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레시피] '변했어'보다 '한결같아' 소리를 들어야 한다

2020. 12. 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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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변했어’ vs ‘저 사람은 한결같아’. 직장 생활은 물론이고 세상살이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변했어’보다 ‘한결같아’다. 그것이 선한 역이든 악역이든 말이다. 하다못해 악역이라도 꾸준히 유지해야 영화 속 악역처럼 확실한 캐릭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선과 기만의 유효기간은 짧다

시간이 흐르면 상황도 바뀐다. 그러면 그 시간과 상황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은 당연히 변한다. 변하지 않으려 해도, 설사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도, 주변 사람들은 ‘그가 변했다’고 단정 짓는다. 이것이 인간 세상이고 직장 생활이다. 직장 생활에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주로 지위 변화에서 비롯한다. 즉, 승진, 영전, 실세의 인정 등등이다. 좌천이나 승진에서 탈락해 변방으로 쫓겨나는 직장인에게는 ‘변했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변했다’는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자신의 단점을 깨닫고 새롭게 변신하는 개과천선의 의미도 있지만, 지위나 신분이 상승하면서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모습인 독선, 오만과 거만을 드러낸다는 의미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변한다. 그렇기에 과거보다는 현재를,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설계나 희망이 가능한 것이다.

직장인이 제일 듣지 말아야 할 말이나 평가는 바로 ‘변했어’다. 특히 “승진하더니 사람이 변했어”, “힘 좋은 자리로 가더니 안면을 싹 바꾸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위선적이야”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동안의 이미지가 모두 거짓과 위선이었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승진할수록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처신해도 주변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흠을 잡기 위해 안달인 것이 직장 생활이다. 그런데 스스로 승진의 영광을 오만함으로 맞바꾸는 것은 현재의 만족을 위해 미래를 포기하는 짓이다. 어제의 동료에 대해 하루아침에 “누구세요?”라며 안면몰수하는 것은 자신을 고립시키는 짓이다.

S기업 김 차장이 있다. 그는 공채로 입사했지만 세칭 SKY 출신도 아니고 뛰어난 능력자도 아니다. 하지만 김 차장에게는 그만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부서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성실함, 인턴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겸손함, 나보다 남을 더 우선하는 배려심이다. 김 차장은 업무 능력보다 항상 평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것이 승진의 요인이 되었다. 그의 차장 승진이 발표되자 모든 부서원들이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하지만 김 차장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우’였다. 학벌과 실력에서 남보다 뒤처지는 부분을 평판과 대인관계로 만회하겠다는 그의 전략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성공했다. 자신의 목표가 달성되자 김 차장은 돌변했다. 동기에게도 반말로 지시하고 인턴들의 인사도 받지도 않았다. 물론 부장이나 이사 앞에서만은 위선적인 모습을 유지했다.

그는 회사를, 동료를 속여 왔다. 하지만 그가 속인 것은 결국 자신이라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김 차장의 팀원은 7명. 그들은 6개월이 지난 후 도저히 김 차장의 독선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에 참을 수 없어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집단 사표를 불사하며 위선자와 일할 수 없다는 진정서를 회사에 냈다. 회사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검증 끝에 김 차장의 기만과 거짓된 처세가 드러났다. 결국 김 차장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김 차장은 순간의 처세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리더십 발휘에서 실패했다. 거짓 처세, 오만의 리더십, 이 상반된 모습에 동료는 물론이고 상사들도 그의 진정성에 의문 부호를 제기한 것이다.

조직에서 업무와 관련 없지만 일단 능력, 인품, 성격 등에서 의문이 제시되면 그것을 만회하기는 무척 어렵다. 마치 프로 축구 2부 리그로 강등된 팀이 1부 리그로 다시 올라가는 것만큼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겸손과 오만, 거짓과 진실, 마치 물과 불처럼 섞이지 못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극복하는 위선의 자세와 자만심은 버려야 한다. 직장 생활은 물론이고 세상살이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는 ‘변했어’보다 ‘한결같아’다. 그것이 선한 역이든 악역이든 말이다. 하다못해 악역이라도 꾸준히 유지해야 영화 속 악역처럼 확실한 캐릭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 황제 그리고 자신까지 속인 양광

