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반말' 손님엔 치킨 '반마리'만.. 만화로 소심한 복수 해드려요

김미리 기자 2020. 11.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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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만 팔로어 일러스트 작가 '키크니'
43만명이 팔로하는 화제 인스타툰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를 그린 키크니 작가. 키가 커서 생긴 닉네임처럼 188cm 거구였다. 그는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며 얼굴 공개는 한사코 사양했다. 대신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에 직접 자기 얼굴 캐릭터를 합성해줬다. /영상미디어 양수열 기자, 일러스트=키크니

그는 펜을 든 DJ. 신청곡 틀어주는 라디오 DJ처럼, 댓글로 신청한 사연을 공짜로 그려준다. 특기는 언어유희. “독박 육아 중인 아내에게 함께 걷는 그림을 선물하고 싶어요”라는 주문엔 산책하는 부부가 아니라 나란히 빨래 ‘걷는’ 부부가 등장한다. “치킨집 하는데 다짜고짜 반말하는 진상 손님을 대하는 제 모습을 그려주세요”란 요청엔 손님에게 치킨 ‘반마리’만 내놓으며 ‘댁도 반말이니까’라고 혼잣말하는 모습을 담았다. ‘반말’과 ‘반마리’ 발음이 비슷한 걸 이용해 상상 속 복수를 도왔다.

'키크니' 인스타툰 '무엇이든 드려드립니닷' 캡처
'키크니' 인스타툰 '무엇이든 드려드립니닷' 캡처

재치 있는 그림으로 퍽퍽한 일상에 감칠맛 돋우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에 처방전 내민다. 주문형 인스타툰(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만화)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키크니(keykney)’.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와 맞먹는 팔로어 43만명을 몰고 다니는 스타 작가다. 요즘 최고 주가 올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댓글 덕에 번 아웃 극복, 댓글로 은혜 갚아

서울 지하철 6호선 망원역 근처 5층 상가.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을 계단으로 올라가니 김밥 단면 같은 얼굴 캐릭터가 붙은 문이 나왔다. 키크니가 자화상으로 만든 캐릭터다. 안으로 들어서자 캐릭터의 현실 버전이 인사를 했다. 그림처럼 후드 티를 입은 188㎝ 거구. 작가는 ‘모아이(이스터섬 석상)’로 자신을 묘사했지만 그보다는 훨씬 날렵했다. 대형 모니터와 작업 도구가 깔끔하게 정돈된 작업실엔 찬 바람이 숭숭 새들어왔다. 손님을 위해 그가 온열 방석 스위치를 슬쩍 켰다.

그는 코너 연재 2년여 만에 첫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1박 2일 선운사에서 템플스테이도 하고, 도수 치료로 망가진 몸도 복구했다. “밤낮이 바뀌어 너무 힘들었어요. 30대에 견주가 됐네요, 오십견주!”

—‘키크니’란 필명이 특이해요. 유명 작가 ‘호크니’를 패러디한 건가 싶기도 하고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가 좀 쉬면서 선배하고 둘이서 팀으로 순수 작업을 해볼까 했어요. 이름부터 지었는데 선배 여자 친구가 저는 키가 크니 ‘키크니’, 선배는 코가 크니 ‘코크니’가 어떻겠느냐더군요. ‘키크니 코크니’란 팀명이 만들어졌는데 형이 결혼하고 멀리 이사 가는 바람에 계획이 무산됐어요. 코크니는 가고 키크니만 남은 거지요.”

그는 “계속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는 이유로 실명 공개는 꺼렸다. 30대라는 것만 밝히고 싶다고 했다. 그사이 방송 출연 요청도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키크니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절친한 몇 명밖에 안 된다. 군대 동기가 ‘너도 이런 그림 그려보라’면서 그의 그림을 보여준 적도 있었지만 모른 체했단다.

—캐릭터 가슴팍에 ‘일러스트레이터미네이터(일러스트레이터와 터미네이터를 합친 것)’라고 써넣었던데요.

“비정규직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는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마감 압박, 단가 협상, 스케줄 관리 모든 걸 혼자 책임져야 해요. 터미네이터처럼 단단해져야 한다는 다짐이자 저를 향한 응원을 담은 말이에요.”

자화상으로 만든 키크니 캐릭터

일러스트 업계에선 2008년쯤부터 동화책, 문제집, 자습서, 광고 이미지 작업 등을 꾸준히 해오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온라인에는 왜 그림을 그리게 된 건가요?

