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존의 窓] "한국 노래 뭐 알아요?" "머리 어깨 무릎 발.."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한 미 대사관 공사참사관 2020. 11. 10. 03:0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학 능력 시험 잘 본 덕에 한국과 인연.. 한국어 교육 받는 동안 곤욕
"아는 한국 노래 있냐" 질문 받고 '머리 어깨 무릎 발' 대자 좌중 폭소
한국어 학습은 길고 힘든 여정.. 낙천주의 품성으로 계속 노력할 것

언어를 배우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래서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외국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감탄하며 보게 된다. 고등학교 때부터 라틴어⋅포르투갈어⋅한국어⋅스와힐리어⋅베트남어⋅태국어를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아주 다양한 국가 언어를 섭렵했지만 잘하게 된 말은 하나도 없었다. 미국 국무부에 들어갔을 때 어학에 자질이 있는지 평가하는 어학 적성 시험을 봐야 했다. 당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다 이유가 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에 결코 능통하지 않지만 표준화된 시험을 보는 데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국무부에는 알리지 않았다. 어찌 됐건 시험 점수로 인정받은 언어 습득 능력 덕분에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국무부 어학원에서 5개월간 한국어 교육을 받은 다음 주한 미국 대사관에 배속됐다.

/일러스트=박상훈

한국어 과정은 수강생 5명이 하루 6시간씩 수업을 받는 강행군이었다. 수강생이 몇 명 없어 순간순간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국인 선생과 뭔가를 공부한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가진 남다른 열정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하루에 선생 3명이 돌아가면서 수업했는데 대학 시절 포르투갈어 수업을 맡았던 느긋한 브라질 교수들에 비하면 아주 깐깐했다.

한국어 수업에서 나는 물론, 동료들은 곧잘 단점을 지적받았다. 누구도 솔직하고, 가끔은 주눅이 들 정도로 강한 한국어 교사들 지적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틀 만에 간단하고 논리적인 한글 표기법을 마스터해서 한국어가 배우기 쉬운 언어라고 생각해서인지(이 점에서는 세종대왕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 이후로 배우는 속도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더디고 힘들었다. 자음과 모음은 빠른 시간에 쉽게 배웠지만, 이후로는 진도가 상당히 더뎠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을 배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이 속담을 배운 뒤에도 ‘반’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어학원 복도를 다니면서 다른 언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수업이 2주 차에 접어들 무렵,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동료가 암스테르담 신문을 별 어려움 없이 읽는 것을 쳐다보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그때 ‘머리 어깨 무릎 발’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해 선생님한테 호되게 혼나고 나오는 길이었다. “에릭, 이건 네 살짜리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네 살보다 못합니까?” 그 노래와 인연은 처음 한국에 도착한 직후 다시 이어졌다. 영사관 사람들과 저녁 식사 후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서 아는 한국 노래가 있냐는 질문에 자신 있게 ‘머리 어깨 무릎 발’을 대자 박장대소가 터졌다. 그 이후 이 노래가 정말 싫어졌다.

한국어를 배운 다음 일어난 망신은 또 있었다. 부산 시장을 만났을 때였다.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산 시장과 미팅을 가졌다. 당시 영사관 임시 대표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상사가 미국에서 휴가 중이었다) 시장을 만나 최근에 설립된 영사관 업무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당시 내가 스물네 살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임무를 잘해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몇 주 뒤였다. 부산시가 주최하는 다른 행사에 참석하게 되어 시장과 인사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 행사 전, 시장을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고 한국어 교재에서 ‘친구를 다시 만날 때’에 대한 장을 공부하고 갔다. 책에 나오는 문장을 외워서 줄을 서 있는 동안 연습했다. 마침내 차례에 이르렀을 때 보좌관은 나를 미 영사관의 대표로 시장에게 소개했고, 나는 (머리 숙여 인사하는 건 빼먹고) 손을 내밀며 자신 있게 “오래간마니군요!”를 외치며 손을 잡고 아주 크게 흔들었다. 주변에서 웃음보가 터지고 당황한 영사관 직원들이 서둘러 나를 데려갔다. 그때는 왜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친하지도 않은 높은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목소리 높여 인사하는 건 우스꽝스러운 짓이란 얘길 듣고나서야 한국어를 배우는 길이 길고도 힘든 여정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어와 싸움은 지금까지 계속된다. 2014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 처음으로 미국인이 한 명도 없는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고 통상적인 대사관 근무 기간인 3년보다 더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이므로, 이제는 한국어에 능숙해지기를 내심 바랐다. 기대는 빗나갔다. 이곳 직원들은 모두 영어를 유창하게 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쓸 일이 거의 없다. 한국에 살면서 한국어가 퇴보한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천성이 낙천주의자이기 때문에 계속 노력할 것이다. 향후에 이 글을 읽은 사람 중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연습 삼아 한국어를 열심히 해 볼 생각이다. 다만 제발 ‘머리 어깨 무릎 발’만은 불러달라고 하지 않기를 바란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