여기 ‘주식회사 수’가 있다. 창업주는 뛰어난 전략과 물로 배를 채우는 검소함, 밤낮없이 일하는 성실함으로 창업 10년 만에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확실한 신상필벌과 따뜻한 배려의 리더십을 발휘했고, 사원들은 그를 신뢰했고 애사심 또한 높았다. 시간이 흘러 그의 아들이 회사를 물려받았다. 회장실에서 2세 회장은 아버지가 물려준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금고에는 회사가 향후 50년 동안 매출이 전혀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천문학적 금액이 들어 있었다. 즉, 2세 회장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어도 회사가 유지되는 시스템을 갖추어 둔 것이다.

그러나 회장 자리만을 목표로 인생을 살아온 2세 회장은 가만있지 못했다. 그는 창업주인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거짓으로 일관했던 모습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50층 높이의 초호화 사옥을 짓고 개인 별장을 전국에 마련했다. 또 미술품, 골동품을 수집해 자신의 지적, 문화적 허영심을 충족시켰고, 한 대에 수억 원을 호가하는 슈퍼 카로 주차장을 가득 채웠다. 또 1000억 원이 넘는 호화 요트는 물론 내부 인테리어만 몇 백억 원이 드는 자가용 비행기도 구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경영 철학과 세계 경영의 기치를 홍보하기 위해 마케팅비, 광고비를 수천억 원씩 지출했다.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 썼다. 그러자 마르지 않는 우물 같던 회사 재정이 점차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쟁사들이 연구 개발로 새로운 제품을 내놓자 시장은 수 기업의 상품을 진열대에서 빼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업 공신들은 물론이고 엘리트 직원들은 이탈하고 몇몇 간신들만 회장 옆에서 콩고물을 챙기고 있었다. 결국 회사는 창업한 지 37년 만에, 2세 회장이 맡은 지 13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 ‘주식회사 수’가 바로 중국의 수나라다. 581년 남북조 시대를 종결하고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양견이 세웠다. 그는 수나라를 최강의 국가로 건설했다. 문제 양견은 전시성 사업보다는 충실하게 내실을 다지는 정책을 펼쳤다. 『자치통감』에는 ‘문제 재위 말엽, 수나라는 군이 190개, 현이 1255개, 가구 수가 무려 890만 호에 달했다. 영토 또한 동서로 9300리, 남북으로 1만4800리에 달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지 않아도 무려 50여 년을 지탱할 부를 축적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은 이가 바로 수나라 2대 황제 양광이다. 우리는 그를 ‘수양제’라 부른다. 본래 양광은 태자가 아니었다. 태자는 장남 양용. 그는 양광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 양광은 20세에 수나라 군대를 지휘해 남조를 멸하고 천하 통일에 일조한, 즉 창업 지분이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그 지분만으로 태자가 될 수는 없었다. 양광은 간특했다. 그는 아버지 문제와 아버지보다 더 강한 권력자인 어머니 독고황후의 눈에 들기 위해 거짓과 기만을 선택했다. 독고황후는 남자의 바람기를 무척 싫어했다. 그녀는 태자 양용이 자신이 중매한 태자비의 죽음에도 아랑곳없이 후궁을 들이고 향락을 일삼는 데 실망했다. 양광은 무조건 양용과 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비단옷 대신 남루한 옷을 입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여자를 멀리했다. 자연히 독고황후는 양광을 주목했다. 몇 년이 흐르자 독고황후는 양광을 태자로 추천했다. 문제 역시 양광을 마음에 두었다. 드디어 양광은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하는 듯했지만 제일 무서운 존재인 어머니 독고황후가 병으로 죽자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향락과 사치, 여색에 몰두했다. 그리고 아버지마저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고 황제가 되었다.

