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착해지는 여행-가을 계룡산, 갑사 가는 길

2020. 11. 2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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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갑사로 가는 길’이라는 수필을 교과서에서 읽었었다. 수필가 이상보가 쓴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며 누구나 한번쯤 생각했던 것은 ‘나도 걸어봐야지’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그래도 한번쯤 가보기 어렵지 않은 길이지만 타지 사람 대부분은 일몽으로 끝나곤 한다. 수십 년 만에 그 길을 향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갑사로 가는 그 길은 결코 수필에서 느꼈던, 힘들지만 안온한 길만은 아니었다. 꽤 지루한 고공 산길이었다. 숨쉬기조차 바쁜 등산길이었지만 적어도 세 번 세상을 향해 절을 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수필가 이상보 님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다. 어느 프로필 파일을 보니 그의 약력에 ‘전 수필가’라는, ‘앞 전(前)’ 자가 붙어 있었다. 수필가로 살다 가셨으니 전 수필가로 표기하는 게 맞는 표현법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상보의 ‘갑사로 가는 길’은 그가 그 이야기를 문장으로 만들었을 때도, 교과서에 실렸을 때도, 그의 수필집 한 페이지를 채웠을 때도, 그리고 작가가 떠난 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필로 읽히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이상보의 직업이 수필가이지 어째 전 수필가가 될 수 있을까.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공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눈 대화 가운데 ‘변화’가 화두에 등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상보의 ‘갑사로 가는 길’을 인터넷에서 꺼내 읽어보니 세상 참 변한 게 없다는 좌절감과 함께 안도감이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다. 세상이 변하길 바라는 마음에는 나의 이기심이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나라가 잘 살았으면, 집값이 상식적이었으면, 세금이 공평했으면, 현장이 안전했으면 하는 바람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결국 내 인생이 활짝 피어나 씁쓸하고 답답한 세상이 사라지면서 나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자신의 희생을 목표로 하는 변화 모색이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이 공간에 흉탄이 날아다니는 테러가 발생하지 않고, 바이러스 창궐로 인해 매일 수천 명이 죽어나가지 않으며, 무시무시한 강대국에 나라와 정부와 개인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노예가 되어버리지 않은 것, 다시 말해 작금의 현실이 변하지 않는 것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시민들 대부분은 더 나빠질 것도 없을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계룡산에 동행한 친구들 또한 그런 면에서 세상이 변화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쁜 쪽으로 변하지 않은 행운에 감사했다. 그런 마음으로 동학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마자 계룡산을 향해 꾸벅, 첫 번째 절을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울긋불긋 휘황찬란했을 계룡산이 그 며칠 새에 가을의 옷을 벗고 있었다. 지는 단풍 속을 걷는 것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니 나쁘지 않다.

▶무속신앙의 성지가 담백한 절산으로

계룡산은 산신을 상징하는 산이다. 삼한시대 때부터 이곳 산에서 제사를 지냈고 그 이후에도 백제, 신라, 고려, 조선, 그리고 해방된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그 기도의 목소리는 이어져 왔다. 정감록의 논리로 불리는 『도참서』에는 정씨가 800년 도읍할 곳으로 이곳 계룡산 일대를 꼽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묘향산에 상악단, 계룡산에 중악단, 그리고 지리산에 하악단을 두어 국가의 대소사를 기원했다. 훗날 묘향산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은 없어졌지만 계룡산의 중악단은 여전히 남아 산신을 향한 속세의 희망을 기원하고 있다. 심지어 이성계는 계룡산 아래 신도안을 조선의 도읍으로 삼으려 하기도 했다. 행정수도를 계룡산 자락 세종시 일대로 잡은 것 또한 계룡산의 상서로운 기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계룡산의 수많은 종교 시설들은 마을이나 개인 집에 굿당을 설치하지 못하게 한 새마을운동과 계룡대 군사시설 조성, 이른바 미신 타파 운동, 또는 계룡산에 터를 잡고 있던 수많은 종교 단체의 곤궁함으로 인해 정리되었다.