“3~4년 전쯤 갑자기 심장이 너무 빨리 뛰면서 숨쉬기가 어려웠어요. 처음 겪는 공포였어요. 프리랜서라 수입이 불안정하니 10년 넘게 닥치는 대로 일을 했는데 그게 곪아 터져 번 아웃이 온 거였어요. 이렇게 가다간 죽겠구나 싶더군요. 6개월 동안 일손을 딱 놓았어요. 쉬면서 ‘일로 하는 그림’이 아니라 ‘진짜 그리고 싶은 내 그림’을 취미 삼아 그려보고 싶었어요.” SNS와 담쌓고 지내던 그가 2017년 처음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사연 받아 그리는 형식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처음엔 일러스트레이터의 애환을 그렸어요. 그전엔 피드백이라고 해야 출판사 편집자 몇몇 반응 정도였어요. 대중 반응을 모르니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죠. 제자리걸음만 걷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온라인에선 실시간으로 사람들이 댓글 달며 응원해 주는 거예요. 어찌나 고맙고 신기하던지요. 그 덕에 심리적 안정을 찾게 됐어요. 제 건강을 찾아준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하다가 떠올린 아이디어가 댓글로 사연을 받아 그려주는 거였어요.”

2018년 7월부터 한 주에 두세 번 그림을 올렸다. 지금까지 쌓인 그림이 400여 개. “연재하다가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자”는 맘으로 시작한 일이 커져 버렸다. 팔로어 수가 급격히 늘고 광고 요청이 쇄도했다. 삼성, LG, SK 같은 대기업부터 서울시·질병관리본부 등 공공기관까지 러브콜 보내는 스타 작가가 됐다.

—인기 얻고 삶이 많이 달라졌나요?

“똑같이 의뢰받아 그림 그리는데 예전보다 3배 더 받게 됐어요. 브랜드가 생겨서래요. 뭣보다 제일 큰 차이는 대우를 해준다는 것. 한편으로 허탈해요. 10년 넘게 혹사하면서 밤낮없이 일할 땐 제 작업에 이름 한 줄 넣어주는 데가 없었어요. 업체에서도 하청 노동자 대하듯 했고요. 미팅 가면 한 시간 대기는 기본이었죠. 지금은 ‘작가님, 작가님’ 하고 부르고 미팅 전 미리 다 세팅해 놔요. 작업에도 ‘키크니’라는 이름 석 자가 꼭 박혀 나가고요. 저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바뀐 느낌이랄까. 팔로어 수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싶기도 하고요.” 그는 “한 음료 회사에서 높은 분이 제 팔로어라며 작업 요청을 한 적이 있다”며 “예전에는 몇 다리 건너 소개받아도 일을 따낼까 말까였는데, 이젠 바로 DM(다이렉트 메시지) 보내 일을 의뢰한다. 창작 환경이 바뀌었음을 피부로 느낀다”고 했다.

지금까지 쌓인 댓글 사연은 수십만 개. “악플에 힘들어도 웃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그려주세요”라고 메시지 보낸 연예인도 있었다. “그려보고 싶었는데 도저히 안 나와 포기했어요. 나중에 TV에서 그분이 웃고 나오는 장면을 봤는데 뭔가 먹먹하고 안타까웠어요.” 사연 신청한 국회의원도 있었지만 내키지 않아 그리지 않았다.

—재능기부인 셈인데, 무보수로 일주일에 3개씩 그리려면 지칠 법도 한데요.

“신기하게 제 그림엔 악플이 별로 없어요. 사람들이 채택된 사연의 주인공에게 댓글을 보태면서 응원도 해요. ‘키작으니’란 닉네임으로 저보다 더 열심히 제 홍보를 해주는 팬도 있어요. 각박한 것 같지만 남의 일도 내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그런 모습을 보며 저도 남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그림 대회를 열어 10명에게 자비로 15만원 상당 한우를 보내주기도 하고, 난생처음 기부도 했다.

언어유희를 활용해 강강술래를 '강강술내'로 그렸다./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못된 사장을 '못'이 된 사장으로 그렸다. /키크니 인스타툰 '무엇이든 드려드립니닷' 캡처

◇공사판 막노동, 乙 경험이 공감력 키워

—술 냄새 풍기는 진상 남편을 그려달라는 주문엔 아이들이 아빠를 맴돌고 있는 그림에 ‘강강술내’란 멘트 달고, 못된 사장님 혼내 달라는 사연엔 사장님을 못[釘]으로 만들어 버려요. 센스 있는 글은 어디서 나오나요.

“어렸을 때부터 말장난으로 친구들을 웃기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은 책도 많이 읽으려 하고 의성어 자료도 수시로 찾아봐요. 아이디어가 될 만한 게 있으면 스마트폰에 수시로 메모하고요. 색을 안 쓰는 식으로 그리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대신 글에 좀 더 신경 써요.”

