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의 역사가 차린 '한국인의 밥상' 100년 [책과 삶]

배문규 기자 2020. 11. 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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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백년식사
주영하 지음
휴머니스트 | 352쪽 | 2만원

‘치킨’은 한식일까. AP통신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선수들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친근함을 느낄 만한 한국 음식으로 스팸이 들어간 부대찌개 그리고 ‘한국식’ 치킨을 꼽았다. 사실 외국인이 한국을 여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반드시 등장하는 음식이 바삭한 프라이드치킨과 새빨간 양념치킨이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중국에선 ‘치맥’ 열풍도 불지 않았던가.

한국 음식은 다양한 문화를 만나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국화’의 길을 걸어왔다. 이러한 한국 음식의 사회문화적 혼종성이야말로 오늘날 ‘K푸드’ 유행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치킨의 역사에선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치킨은 분단으로부터 시작된 음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1945년 한반도 허리에 38선이 그어지면서 남한은 식용유 원료인 대두를 만주에서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1956년 미국은 한국에 제공하는 잉여농산물에 식용유를 포함했고, 1964년부터는 미국산 대두를 직접 구매하라고 요구했다. 이 시기 분식 장려와 맞물려 인스턴트 라면이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콩기름 생산은 날로 늘어갔다.

한국 음식은 급격한 시대 변화 속에서 다양한 세계 문화와 만나 뒤섞이며 변화해왔다. 양반 남성에게 위스키를 먹여주는 기생의 모습, 아지노모토를 식탁 위에 놓아두고 입맛대로 육수에 넣어 먹도록 한 평양의 냉면집, 통닭을 기름에 튀긴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왼쪽 사진부터). 휴머니스트 제공
미국 식용유 수입으로 대중화된 치킨, 냉면집 맛의 비밀 ‘아지노모토’…
개항·식민지·전쟁·냉전·성장·세계화 시대 따른 역동적 음식 변화 조명
앞으로 100년의 밥상은?…“생태학적 식탁서 함께하는 즐거움 누려야”

식용유 생산 증가는 닭튀김 유행으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조선 양계업은 산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세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소고기 위주 육식 소비로 소고기값이 폭등하자 정부에선 닭고기 생산에 주목했다. 당시 북아메리카의 브로일러라는 육계를 주로 키웠는데, 마침 식용유 생산이 늘어나 식용유 가격도 낮아졌다. 닭을 통째로 기름에 튀긴 통닭을 판매하는 가게가 생겨났다. 통닭 튀김은 국내 주둔 미군들이 즐겨 먹던 프라이드치킨을 모방한 음식이었는데, 한국 사람 입맛을 금세 사로잡았다. “냉전의 경계선에 있던 한국 사회는 미국산 식용유 수입과 함께 미국식 통닭을 한국 음식으로 진화시켜나갔다.”

한국 음식은 급격한 시대 변화 속에서 다양한 세계 문화와 만나고 뒤섞이며 변화를 거듭해왔다. “음식의 역사를 알면 그 사회와 문화가 보인다”는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한국인의 입맛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한국의 ‘백년 식사’를 추적한다. 책의 들어가는 질문은 이렇다. ‘채끝 짜파구리’ 먹기는 어떻게 뉴요커들 사이에서 유행했는가. 알다시피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며 화제를 모은 덕분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미 한국이 세계 식품체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은 1876년부터 대한제국 시기의 ‘개항’, 1910년부터 1937년까지 ‘식민지’, 1938년부터 1953년까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아우르는 ‘전쟁’, 전쟁 이후 1970년까지의 ‘냉전’, 경제성장 결과를 맛보기 시작한 1980~1990년대의 ‘압축성장’, 그리고 1990년대부터 현재도 진행되는 ‘세계화’까지 음식과 식품산업 관점에서 여섯 시기로 들여다본다. ‘전통’ 혹은 ‘한식’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아닌 사회현실과 맞물린 역동적 변화로 보는 저자의 시각은 한국 음식문화를 거리 두기하며 성찰토록 한다.

오늘날 한국인이 먹는 음식 대부분은 지난 100여년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면 지나칠까. 미국인 해군 무관이 베르미첼리(면이 가는 파스타)로 표현한 메밀국수 ‘골동면’ 등 개화기 조선 음식부터 황제 고종이 여성과 공식적으로 처음 식사를 한 오찬 메뉴, 대한제국 황실 찬사로 임명된 손탁과 크뢰벨 부인 이야기까지 한국인의 식탁이 세계와 처음 만난 순간들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한반도 음식문화가 서양화의 길로 들어서려던 찰나,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조선인 입맛 역시 제국의 맛에 길들여진다.