토테미즘의 퇴락은 누군가에게는 후련함을, 또한 누군가에겐 억압으로 다가왔다. 산신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토테미즘에는 산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산신은 계룡산뿐 아니라 전국의 산 속에 들어가 있던 무속 종교들이 정비되는 과정에서 사찰의 산신각 등으로 통합되었지만 무속 신앙 하나하나가 갖고 있던 엄연한 신화들마저 정리하진 못했다. 산이 많은 나라에서 산에게 기도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기도에는 산 하나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속인, 무속종교에 의지했던 사람들은 산뿐 아니라 그곳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믿고 의지했다. 계곡, 바위, 물, 고목, 토굴,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줄기, 바위를 뚫고 우뚝 선 소나무, 능선 위의 별과 달도 그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거기에서 시작된 신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도 다양했다. 더 오래 전에는 호랑이, 사슴도 기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전해진 그 많은 이야기들은 신앙적으로는 해탈의 동력이 되었지만, 잠언으로서의 그 이야기들은 개개인의 상상력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콘텐츠들이었다. 계룡산의 무속신앙이 죄 쫓겨 나면서 신도들의 재산을 본의 아니게 등쳐먹었던 종교인들이 사라진 점은 한편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으나 그들이 설파했던 재미있는, 신비한, 흥미진진한, 또는 이해 불가한 스토리들도 대부분 공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미약한 마음에 무당과 신점과 굿에 의지했던 백성들의 간절한 기원들은 더 이상 기댈 곳 없는 공허함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을 좋은 변화라 할지 아쉬운 상실로 규정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으로 계룡산 동학사 삼층석탑 앞에 섰다.

▶계룡산 동학사로부터 이어지는 기원의 돌탑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동학사 또한 계룡산에서 사라진 숱한 무속의 전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병 들고 길 잃은 처자가 스님을 찾아왔다. 정성과 공력으로 처자를 치료해 주고, 집에 데려가 부모 품에 안겨주려 했으나, 스님에 대한 처자의 연모의 정이 너무 컸고, 그녀의 부모 또한 딸의 생각과 비슷했다. 결국 스님과 처자는 남매가 되기로 언약했고, 훗날 스님이 입적한 뒤 그 자리에 사리탑 대신 세운 남매탑이 오늘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그것이 기원이 되어 오늘의 동학사가 있다는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 말이다. 그 스님의 법명은 상원조사다. 당시 사찰의 이름은 청량사였으며 때는 서기 724년 신라 성덕왕 23년 즈음의 일이었다. 이후 중창에 중창을 거듭한 끝에 동학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승가대학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대웅전 마당을 서성거려도 스님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 모두 수행과 학습의 공간에 자리하고 계신 것이다. 게다가 동학사는 이제 갓 출가해서 구족계(348가지의 계율)를 수행한 여성 스님(비구니)들에게 수행과 포교 등 스님 생활의 개요를 엄격하게 가르치는 곳이며, 수행을 시작한 스님들의 군기(?)도 바짝 들어 있을 테니 절간이 더욱 고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동학사는 이렇듯 스님이나 승가대학 스님들, 그리고 불자를 제외한 등산객, 관광객에게는 무덤덤한 공간이다.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점도 그렇고, 계곡을 깎아 만든 절이라 도량의 공간이 넓지 않다. 다닥다닥 붙여 지은 가람들이 주는 협소함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대웅전에 들어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그리고 석가모니불 왼쪽의 약사여래불을 바라보며 무언가 소원을 빌고 싶었지만, 대웅전 마당에서 들려오는 여행자들의 톤 높은 경쾌한 목소리에 괜히 미안해져 오히려 뒤숭숭해진 마음으로 신발을 신고 절을 떠났다. 어수선한 마음 탓도 있었지만, 서둘러 동학사를 떠난 이유는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극락봉까지 거의 수직으로 느껴지는 등산로를 걸어야 하고, 관음봉 꼭대기에 오르면 인증샷도 꼭 남겨야 할 것이며, 또 다시 거의 직선에 가까운 하산로를 걸어 갑사까지 들어가려면 아직 멀고 먼 길이 기다리고 있다. 계룡산 또한 여느 산들과 마찬가지로 돌들의 천국이다. 등산 계단도 돌로 만들었으며, 계곡 또한 거대한 바위들의 차지였다. 또한 등산로 양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봉우리들도 모두 바위로 이뤄져 있고, 그 바위를 뚫고 동양화 속의 모습 그대로 자란 소나무들은 이 낯선 여행자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던져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모든 소나무들, 바위들은 역시 한때 이곳에서 자신의 종교에 절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의 신앙이자 기원의 대상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들보다 백배 천배 더 강해 보이는 것은 바로 기원 돌탑들이다. 기도의 민족, 기원의 유전자는 전국 곳곳에 돌탑을 만들었으되, 계룡산의 돌탑은 유난히 많고 단아한 느낌이다.

소원 돌탑 쌓는 미풍양속을 아시는가? 대충 주워들은 이야기를 전한다면, 소원 돌탑은 한 사람 당 돌멩이 한 개씩을 차곡차곡 쌓아서 완성되어 가는 진행형 손가락 건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돌멩이 하나를 올릴 때마다 자기 소원 한 가지를 기원하는 것이며, 그 마음은 당연히 신성해야 하고 한참 동안 숨을 멈추는 절제를 필요로 한다. 남이 올려놓은 돌멩이 위에 내 돌과 소원을 올리는 일이므로 절대로 앞 사람의 정성이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내가 올리는 돌멩이 위에 또 다른 소원이 올라온다는 것을 생각해서, 뾰족한 돌을 올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 뾰족한 돌을 올리면 이 소원 돌탑은 더 이상 진행형 돌탑이 아닌 멈춘 돌무덤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더 이상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면 새로운 돌탑을 쌓기 시작하든가 아니면 다른 탑을 찾아야 한다. 무리수의 끝은 언제나 무너짐 아니던가. 어쨌든 계룡산의 굿당과 무당들은 사라졌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신만의 감사와 희망을 담은 소원 돌탑으로 계룡산의 영험한 정기를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등산 중에 만난 꽤 아름다운 소원 돌탑에 내 꿈을 올리며 두 번째 큰 절을 올렸다.