양광은 본래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 그는 그동안의 위선적 행동을 보상받으려는 듯 돈을 물쓰듯 쓰기 시작했다. 호화로운 궁을 짓고, 운하를 건설하고, 수십 개의 정원과 별궁을 세웠다. 그리고 천하 유일 지배자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고구려 정벌을 단행했다. 하지만 세 번에 걸친 고구려 정벌은 수양제에게 파멸의 늪이 되었다. 무려 113만 대군을 동원했지만 참패했고, 그 여파로 수나라는 흔들렸다. 장기간 전쟁으로 재정은 파탄 나고, 기근과 가뭄으로 백성들은 도적으로 변했다. 농민 봉기가 일어났지만 양제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피난지에서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다. 618년, 양제는 근위대장 우문화급의 반란으로 죽임을 당했다.

양제의 흔적은 지금도 중국에 남아 있다. 남쪽 양쯔강과 북쪽 황하를 연결한 대운하는 현재도 중국 물류의 중심이다. 이 운하로 인해 중국이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었다고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양제의 기만과 위선, 과시와 오만의 리더십으로 인해 수나라는 개국 37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역사는 양제를 조롱한다. 시호인 양제의 ‘양煬’은 주로 ‘나라를 망친 군주’를 일컫는다. 창업주의 아들로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양제는 이를 늘리기는커녕 지키지도 못했다. 양제는 진시황제, 한무제처럼 위대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양제는 두 사람의 겉모습만 흉내 낼 뿐, 본질을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하고자 한 일, 자신이 추구한 기쁨을 백성과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유산을 탕진한 2세의 표본이 된 양제. 역사는 그를 통해 거짓으로 위장된 이미지, 철학이 없는 리더십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적한다.

▶패륜과 역모로 황제가 되다

양광은 569년 양견의 네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했던 양광은 진왕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13세에 무위대장군, 18세에 회남도행대에 임명되었고 이후 수나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수서隋書』에 ‘양광이 학문을 좋아하고 글도 잘 썼다. 신하들이 초고를 써 오면 이를 다시 고쳤다’는 기록도 있다. 양광의 할아버지 양충은 남북조 시대, 북위가 서위와 동위로 분열될 당시 우문태가 서위를 건국하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올랐다. 그리고 위가 북주가 된 뒤 양충은 수국공이 되었다. 그는 돌궐을 정복하라는 무제 우문옹의 지시로 원정 준비를 하던 중 병사했다. 양충의 아들 양견이 대장군과 수국공 등의 지위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무제의 뒤를 이은 선제 우문윤은 황제가 된 지 불과 8개월 만에 스스로 퇴위했다. 그 뒤를 어린 정제가 이었다. 권력은 양견에게 집중되었다. 그때 양견의 유일한 견제 세력인 선제가 죽었다. 양견은 섭정공에 올라 권력을 행사했다. 581년, 양견은 왕호를 받은 뒤 정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는 나라 이름을 수라 짓고 태조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현명하고 건실한 창업주였다. 그의 20여 년간 국가 기틀을 완벽하게 마련했다. 국고는 넘쳤고, 영토는 확장되었다.

문제는 탁월한 군사 외교책으로 돌궐을 서돌궐과 동돌궐로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시켰다. 수나라 북쪽은 안정되었다. 문제는 남조의 마지막 세력 진나라를 공략해 완벽한 통일 왕국 건설을 계획했다. 588년 수나라군은 남조 진나라 공격에 나섰다. 이때 총사령관이 불과 20세의 양광이다. 589년 양광은 진나라 수도 건강을 점령했다. 양광의 군대는 진나라를 점령한 후 약탈과 살생을 금지해 백성들의 칭송을 얻었다. 양광은 그 공으로 태위, 양주총관이 되었다. 이후 양광은 동생 양량과 함께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양광은 대패했다. 분노한 문제는 양광과 양량에게 자결을 명했지만 어머니 독고황후의 중재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독고황후는 현명하고 강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독고 가문은 당대 최고 명문가. 문제의 성공 역시 독고 가문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고황후 언니 명경황후는 수나라 전신 북주 명제의 황후였고, 또 언니 원정황후는 당 왕조 창업자 고조 이연의 생모였다. 즉, 당대 강국인 북주, 수나라, 당나라가 모두 독고 가문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양견과 결혼할 때 “다른 것은 모두 이해할 수 있지만 첩을 들이고, 배다른 자식을 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만큼 독고황후는 여색을 즐기고 향락을 일삼는 행동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신들도 처첩을 많이 들이면 멀리했다.

