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때 이뤄진 인수합병·금융권 재편의 산물 [심층기획]

남정훈 2020. 11. 2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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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중은행의 역사는?
90년대 후반까지 '조상제한서' 대표적
대기업 부실 대출로 줄줄이 퇴출 당해
신한·하나·국민은행 3곳은 살아남아
상업·한일 합병 우리은행으로 재탄생
제일은행,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에 인수
우리나라 최초의 시중은행은 신한·우리
합병의 역사.. '타이틀' 놓고 신경전도
현재 4대 시중은행 시작 '오사카 신한銀'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서
2020년의 오늘, 한국의 대표적인 은행을 꼽자면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NH농협은행이다. 이른바 ‘5대 시중은행’이다. 이 중 협동조합으로 시작한 특수은행인 NH농협은행을 뺀 나머지 4개 은행들을 보통 4대 시중은행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이들을 4대 시중은행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들보다 규모가 더 컸던 은행들이 존재했다. 4대 시중은행의 오늘은 1997~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이뤄진 수많은 인수합병과 금융권 재편을 통해 살아남은 결과다. 4대 시중은행의 역사는 곧 금융권 인수합병의 역사인 셈이다.

◆‘조상제한서’를 기억하시나요?

한국의 은행 역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줄임말이 있다. 바로 ‘조상제한서’다. 설립 순서대로 조흥은행(1897년)과 상업은행(1899년), 제일은행(1929년), 한일은행(1932년), 서울은행(1959년)의 앞글자만 따서 줄인 말로, 이들 5개 은행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시중은행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한국 금융계를 풍미했던 조상제한서는 1997년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로 해체수순을 밟았다. 외환위기로 인해 한보나 기아, 진로, 해태 등의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부실대출의 규모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결국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IMF는 외화 조달을 구실로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 비율이 8% 미만인 14개의 부실은행의 정리를 요구했다.

결국 당시 16개나 존재했던 시중은행 중 10곳이 ‘독자회생 불가’ 판정을 받아야 했고, 조상제한서 모두 포함됐다. 조상제한서 시대의 종식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그때 왜 우리 은행이 퇴출 대상이 돼야 하느냐며 울부짖는 직원들도 많았다. 인력 감축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정상판정을 받았던 6개 은행은 신한은행과 한미은행, 하나은행, 보람은행, 국민은행, 주택은행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날의 4대 시중은행 중 3곳이 이때 살아남았다. 하나은행은 보람은행과 1999년 합병했고, 국민은행은 2001년 주택은행과 합병해 규모를 키웠다. 한미은행은 2004년에 씨티은행에 합병됐다.

조상제한서는 이제 은행의 역사를 말할 때나 회자되는 줄임말이지만, 여전히 금융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4대 시중은행 중 하나인 우리은행은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1999년 대등 합병을 통해 한빛은행으로 새로 태어났다가 2002년 사명을 개명했다. 조상제한서 중 ‘상’과 ‘한’은 이름만 바꿨을 뿐 살아 있는 셈이다.
조흥과 제일, 서울은행은 피인수됐지만, 오히려 인수합병 본체의 존속법인으로 남기도 했다. 이 역시 조상제한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흥은행은 2006년 신한은행에 인수합병됐지만, 신한은행은 가장 오랜 역사를 보유한 조흥은행의 역사를 계승하고자 간판은 신한은행으로 유지했지만, 등기부 등본상의 존속법인은 조흥은행을 선택했다. 충청은행과 보람은행, 서울은행을 합병한 하나은행도 외환은행과의 합병 전까지 존속법인은 서울은행이었다.

제일은행도 2005년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인수되어 SC제일은행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존속법인은 제일은행으로 유지됐다. 2011년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으로 사명 변경이 의결되면서 ‘제일’이란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으나 2016년 다시 SC제일은행으로 바꾸면서 조상제한서 중에 유일하게 이름이 살아남게 되었다.

조상제한서의 순서는 은행장 회의 자리에서도 아직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가장 역사가 오래된 조흥은행을 인수합병한 신한은행의 행장은 은행장 회의 때 시중은행장 중 가장 상석인 세 번째 자리에 앉는다. 1, 2번째는 산업은행장과 NH농협은행장의 자리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중은행은 어디?

우리나라 최초 시중은행의 타이틀을 두고 보이지 않는 경쟁을 펼치는 은행은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이다. 신한은행은 1897년 민족자본 은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생겨난 한성은행(1943년 조흥은행으로 개칭)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흥은행을 인수합병하면서 그 역사를 물려받았다. 조흥은행이 대한민국 ‘넘버원’ 은행의 영향력을 갖고 있던 1995년엔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最古) 은행 및 최고(最古) 법인기업으로 기네스북 인정서를 받기도 했다. 조흥은행은 코스피시장의 제1호 상장기업이기도 하다.
우리은행은 대등 합병의 주체 중 하나인 상업은행이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란 이름으로 세워진 것을 기원으로 한다.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황실자금과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2대 은행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역사를 잇기 위해 우리은행 수뇌부들은 매년 새해 첫날 고종황제의 묘소인 남양주 홍유릉을 참배하기도 한다.
이러한 합병의 역사 때문에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대한민국 최초 은행의 타이틀을 두고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두 은행 간의 우리나라 최초 은행의 타이틀을 두고 신경전이 꽤 있는 편이다. 다만 우리은행은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대등합병이었기에 상업은행의 역사를 내세우는 데 거리낌이 없는 반면, 신한은행은 조흥은행의 법인을 존속해 역사를 계승하긴 했지만 신한은행 자체의 시작은 1982년이라 조흥은행의 역사를 내세우는 데 주저하는 측면이 있다”고 귀띔했다.
◆4대 시중은행의 시작은?