▶끝없을 것 같은 등산로…관음봉 오르는 길

왜 관음봉으로 오르냐 하면 계룡산의 주봉인 천황봉에 국가 시설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룡산의 중심 봉우리는 역시 관음봉이다. 이름이 관음봉이 된 것은 봉우리 모습이 묵직하고 든든한 것이 마치 관세음보살을 닮았다, 해석한 것이다. 동학사에서 관음봉으로 오르는 길은 심정적으로 수직 계곡을 오르는 것 같은 엄살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가파른 길은 끝이 없다. 등산로는 주로 돌을 깎아 만든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숨이 차다 못해 목구멍 바로 초입까지 차오르고, 급기야 이제 내 인생도 넘어가겠군, 싶을 때마다 꼭 절경이 나타나거나 동학사 계곡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나타나 호흡 조절을 유도해 준다. 동학사 마당에 있을 때는 잘 몰랐으나 해발 700m 가까운 높이에서 내려다 보자 이 깊은 곳에 은둔하며 더 심오한 세상 이치를 학습하고 있는 스님들의 정진 모습이 새삼 아름다워 보였다. 또한 옛날에는 호랑이들이 들이닥쳐 절이 폐사되는 일도 간혹 있었다고 하던데, 그 옛날 깊고 깊은 동학사에도 그런 기운이 스며들지 않았을까, 아찔한 상상도 하게 되었다. 해발 766m 관음봉에 오르니 세상이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형국이다. 2000m 가까운 산들이 수두룩한 우리나라에서 766m이면 사실 낮은 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계룡산 관음봉에 서면 세상이 한눈에 보인다. 이유는 이곳이 동쪽 백두대간에 비해 납작한 지형의 한반도 서쪽 차령산맥에 솟아 있고, 관음봉을 비롯한 천황봉, 삼불봉, 형제봉, 연천봉, 장군봉 등이 편안해 보이는 산세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학사에서 시작된 오르막길에서 돌탑을 쌓으며 오늘 등산과 하산이 즐겁고 감사하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빈 결과는 심신의 가벼움이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느니, 정복을 했다느니 하는 오만가지 생각은 할 여지가 없다. 관음봉 한 곳에 도착했다고 계룡산에 올랐다 할 수 있을까? 계룡산을 계룡산으로 불리게 했다는 20여 개의 닭 벼슬을 닮은 봉우리들 가운데 절반이라도 오른다면 또 모를까. 관음봉 정상에 서서 계룡산에 올랐다는 생각보다 넓은 자락에 안겼다는 편안함을 느낀 것은 역시 소원 돌탑을 쌓으며 빌었던 오늘의 바람을 계룡산이 들어준 결과일 것이다. 어디 산뿐일까. 동학사 비구니 스님들은 여행자들이 대웅전과 고려의 충신을 기리는 삼은각, 단종과 그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신 숙모전 등을 기웃거리는 그 시간에도 동학사 가람은 물론 관음암, 길상암, 문수암, 미타암, 귀명암, 상원암 등 동학사 주변에 바위처럼 앉아있는 암자에서 수행에 몰두하고 있다. 속세의 중생은 어차피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지만, 그 암자 한 곳 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득도와 회향의 길을 모른 채 어떻게 동학사를 보았다 할 수 있을까?

관음봉에 서서 세상과 계절의 절정을 지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제법 철이 든 척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빠져본 뒤 곧장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연천봉 고개를 넘어, 연천봉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길을 돌려 갑사로 내려가는 길이다. 눈을 뜨고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가기 시작하자 정신이 번쩍하며 긴장이 시작된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모습이고 까마득한 곳에서 어둠을 맞을 채비를 갖추고 있는 갑사까지는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할 시간인 것이다. 등산보다 위험한 게 하산이라고, 모두들 등산 스틱을 뽑아 내 체중이 내 무릎 연골을 깎아먹는 일에 대비하고, 계단을 뒤덮고 있는 낙엽 밑의 위험을 확인하며 조심조심, 그러나 바지런히 걸어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왔던 길보다 더 길고 지루했고 초조했다. 역시 등산은 새벽바람 맞으며 올라가 점심 무렵에 하산하는 게 정석이다.