양광은 어머니의 성격을 이용했다. 태자 양용은 수십 명의 후궁을 들였다. 독고황후가 직접 간택한 태자비 원 씨는 청상과부 신세였다. 그러다 태자비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독고황후는 후궁이 태자비를 모함하고 해친 것이라 생각했다. 양용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여색을 탐했다. 독고황후는 양용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영리한 양광은 양용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아버지가 신경 쓰는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 어머니 독고황후의 여색을 싫어하는 금욕 생활, 이 두 가지를 철저하게 지켰다. 문제와 독고황후의 신뢰가 점차 양광에게 향했다.

어느 날, 문제와 독고황후가 양광의 집을 찾았다. 양광은 젊고 예쁜 하녀와 후궁은 모두 숨어 있으라 하고 늙은 하녀들에게 시중을 들게 했다. 그리고 화려한 집기와 보물도 다 치웠다. 독고황후는 “진왕은 여색도 멀리하고 생활도 참으로 검소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갑자기 양광이 엎드렸다. 그러면서 “저는 형제의 정을 두텁게 생각하는데 태자가 저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저는 밥을 먹을 때나 술을 먹을 때도 항상 두렵습니다”라고 울면서 말했다. 독고황후는 분노했다. 그리고 양용을 폐하고 양광을 태자로 삼기로 결심했다. 또 양광은 문제가 신임하는 대신 양소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문제의 후궁과 황족, 귀족들에게 뇌물을 듬뿍 뿌렸다. 여론도 양광에게 우호적으로 형성되었다. 600년, 드디어 양용은 폐위되고 그 자리를 양광이 차지했다. 양광의 거짓과 기만이 성공하는 순간이다.

602년, 양광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던 독고황후가 병으로 죽었다. 그러자 양광은 본색을 드러냈다. 수많은 후궁을 두고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 문제의 후궁 선화 부인을 사모하던 양광은 선화 부인까지 범하려 들었다. 선화 부인을 희롱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제는 분노했다. 문제는 양광을 폐위하고 다시 양용을 태자로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양광은 문제의 계획을 접하자 반란을 획책했다. 그는 양소, 우문술 등과 쿠데타를 모의했다. 군대를 동원해 인수궁 대보전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문제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신하가 황제를 죽이는 패륜과 역모를 동시에 범한 것이다. 그리고 양광은 문제의 유언장을 조작해 형 양용에게 자결을 명령했다.

▶패륜과 반역, 위선과 기만의 모래성

양광은 수나라 2대 황제인 ‘양제’가 되었다. 양광의 나이 36세였다. 양제는 대규모 토목 사업을 일으켰다. 양쯔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 공사, 진시황이 구축한 만리장성을 개축했다. 또한 낙양을 제2의 수도로 정하고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을 지었다. 양제는 정치 중심의 북쪽과 풍부한 물자의 남쪽을 운하로 연결하면 진정한 통일이 완성된다고 판단했다. 양제의 이 생각은 옳았다. 그의 유일한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운하 건설로 중국 남북의 문화 경제적 교류가 완성된 것이다. 운하 공사에는 연인원 1억5000만 명이 동원되었다. 양제는 운하 곳곳에 40여 개의 궁을 지었다. 양제는 운하를 건설하면서 제방에 버드나무를 심었다. 늘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수양버들의 풍취가 제법이었다. 훗날 양제가 물러난 뒤 역사학자들은 “양제가 남긴 것은 운하와 그 주변에 심어진 버드나무뿐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운하를 건설하던 중 높이가 서로 맞지 않으면 잔인하게도 백성들을 생매장해 운하의 높이를 맞추었다.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졌다. 낙양 건설에는 200만 명의 백성이 동원되었고 각 지역에서 석재와 목재 등이 수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병으로 죽어 나갔다. 양제는 낙양에 정원을 건설하고 그 안에 인공 호수 세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호수 안에는 인공 섬을 쌓고 섬마다 정자를 세웠다. 게다가 수로를 만들어 호수와 바다를 연결하고 그 물줄기를 따라 숲을 조성하고 동물을 사육했으며 매일 후궁들과 연회를 열었다.