조상제한서 시대를 지나 현재 4대 시중은행이라 불리는 은행들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조흥은행과 통합하기 전 신한은행은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재일교포 1200여명이 출자해 1982년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한다. 중심인물은 이희건 전 명예회장. 이희건 전 회장은 한국과 일본을 오간 재일교포 금융인의 ‘대부’라 불리는 인물로, 재일동포들의 ‘재팬 드림’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 전 명예회장을 비롯한 재일교포들은 오늘날에도 신한금융그룹의 주식 약 15%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업계 후발주자로 시작했지만, 신한은행은 1985년 동화증권 인수를 시작으로 사세 확장을 거듭했다. 외환위기 때도 양호한 재정상태를 자랑했던 신한은행은 2001년 국내 최초로 출범한 금융그룹인 신한금융지주의 자회사가 됐다.

KB국민은행의 모태가 되는 국민은행은 1963년 정부의 서민금융 전담 국책은행으로 설립됐고, 1995년 민영화됐다. 이후 1999년 장기신용은행을 흡수합병을 했다. 최근 3연임을 확정한 허인 KB국민은행장이 바로 장기신용은행 출신이다. 국민은행은 2001년 한국주택은행과 일대일 통합을 통해 KB국민은행을 출범시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KB국민은행은 주택은행과의 통합으로 태어난 덕분에 부동산 시세와 통계 부분에서는 시중은행 중 가장 뛰어나다”고 말했다.

하나은행은 1971년 한국개발금융이 세운 ‘한국투자금융’이라는 단기금융회사가 모태다. 단기금융회사란 1971년부터 1994년까지 존속한 금융회사 형태로 기업에 단기 여신을 제공하는 목적을 지닌 회사다. 설립 후 성장을 거듭한 한국투자금융이 하나은행으로 바뀐 건 1991년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노태우정부가 당시 존재하던 수많은 단기금융회사들을 대대적으로 은행과 증권사로 변경시켜줬다. 하나은행도 그 덕에 은행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IMF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충청은행(1998년)과 보람은행(1999년)을 합병하며 덩치를 키웠고, 2002년 서울은행까지 인수합병하며 초대형 은행으로 거듭났다.

◆은행 인수합병의 마지막 숙제는 ‘화학적 결합’

두 은행이 수뇌부들의 결정으로 인수합병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합쳐지는 게 아니다. 인수합병이 ‘물리적 결합’이라면 어제까지 경쟁하던 사이에서 오늘부터 한 지붕 아래에서 일해야 하는 직원 간의 화합은 ‘화학적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인수합병의 마지막 숙제는 바로 화학적 결합이다. 화학적 결합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출신 은행 간의 파벌싸움이 불거지기도 한다.

4대 시중은행 중 가장 최근 인수합병을 경험한 곳은 하나은행이다. 하나은행은 2010년 11월 외환은행과 인수 MOU(양해각서)를 체결했고, 외환은행은 2012년 1월 하나금융지주에 인수됐다. 인수 직후에도 하나금융지주는 외환은행을 기존대로 운용했다. 인수 당시 노사합의서를 통해 5년간은 외환은행의 독립경영을 보장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금융지주는 인수한 지 2년이 좀 넘어서자 두 은행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통합을 시도했다. 결국 2015년 9월1일자로 공식 합병이 되어 외환은행의 영어약자인 KEB를 붙여 KEB하나은행으로 재탄생했다.

두 은행은 합병 후에도 화학적 결합 완성에는 약 4년이 걸렸다. 두 은행의 인사나 급여, 복지체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합병 후에도 출신에 따라 승진체계나 급여는 이전 은행의 체계를 따랐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외환은행의 급여가 업계 최고 대우였던 반면 하나은행은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두 은행의 급여체계가 합쳐지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나은행의 인사 및 급여, 복지제도 통합은 지난해 1월에 완성됐다.

4대 시중은행 중 나머지 3개 은행은 인수합병이 최소 15년은 지났기 때문에 화학적 결합은 이미 완성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은행의 한 관계자는 “2002년 우리은행 공채 1기를 뽑았기 때문에 대다수 직원은 우리은행 공채 출신이다. 그래서 상업은행 출신, 한일은행 출신을 따지는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본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은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대등 합병으로 탄생한 은행이라 그간 은행장은 두 은행 출신 인사가 번갈아 하는 것이 암묵적 룰로 통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위급 간부 인사도 이제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2019년 우리금융지주 출범 후 은행장을 겸하고 있던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의 후임이 권광석 행장으로 정해진 것도 그 사례다. 손 회장이 한일은행 출신인 반면 권 행장은 상업은행 출신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우리은행이 출신 은행으로 인사한다는 게 이제는 거의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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