걷고 또 걸어도 나타날 것 같지 않던 갑사에 도착하자 이제 해는 거의 다 넘어가고 절간을 오갔을 여행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어둑한 경내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라도 갑사를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러나 조급함 때문인지 마음이 자꾸 스스로를 갑사로부터 밀어내는 느낌이다. 갑사도, 대웅전 건너편 강당 어귀에 앉아 있던 스님들도, 그 누구도 밀어내지 않지만, 어둠이 빠른 속도로 내리고 있는 절간을 유유히 걷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한호(한석봉)가 쓴 편액이 걸려있는 갑사 대웅전
▶고혹적 사찰, 계룡산 갑사

대웅전 편액을 그 유명한 명필가 한석봉(한호)이 썼다는 것을 확인하고, 강당 편액을 힘찬 작품으로 만들어 준 계룡 갑사의 글씨가 당시 충청절도사로 병권을 쥐고 있던 홍재의의 솜씨라는 것 정도만 확인하고 바리바리 갑사를 떠날 채비를 했다. 한편으로는 나가는 길에 살짝살짝 보이는 가람들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갑사에는 표충원이라는 가람이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더불어 청주성 탈환 전투에서 승리한 승병장 영규대사를 기리는 곳이다. 그는 청주산성 탈환 성공에 고무되어 계속 금산 전투에도 참가했는데, 그만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고, 불과 이틀 만에 입적했다. 그러나 억불 유교국 조선은 대사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는 그만 계룡면 유평리에 이름도 없이 묻히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스님들이 갑사에서 표충원을 짓고 스님의 사당과 기념비를 세워 대사의 공적을 기렸다.

또 하나 눈길이 가는 가람과 시설로 장경각과 공우탑이 있다. 갑사에는 부처의 삶을 기록한 서책 『월인석보』(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쳐서 만든 책) 판목이 있고, 이곳 갑사 장경각에 그 서책 31권이 보관되어 있다. 공우탑은 갑사 건축 당시 어느 날 스스로 나타난 소 한 마리가 스님들을 도와 주다, 건축이 마무리되자 현장에서 쓰러져 죽은 소를 추념하는 탑이다. 당시 스님들은 그 소를 부처님의 화신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갑사는 동학사보다 앞선 서기 420년 백제 구이신왕 원년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당시 갑사라는 이름은 이 절이 산허리에 있다는 뜻으로 붙여졌으나 훗날 의상대사에 의해 화엄경 10대 사찰 중 한 곳으로 지정되자 최고라는 뜻의 ‘갑’자를 붙였다. 날씨가 어둑해진 탓도 있었겠지만 갑사에는 유난히 오랜 세월을 보여주는 고목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가을 끝자락을 보여주는 은행잎이 일주문 주변을 뒤덮고 있는 풍경도 시적이었다. 어둠 속에서나마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갑사는 꼭 한번 다시 찾아가야 할 계룡산의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동학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갑사 주차장으로 하산한 일행은 현지 택시를 불러 다시 동학사 주차장으로 가야 했는데, 총알택시급 과속 운전 끝에 텅 빈 동학사 주차장에 도착,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큰 산을 여행할 때마다 등산 출발점과 하산 도착점이 달라지곤 하는데, 미리 현지 택시 정보를 확인해 두는 게 안전하다.

▶계룡산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 ‘곰골식당’

계룡산 일대에는 무수한 맛집들이 있지만 일행이 찾은 곳은 공주 사람들에게 맛집으로 인정받는 곰골식당이다. 단지 이 식당은 대기가 너무 길어서 정작 공주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다는 소문. 다행히 저녁 피크 타임이 지난 터라 손님은 별로 없었다. 이 집의 메뉴는 생선구이(8000원, 1인분 주문 가능), 갈치조림(8000원, 1인분 주문 가능), 참숯제육석쇠한판(1만5000원, 공기밥 별도), 묵은지갈비(1만 원, 2인분 주문 가능) 등 딱 네 가지뿐이다. 1인분 주문이 가능해서 둘이 가도, 셋이 가도 골고루 시켜 두루두루 맛볼 수 있다. 고기와 생선구이의 맛은 신선했다. 야채, 어묵, 느타리버섯 등 반찬 또한 단정했고 석쇠 구이에서 풍기는 야릇한 불 향기는 침샘을 자극하는 애피타이저가 되기에 충분했다. 끝으로 흑미와 된장국은 곰골식당에 또 오고 싶게 만드는 건강 아이템이었다. 분명한 맛집이지만 이 집 음식 하나 먹겠다고 공주를 찾는 일은 없다는 댓글들도 몇 개 보인다.

위치 충남 공주시 봉황로 61(반죽동) 시간 11:00~21:00 주차 공영주차장에 주차. 공휴일에도 불법주차 단속

[글과 사진 이영근]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56호 (20.12.01)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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