사로잡았다. 이런 경치와 자연을 누릴 수 있는 동네에 이런 전망을 확보한, 이런 가격의 집은 내가 아는 한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거의 없었다.

“전망이 참 좋죠? 가을이면 풍광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또 설산이 참 좋아요.”

50대 초반쯤의 남자는 흰 개를 안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딸과 함께 엉거주춤 서서 그렇게 말했다. 거실 한쪽 벽면은 인문, 철학, 문학, 사회서적으로 가득 찬 꽤나 견고해 보이는 커다란 책장으로 채워져 있었고, 남자의 차분한 음성은 이상하게 믿음이 갔다. 그러나 나는 남자가 입을 열기 훨씬 전부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흥분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기 때문에 사실 그의 말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아, 네….”

짐짓 시큰둥한 연기를 하며 나는 이미 이 집에서 나게 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상상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강 옆으로 평지가 널따랗게 펼쳐진 복닥거리는 동네에서, 도심에 우뚝 솟은 산기슭의 한적한 동네로 이사를 했다.

준역세권과, 좁지만 지은 지 3년도 안 된 신축 빌라, 자전거를 타고 어디든 달릴 수 있는 평지를 잃고 내가 얻은 것은 넓은 평수와 곡면의 발코니 그리고 산세가 펼쳐진 탁 트인 전망이었다. 지하철과 버스를 몇번씩 갈아타고 내려 집으로 오르는 길 매번 폐가 터질 듯한 호흡곤란을 느끼면서도 집에만 들어서면 기분이 좋아졌다. 주말,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다가도 지는 해가 아쉬워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내 집 거실에서 보이는 풍광이 전망 좋기로 유명한 어느 카페보다도 훨씬 좋았다. 집 뒷산 계곡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 말고는 주말 등산도 잘 하지 않게 되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변화하는 산의 풍광을 보고 사니, 굳이 멀리 등산을 가서 자연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이사한 뒤로 주말마다 바빴다. 도배를 새로 했고, 몰딩을 새로 칠했으며, 창틀에 흰색 시트지를 붙였고, 부엌 벽면의 붉은색 타일도 흰색 타일 페인트로 칠했다. 군데군데 구멍 뚫린 방충망을 메웠고, 화장실 구석구석에 낀 곰팡이 때를 지우고 냄새나는 하수구 트랩을 바꿔 달고, 끼익거리는 방문 경첩에 윤활제를 뿌렸다. 낡고 넓은 집을 쓸고 닦고 가꾸는 일은 끝이 없었다. 분주히 집을 보수하는 동안 초록의 늦여름을 지나 세입자 남자가 이야기했던 색색 단풍의 아름다운 가을도 이내 지나갔다. 아침저녁 낡은 창틀 사이로 심상찮은 찬기가 흘러들었다.

눈앞에 거리낄 것 하나 없이 산세를 확보한 전망이란 바꿔 말하면 평지에 비해 눈에 띄게 차고 센 산바람이 곧장 집을 향해 매섭게 달려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예사롭지 않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창을 붙들고 흔들던 어느 날 나는 부리나케 문풍지를 사다가 창틀 구석구석에 붙였다. 바람을 막을 만큼 두꺼운 문풍지를 붙인 곳은 힘주어 닫지 않으면 창문이 잘 닫히지 않았고, 얇은 문풍지를 붙여 창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곳엔 틈새가 남아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한쪽을 닫으면 반동으로 다른 한쪽이 열리고, 겉창이 닫혔다 싶으면 속창이 열렸다. 나는 속으로 엉엉 울면서 나의 아름다운 곡면 발코니에 서서 낙엽이 모두 떨어진 앙상한 바위산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유리와 벽돌 틈으로 쌩쌩 불어 들어오는 바람은 눈을 시리게 했다. 발밑에는 실리콘 공사를 새로 하려고 야심차게 벗겨놓은 실리콘 조각들이 가으내 차갑게 얼어버린 채로 흩어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안일했던 나 자신을 호되게 꾸짖으며 겨울용 두꺼운 커튼을 검색했다. 그날 밤엔 보일러를 최대치로 틀었다. 그리고 전보다 훨씬 넓어진 집을 덥히려면 난방비가 또 얼마나 나올까 생각하며 가정용 전기난로와 라디에이터를 검색했다.

‘윈터 이즈 커밍’

독립한 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더 추운 집에 살았던 적도 많다. 그러나 추워서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이중창은커녕 구식 나무새시의 집에서 살았을 때도 괜찮았다. 나는 말했듯 추운 집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추우면 입고 덮고 지내면 되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면 겨울이 왔을 때 어느 정도는 겨울의 추위라는 것을 실제로 감각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기도 했다. 겨울이면 보일러를 팡팡 때고, 여름이면 에어컨을 팡팡 켜서 바깥의 진짜 날씨와 유리된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삶은 어딘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어렸던 나는 ‘월동’이 들어간 수많은 말들의 의미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추위에 지금보다 무감했던 것 같다.

이제 40대인 나는 추위가 두렵다. 추위에 대한 감각 자체가 20대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춥고 배고프다’라는 말의 물리적 의미를 언젠가 문득 감각했을 때처럼(배고프면 정말로 몸이 ‘많이’ 추워진다), 추위가 사람을 불행한 기분에 빠지게 한다는 사실 역시 매해 더 많이 깨닫는다. 이제는 겨울이면 몸을 덥혀주는 문명과 기술에 감사해한다. 함경도 지방의 산간지대 사람들이 왜 겹집, 너와집과 같은 건축양식을 발달시켰는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북쪽 지방 스타크 가문의 가언이 왜 ‘윈터 이즈 커밍’인지에 대해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겨울은 혹독하고 두려운 것이며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오래된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아버지는 능숙한 손길로 집 여기저기를 손봐주며 말했다.

“예전에 누가 그랬지. 반지하에서 옥상으로 이사했더니 그해 봄에는 곰팡내도 안 나고 그렇게 밝고 좋더라고. 그런데 바로 최악의 여름이 찾아왔지. 그렇게 좋은 제집 찾기가 서럽고 어려워.”

누군들 전망도 좋고 발코니도 있고, 이중 삼중 창틀을 가진 최강 단열의 신축 건물에 역세권인 집을 찾길 원치 않겠는가? 같은 돈이라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아버지가 화단에 심어보라고 건네준 으아리 꽃씨를 저온처리해 발아시키려고 발코니 화분에 묻어둔다. 저온처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될 것 같다. 내년 봄 저 꽃씨가 싹을 틔울 때까지 무사히 겨울을 나기를. 더 고치고 바르고 닦고 막으면 내년 겨울에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다.(내년까지 집주인이 나를 여기에 이대로 계속 살 수 있게 해준다면 말이다.)

다이나믹 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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