“두부 사시오~!” 두부 장수가 종을 흔드는 풍경도 일제강점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눈발 같은 얼음이 흩날리는” 빙수와 “맑은 국물에 굵은 가락국수를 내는” 우동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현대 한국인의 입맛을 만든 것이 있으니, 인공조미료의 대명사 ‘아지노모토’다. 1915년 조선에 소개된 아지노모토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다 1929년 ‘조선박람회’를 계기로 인기를 끈다. 당시 광고는 전한다. “맛있게 하는 음식점은 아지노모도를 잘 이용하는 곳입니다. 냉면·장국밥·떡국·대구탕·설렁탕에 아지노모도를 잊지 마시고 치십시오.” 특히 냉면집에선 한여름 동치미를 마련하기 어려워 육수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아지노모토를 쓰면 훨씬 경제적이었다. ‘왜간장’ ‘진간장’이라 불리는 일본식 장유도 부유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으며, 해방 이후 일본식 장유회사가 적산으로 넘어오면서 한국인 부엌에 진하게 스며들게 된다. 하지만 영국의 커리가 그러하듯, 식민지의 맛이 제국의 맛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숯불 고기구이 ‘야키니쿠’와 함경도의 명란젓 ‘가라시멘타이코’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그 이후의 냉전 역시 한국 음식문화를 크게 바꿔놓았다. 식량이 부족했던 시대에 번데기와 같은 대용식과 유엔과 미국에서 구호·원조품으로 보낸 밀가루로 만든 각종 분식이 널리 퍼진다. 이 시기 가난은 술문화도 바꿨다. 박정희 정부에서 막걸리 제조에 멥쌀 사용을 금지하고 밀가루로만 담그도록 했는데, 밀막걸리는 제조 시간이 짧아 업자들도 반겼다. 무엇보다 발효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톡 쏘는 맛을 냈다. 1975년 통일벼로 쌀 수확량이 늘면서 쌀막걸리 제조가 허용됐지만, 소비자들은 탄산 맛을 잊지 못해 사이다를 섞어 마셨다고 한다. 고려말 원나라에서 들어온 소주 역시 멥쌀로 만드는 술이었다. 해방 이후 북한과 외교 경쟁을 벌이던 정부에선 우방국 확대를 위해 동남아 국가들과 당밀 수입 무역협정을 체결했으며, 1975년 당밀 국제 시세가 계속 오르자 국내 주정업계는 가격이 싼 타피오카를 대체 수입했다. 그때부터 싼값의 희석식 소주가 막걸리를 물리치고 국민주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 소주와 단짝인 삼겹살의 유행은 압축성장기의 산물이다. 비린내 때문에 선호되지 않던 돼지고기는 1970년대 대기업의 양돈업 진출로 품질이 좋아지면서 사랑을 받았다. 값이 소고기보다 저렴했던 이유가 컸지만, 1980년 출시된 일본의 휴대용 가스버너와 일회용 부탄가스도 큰 역할을 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야외 나들이가 잦아졌고, 1990년대 이후 삼겹살구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고기 요리가 됐다.

1935년 미국 뉴욕 콜드워터의 조셉 해리스 앤드 코에서 개발한 ‘핫 포르투갈’. 1966년 농촌진흥청에서 핫 포르투갈을 도입해 신품종 고추를 보급했다.

세계화 시대 한국인의 식탁은 선택의 다양성과 입맛의 획일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청량음료,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없이 끼니를 때울 수 없고, 열대과일과 수입채소 없이는 식단을 구성하기 어렵다. 연어는 ‘국민 횟감’이 됐고, 마라탕 열풍이 한바탕 불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 음식이 최고”라며 폐쇄적인 ‘음식민족주의’를 외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매운맛’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국산’ 아니던가. 16세기 말 한반도에 들어온 고추는 20세기 중반까지 토착화 과정을 걸었다. 지속적인 신품종 개발 덕에 소비는 늘어났다. 하지만 해방 직후만 해도 지식인들은 “고추나 마늘처럼 자극적인 맛의 양념이 들어간 음식을 ‘원시적 식생활’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계몽적인 비판에도 1960년대부터 고추와 마늘·파가 들어간 음식이 많이 소비됐고, 설탕 가격이 내려가면서 낙지볶음과 떡볶이 같은 달고 매운 음식들도 유행하게 됐다. 여기에 1980년대 시판된 청양고추는 매운맛을 한층 더했다. 하지만 청양고추를 개발한 중앙종묘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했다. 현재 청양고추의 재산권은 미국 종자회사 몬산토가 가지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의 음식과 식생활에는 세계화 시대 ‘식량 주권 문제’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코로나19로 거대 농축수산업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앞으로 100년의 밥상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저자는 “ ‘생태학적 식탁’에서 여러 사람이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한 제언을 한 가지 전한다. 코로나19 ‘비말 감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1인용 상차림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은 ‘혼밥’을 했으며, 반찬 공용은 식량난과 인구 과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사실 공용 식기·반찬은 위생과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꾸준히 지적됐음에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문제다. 팬데믹 시대 “더욱 자주 ‘함께 식사’ ”를 즐기기 위해 귀담아들을 만한 얘기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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