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 틀려도 괜찮아" 진지한 위로 [책과 삶]

심윤지 기자 2020. 12. 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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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한성우 지음
창비 | 320쪽 | 1만6000원

어쩌다 보니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됐지만, 맞춤법 앞에선 자꾸만 작아지게 된다. ‘전세값’이냐 ‘전셋값’이냐, ‘공기밥’냐 ‘공깃밥’이냐. 볼 때마다 헷갈리고 쓸 때마다 틀린다. 그나마 사이시옷은 ‘원래 어렵다’는 변명이라도 해볼 수 있다. 글 쓰는 사람이 이래도 될까, 얼굴이 화끈거리는 정도의 실수를 한 것도 여러 번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쓰는 말
그것이 우리말, 한국어가 된다”
어떠한 문법도 어법도 사전도
말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어

여기 나도 모르게 ‘맞춤법 스트레스’를 고백하게 만드는 책이 있다.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은 맞춤법 앞에만 서면 주눅 드는 이들에게 “틀려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책이다. 일상에선 술술 말을 하다가도 유독 글 쓰는 것은 주저하는 이들에게 저자인 국어학자 한성우는 말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쓰는 말이 모여 우리말을 이루고, 한국어가 된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이들이 곧 말의 주인이다.”

말의 주인인 우리는 왜 말 앞에서 늘 작아지는가. 저자는 우리 주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빨간펜’ 선생님들에게 원인을 찾는다. 말이나 글의 내용에 주목하기보다, 눈에 불을 켜고 잘못된 점부터 찾아내려고 한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이다. 국어학자들이 문법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사람들이 말하고 이를 글로 옮기는 방식까지 통제할 수는 없다. 문법도 어법도 사전도 이들의 말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한때 “푼푼하고 옹졸한 국어 선생”이었던 저자는 이 사실을 깨닫고부터 ‘맞춤법 꼰대’에서 벗어나게 됐다고 했다.

맞춤법 관련 일러스트. 김상민 화백
‘등교길’이든 ‘등굣길’이 됐든
말의 주인들은 학교가는 게 중요
규범에 얽매이다 소통 못해서야
현실 뒤의 규범, 발맞춤도 필요

책은 사이시옷, 외래어 표기, 띄어쓰기 등 한국인이 어렵다고 느끼는 열 두 가지 주제를 다룬다. 한국어의 역사는 물론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사례까지 두루 인용하며 “우리가 맞춤법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사이시옷을 해결하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세종대왕 같은 분이 이 나라 최고 통치자가 되어서 지구상의 어떤 독재자보다도 더 강력하게 사이시옷의 전면 폐지, 혹은 전면 사용을 공표하는 수밖에 없다.” 황당한 결론처럼 들리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글은 소리글자고, 소리글자는 소리대로 적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사이시옷에는 글자만 있을 뿐 소리는 없다. ‘촛불’을 예로 들어보자. [초]와 [불] 사이엔 된소리 [ㅃ]뿐이고 [ㅅ]은 존재하지 않는다. 된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이시옷을 넣는다는 설명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에 어긋나는 반례는 수없이 많다.

그러니까 사이시옷이 어려운 건, 언중의 학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사이시옷을 일관적으로 쓰기가 워낙 어렵고, 이를 잘 안 지킨다고 해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지도 않는다. 북한에서는 아예 사이시옷을 없애버리는 ‘화끈한 해결책’을 택했지만, 이 역시 소리 나는 대로 쓸 수 없으니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내가 잿더미에서 샛별을 보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내가 재더미에서 새별을 보았다]고 쓰는 것을 감당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복잡해 보이는 사이시옷 규정도 그 자체로 많은 이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논쟁한 결과물이라고. 이러한 규정을 만들기 위해 연구자들은 “역사를 이야기하고, 원칙을 이야기하고, 현실을 이야기한다. 이런 과정에서 정설이 나오고, 원칙이 정해지고, 예외가 인정된다”. 그렇게 한때 ‘등교길’이었던 단어가 ‘등굣길’이 됐고 ‘헛점’이었던 단어가 ‘허점’이 됐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다.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다. 말의 주인들로선 ‘등굣길’이든 ‘등교길’이든 학교 가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기에.

우리가 말의 주인이라는 말 뒤엔, 주인 한두 명 마음대로 말을 바꿀 수 없다는 뜻도 숨어있다. 말의 주인이 되는 세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혼자 밥을 먹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 ‘혼밥’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두 한자어를 결합한 ‘독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자보다 한글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그냥 ‘혼밥’이라 부르길 선택했다. 1970년대 유행한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같은 신조어는 단어와 단어의 첫 글자를 따는 줄임말 활용 폭을 한층 넓힌 기념비적 단어였다.

“일상에서 자리 잡은 언어는 전부 바꿔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책은 아니다. 다만 저자의 문제의식은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언어에 담긴 갈등을 짚어내고 이것이 일으킬 수 있는 차별의 문제에 주목한다.

결혼으로 맺어진 친·인척의 호칭을 이야기하면서는 유독 여성에게만 ‘도련님, 아가씨, 서방님, 형님’이 생기는 성차별적 관행을 되돌아본다. 압축기기의 일종인 ‘톰슨 프레스’를 ‘도무송’이라는 일본어로 불러온 충무로 인쇄상들의 말버릇은 순화해야 할 대상인지도 되묻는다.

이 책은 저자가 “말의 주인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틀렸다, 이상하다는 타박 대신 “말의 주인은 늘 옳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그 전제는 “주인은 자신의 것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규범은 원활한 소통을 위한 것이고 규범에 얽매이다가 원활한 소통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규범은 현실보다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고 발걸음 느린 규범에 맞춰 자신의 보폭을 줄일 필요도 있다.” 이런 밀고 당기기를 통해 만물은 발전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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