주요 코드는 웃음이지만, 웃다가도 눈물샘 슬쩍 건드린다. “주인이 목줄을 고정해서 인적 드문 산에 버리고 도망갈 때 강아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려달라”는 주문엔 “천천히 가”라고 말하는 강아지가 등장하고, 하늘에 있는 부모가 자식 보듬는 그림도 자주 등장한다.

키크니 그림의 주요 소재인 가족. 때로 눈물샘 자극한다. /키크니 인스타툰 '무엇이든 드려드립니닷' 캡처

—특히 가족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은 이유가 있나요.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어 직장 그림은 간접 경험으로 그리는데, 가족은 제일 자신 있게 그릴 수 있는 소재예요. 매일 경험하는 관계인 데다 우리 집이 평범하지 않다 보니 이상적 가족상도 뚜렷하거든요.”

—평범하지 않은 가족이라니요?

“부모님이 우유 대리점을 하시다가 IMF 외환 위기 때 빚더미에 앉게 됐어요. 아버지는 신용 불량자에 알코올중독자가 됐고, 어머니는 충격 탓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지금도 한쪽 팔다리가 불편하세요.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도 잃으셨고요. 저희는 이제 호전되는 건 어렵다고 포기했는데, 어머니는 자꾸 나아서 우리 아들 밥 챙겨줘야 한다고 하세요. 장애등급 올라갔을 땐 혜택 많아질 거라며 웃으셨죠. 늘 밝으신데 제가 아파 보니 알겠더라고요. 안 아픈 게 아니라 내색 안 하신 거란 걸.” 명절이면 삼부자는 어머니의 음성 지시에 따라 음식을 차린다. 그는 “화목하고 싶다는 희망, 화목하다는 자기 최면이 무의식중에 반영돼 더 밝은 그림이 나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그가 유명 작가가 된 걸 모른다. “가족들한테 얘기 안 했는데 얼마 전 형이 우연히 제 그림을 보고 우리 집 얘기가 나오니 눈치챘어요. 제가 부모님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요. 동네방네 자랑하실까 싶어서(웃음). 두 분은 제가 생활비도 드리고 부양하는데 비정규직이다 보니 늘 어디 가서 밥은 먹고 다니는지 걱정하세요.” 아버지는 택시 일을 하신다.

—인스타툰을 하며 얻은 교훈이 뭔가요.

“어제 준비한 게 오늘 갑자기 튀어나올 순 없다, 아주 먼 과거부터 뿌린 씨앗이 때를 만나 싹을 틔우게 된다는 것. 사실 어렸을 때부터 사람 이야기 듣고 그리는 걸 즐겼어요. 음악, 영화, 드라마 잡다하게 좋아했고요. 다만 그런 걸 드러낼 장소가 없었어요. 내 의견을 드러내도 될까라는 두려움도 컸고요. ‘키크니’라는 익명과 플랫폼을 만나면서 쌓아온 것들이 나온 거죠. 또 하나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 을(乙)로 홀대당한 경험, 집이 망해 고생한 경험, 학비 벌려고 11m 철골 구조물 위에서 막노동했던 경험…. 모든 게 타인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공감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어요.”

—어떤 그림을 지향하나요.

“출근길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킬링타임용으로 가볍게 볼 수 있는 만화, 짧은데 ‘씩’ 웃음 새나오고 가슴에 남는 게 깃털만큼이라도 있는 그림요. 그래서 일부러 직장인들 출근 시간 맞춰 오전 7시 30분에 업로드해요. 인스타그램엔 게시 예약 기능이 없어 제 생활 패턴도 회사원들에게 맞췄어요. 밤샘 작업도 많이 했는데 요즘은 오전 6시에 기상한답니다.”

—목표가 뭔가요?

“목표가 있으면 강박이 생기는 타입이라 목표는 안 세웁니다. 그냥 꾸준히 하자, 그러다가 재미있는 게 나타나면 열심히 하자는 주의예요. 지금 저는 거품이 많이 껴 있어요. 제가 봐도 이 정도는 아닌데 너무 주목받고 있죠. 거품이 반쯤 빠져 부담이 덜해지면 다른 스타일 그림을 시도하고 싶어요.” 그는 꾸준히 그려 댓글로 자신을 치유해준 43만 익명의 은인에게 “은혜를 원수'처럼' 집요하게 갚겠다”며 웃었다.

서울 망원동 작업실에서 만난 키크니 작가. 뒤로 보이는 큰 모니터를 거쳐 43만명을 울고 웃기는 그림이 탄생한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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