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덫에 걸린 한 남자.. 唱으로 그 슬픔 쏟아붓다

이태훈 기자 2020. 11. 6.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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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방연' 한명회 간계로 단종 유배 맡지만 임금도 딸도 못지킨 武人 '왕방연'
끔찍이 아비를 걱정했던 딸 ‘소사(박지현)’는 험한 일을 겪은 뒤 반실성해 어린 아이처럼 돼 버린다. 아비 ‘방연(최호성)’은 그 딸을 등에 업고, 통곡하며 걷고 또 걷는다. /국립창극단

밤 깊은 북한산 자락, ‘수양대군’(김준수)은 제 조카처럼 어리고 고운 사슴의 목에 칼을 깊이 꽂아 넣으며 말한다. “김종서를 비롯한 불충한 자들을 베고 어지러운 종사를 바로 세우려 하는데,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칼 차고 도열한 남자들이 한 몸 같은 외침으로 답한다. “충(忠)!” 이제 수양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이 될 것이다. 역사에 그렇게 쓰여 있다.

하지만 역사 바깥에 기록되지 않은 민초들의 삶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소용돌이에 휘말리다 찢기고 부서져,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지 않았던 보통 사람들이 그 안에도 살았을 것이다. 서울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 중인 창극 ‘아비, 방연’(작 한아름, 연출 서재형)은 피 흘리며 꿈틀대고 얽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실록엔 이름 석 자만 남은 인물 ‘왕방연’(최호성)을 끌고 들어온다. 영월로 귀양 가는 단종을 호송했으며, 유배 중이던 단종을 찾아가 사약을 전한 의금부도사. 임금에 대한 충의도, 어린 딸을 향한 아비의 정(情)도 누구보다 깊었지만, 결국 임금도 딸도 못 지킨 한 남자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새로 써 내려간다.

한명회의 간계에 걸려든 '방연'이 충신의 아이들을 죽이라 명령을 내리자, 군졸들은 아이들의 목에 걸린 줄처럼 객석 복도로 이어진 밧줄을 팽팽히 끌어당긴다. 아이들이 차례로 쓰러지고, '네 아버지처럼 당당히 절개를 지키라' 했던 어머니들도 그 모습을 보며 무너져내린다. /국립창극단

단종의 총애를 받던 무인(武人) 방연. 관직을 떠나려 하지만, 한명회의 간계로 곧 시집보내야 할 어린 딸 ‘소사’(박지현)의 혼례를 지키기 위해 단종 유배 책임을 맡는다. 하지만 혼례날 저녁 딸의 새신랑은 단종 복위 시도에 연루된 게 드러나 끌려간다. 어린 각시 ‘소사’는 신방 문을 뜯고 새 신랑을 끌어내 묶어가는 군졸들을 향해 “날 죽이고 가오” 노래하며 뒤따른다. 끝내 시신이 돼 돌아온 새 신랑의 운구길을 터덜터덜 따르며 ‘아이고, 아이고, 얼마나 아팠을까’ 곡을 한다.

그가 딸을 살려주겠다는 한명회의 꼬임에 걸려 충신의 아이들을 도륙하라 명령하면, 주저하던 의금부 병졸들이 객석 통로로 이어진 밧줄을 아이들 목에 걸린 활줄인양 무대 위로 팽팽히 당긴다. 생떼 같은 어린 아들들에게 ‘네 아버지를 따라 절개를 지키라’ 했던 어미들이 통곡하며 무너져 내린다. 연루된 다른 신하들의 아내와 딸들처럼 자기 딸이 노비로 공신들에게 보내지는 것을 막으려면, 방연은 다시 영월로 가 단종에게 사약을 전해야 한다.

오로지 딸을 구하기 위해 영월까지 사흘 낮 사흘 밤을 “땅이 와르르르 일어나고 강물이 출렁출렁” 하도록 말 달리는 아버지 방연의 모습은 세파에 이리저리 치이며 달리고 또 달리는 지금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끼던 신하 방연이 들고 온 사약을 받아든 어린 ‘단종’(민은경)이 “내 눈물아, 이 피바람을 멈추게 하라” 소리를 하면, 방연은 그저 그 곁에서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통곡할 뿐이다.

극한의 감정을 더 이상 대사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창극은 ‘말을 넘어선 말’을 하기 위해 우리 판소리를 쓴다. ‘아비, 방연’은 어떤 꾸밈도 가식도 없이, 오로지 소리의 힘만으로 역사의 덫에 걸려 내지르는 한 인간의 비명을 관객 가슴 한복판에 해일처럼 쏟아붓는다. 객석은 누구 하나 훌쩍이지 않는 이 찾기 어려운 ‘눈물 바다’가 된다.

도창(導唱)을 맡은 김금미는 희곡 지문으로 해설하듯 사설조로 극의 진행을 풀어낸다.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판소리조를 가미한 가곡에 가깝도록 음악은 부드럽고 또렷하다. 오리지널 판소리보다 대사 전달은 좋지만, 진성 판소리 팬은 호오가 갈릴 수 있다.

판소리 병창에 서양 연극 양식을 접합해 만들어진 이 장르는 줄곧 ‘창극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왔다. ‘아비, 방연’은 그 질문에 우리 국립창극단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성실하고 격조있는 답변 중 하나일 것이다. 창극 진화의 성공적 형식 실험이라 할 만하다. 공연은 8일까지.

깊은 밤 북한산 자락, '수양대군'(김준수)은 제 어린 조카를 닮은 어린 사슴의 목에 칼을 꽂으며 자신을 따르는 칼 찬 남자들에게서 충성 맹세를 받아낸다.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의 무대는 최고 수준의 영상 디자인과 조명 설계를 보여준다. /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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