양제의 사치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4층짜리 배 용주를 만들었다. 용주에는 후궁과 대신 등 수천 명이 자리했다. 이런 배의 행렬이 무려 200여 리로, 그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 이 행차에 필요한 음식과 돈은 백성들과 지방관들이 마련했고 음식이 남으면 그 자리에서 버렸다. 또 백성들이 용주를 육지에서 끌었는데 그 인력만 8만 명이었다. 양제는 이동식 궁전도 만들었다. ‘관풍행전’이라는 이 궁전은 조립과 해체가 가능한 궁전으로 양제의 지시에 따라 수백 명이 묵을 수 있는 규모로 제작되었다.

운하 공사, 낙양 건설, 만리장성 수축, 궁궐 건설 등에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백성들은 공사장에 끌려가 몇 년을 중노동에 시달리거나 죽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차라리 공사장에 끌려가느니 불구로 평생을 살겠다는 백성이 생겼고 일부는 스스로 팔과 다리를 잘라 불구가 되었다. 이들을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 불렀다. 양제의 사치와 향락이 이 정도에만 그쳤어도 양제와 수나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국고는 텅 비었지만 아직 수나라 국력이 중원을 지배할 수 있었다. 양제는 제2의 진시황이 되고자 했다. 천하 통일, 남북 교류, 이민족 정벌, 대규모 공공 사업, 찬란한 궁정 등 그는 역사상 아무도 이루지 못한 진정한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돌궐을 공격해 승리했다. 양제의 자신감은 높아졌다.

그는 고구려 원정군을 구성했다. 612년, 113만 명에 이르는 고구려 원정군이 집결했다. 우문술, 우중문이 이끄는 육군과 내호아가 지휘하는 수군이 선발대. 부대가 출발하는데 행렬 길이가 무려 1000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수나라 본대는 요동성에서 발목을 잡혔다. 양만춘은 6개월 동안 파상 공격을 막아냈다. 양제는 우중문에게 별동대로 평양성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이 부대는 을지문덕에게 살수에서 전멸하고 말았다. 이때 살아 돌아온 군사 수가 30만 명 중에서 2700명뿐이었다고 한다. 양제는 결국 퇴각하고 말았다. 양제는 밤낮으로 고구려 정복만 생각했다. 대신과 장수들이 반대해도 듣지 않았다. 그는 613년 35만 대군으로 다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안시성 앞에 토성을 쌓았다. 이때 장안에서 급한 전갈이 왔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양제는 급하게 철군했다. 민심은 수나라를 떠나고 관료들도 수양제의 폭정에 지쳐 갔지만 양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연회를 즐기며 또 고구려 원정군을 조직했다. 간관들이 반대했지만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 반대하는 소리만 꺼내도 죽이겠다”고 소리쳤다. 614년 결국 고구려 원정군이 출발했다. 전선으로 가는 도중에 탈영병이 속출했다. 3차 고구려 원정으로 수나라 재정은 바닥났다. 양제의 폭정과 사치, 향락이 계속되자 반란도 일어났다. 반란군 중에는 태원 유수 이연도 있었다. 세력과 민심을 얻은 이연은 양제를 태상황으로 올리고 양제의 손자 양유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가 수나라 3대 황제 ‘공제’다. 그리고 이연은 대승상으로 권력자가 되었다. 양제는 왕조가 멸망 직전인데도 반성을 몰랐다. 그는 별장에서 사치와 여색에 탐닉했다. 궁에 100여 개의 방을 짓고 방마다 아름다운 후궁을 들어앉혔다. 이제 양제 주변에는 충신도 신하도 남아 있지 않았다.

618년 양제의 호위대장 우문화급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양제에게 자결을 명했다. 그리고 양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양고를 죽였다. 양제는 그제서야 “내가 그래도 황제인데 독주를 마시고 죽겠다”고 했으나 우문화급은 그의 목을 매 죽이고 말았다. 양제의 나이 49세였다. 양제의 손자 공제 역시 이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연은 공제에게 양위받는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바로 당나라 고조다. 수나라는 불과 3대, 3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57호 (20.12.0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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