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각서' 지키려 애쓴 흔적..인사권과 시유지 땅 매각 놓고 갈등 불거져

이상호 선임기자 2020. 10. 1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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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속 내용 얼마나 현실화됐나

[경향신문]

경기 고양시청사 모습. 이재준 현 시장이 최성 전 고양시장 보좌진들의 도움으로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당선되면서 현·전 정무라인 양측 권력 다툼으로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녹취파일의 통화 내용을 종합하면 이재준 시장과 최성 전 고양시장 보좌관 A씨가 극비리에 작성한 이행각서의 존재는 양측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취임 초기 이 시장은 A씨 등의 이런저런 민원이나 요구를 들어주려 애쓴 흔적이 나온다. 하지만 그 수준이 도를 넘었고, 결국 자치단체장의 핵심 권한인 인사권을 두고 충돌이 본격화된다. 최 전 시장 재임 당시 인사, 회계, 감사 등 시청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공무원들은 사실상 A씨 등이 그 자리에 앉힌 인물들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행각서에 표현된 ‘우리 측’ 공무원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이 시장은 그들을 그대로 둔 채 시정을 이끌면 ‘허수아비 시장’이란 내부 비판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에 상당수를 구청 등으로 발령 냈다. 또 내부적으로 과거 최 시장 때 불이익을 받았던 공무원들의 불만도 반영됐다.

거기에다 이행각서에 ‘반드시 매각한다’고 명시된 일산 킨텍스 지원부지(C4) 문제는 양측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A씨는 이때부터 호주에서 이 시장을 향한 공격을 본격적으로 예고한다. 이 부지는 ‘미래용지’로 지정해 지난해부터 향후 30년간 처분을 제한했다.

이 시장은 당시 자신의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A씨 측근인 비서관 2명이 갑자기 사표를 낸 것도 A씨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A씨는 또 직간접적으로 ‘자수’ ‘고발’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이 시장을 압박했다. 이 시장은 이에 겉으로는 초강수로 맞설 것처럼 A씨 측근에게 밝히지만 A씨를 여전히 의식하는 대목도 나온다.

이 시장은 공식적으로 이행각서 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녹취파일에는 이 시장이 “○○○랑 셋이 협의해서 하는 걸로 해놓은 거야. 그게 무슨 법적 효력이 있다고 그걸 갖고 이렇게 맨날 흔들어 대고…” “공개됐으면 좋겠다”라는 등 대화하는 대목이 나온다. 상대 당사자인 A씨 역시 이 시장과 작성한 각서를 ‘페이퍼’ 또는 ‘문서’로 표현하며 인정한다.

현재 공개된 이행각서 사본은 각서인란에 찍힌 지장이 위조된 것이고, 15개 이행각서 내용은 최종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은 각서의 이행 여부에 대해 계속 수사하고 있다.

녹취파일 내 통화 내용과 그간의 고양시청 내 상황을 종합하면 이행각서의 상당 부분은 실제 이행했거나 추진하려 했다.

■ ‘비서실장을 포함 3인을 비서실에 채용한다’ = 최 전 시장 재임 시 비서실에 재직했던 2명의 비서관은 최 전 시장 선거 때 지원을 하기 위해 사표를 냈다가 이 시장 취임 후 비서실로 복귀한다. 전직 시장 비서진이 새로 선출된 시장 비서실로 복귀하는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들은 A씨와 이 시장이 C4 매각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은 직후인 2018년 11월 말쯤 동반 사퇴한다.

녹취파일에 따르면 이 시장이 사표를 극구 말렸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중 한 비서는 이 시장과 함께 방북 허가 신청을 마친 상태였으나 일방적으로 그만뒀다. 이 시장의 참모가 아니었음을 방증해준다. 현 비서실장은 최 전 시장이 국회의원 당시 보좌관이었던 인물과 선후배 사이다.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그의 추천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서실장을 제외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상당 부분 지켜진 것으로 봐야 한다.

■ ‘감사담당관 2인을 추천하며 1인을 채용한다’ = 고양시는 감사담당관을 개방형으로 공개 모집하기 때문에 이 조항은 응시자의 성적을 조작하지 않는 한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내용이다. 설령 사전 내정 행위가 있었더라도 내부자 고발이 없는 한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 ‘○○○는 비서실은 물론 어떠한 자리도 챙겨주지 않는다’ = ○○○는 이 시장이 당선된 2018년 지방선거에서 이 시장의 회계 등의 업무를 맡아 본 핵심 선거 참모였다. 이 시장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행각서에서 지목된 해당 인물은 현재 시청에 근무하면서 이 시장의 대외활동 업무를 총괄 지원하고 있다. 이 조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 ‘승진 인사는 우리 측과 긴밀하게 협의 후 진행한다’ = 경향신문이 입수한 녹취파일에 이 시장이 “무슨 인사를 전부 시시껄렁하게 다 해결하냐. 필요한 사람 있으면 한두 사람 얘기하는 것도 아니고…”라고 말하는 등 A씨 측과 인사 문제를 놓고 협의하는 과정에서 힘겨워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 점으로 미뤄 한동안 약속이 지켜진 것으로 보인다.

■ ‘7월 인사는 소폭으로 한다’ = 이 시장은 취임 직후인 2018년 7월20일자에 첫 승진 및 전보 인사를 한다. 5급 승진 8명, 6급 이하 전보 65명 등 총 73명이다. 고양시청 정규직 공무원이 2900여명이므로, 이는 소규모 인사였다.

■ ‘킨텍스 지원부지(C4)는 을측(A씨 측)과 협의 후 무조건 매각하는 것으로 한다’ = 이 시장이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A씨 측의 매각 압박이 거셌다는 점에서 각서 내용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녹취파일에 매각 요구와 불허 이유가 자세히 담겨 있다.

■ ‘우리 측 공무원은 최대한 오해가 없는 선에서 인사를 단행한다’ = 여기서 ‘우리 측 공무원’으로 불리는 대다수는 인사·회계·감사 등 시정 핵심 부서에 포진해 있는 공무원들이다. 이 요구를 수용하는 건 이 시장이 인사·예산권을 A씨 측에게 아예 넘긴다는 의미로 애초부터 실현이 불가능한 조항이었다. 이 시장이 이를 지키지 않으면서 양측의 갈등이 시작됐다.

■ ‘정·김·박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적당한 자리를 보장한다’ = 이들 3명은 최 전 시장 비서실에 근무했거나 캠프 대변인 경력을 갖고 있다. ‘정’은 현재 시청에 소속돼 있다. 최근 후반기 비서실장 내정설도 돌았지만 ‘매관매직’ 이행각서 사태가 불거지면서 잠정 연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은 시청에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시장 측근에서 전 보좌진과의 소통창구 역할을 했다. ‘김’은 선거법 위반 전력으로 공무원 임용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문화재단 대표, 킨텍스 감사, 체육회 사무국장, 자원봉사센터장 등 우리가 채용한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임기를 보장한다’ = 이 시장 취임 당시 문화재단 대표의 임기는 같은 해 2월 중도 사표를 낸 전 대표의 남은 임기인 2019년 1월 말까지였다. 하지만 그는 2020년 8월 말 퇴임했다. 킨텍스 감사는 킨텍스가 상법상 반드시 감사가 존재해야 하는 규모이기 때문에 2017년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3년 임기를 채웠다. 다만 체육회 사무국장과 자원봉사센터장은 연장된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이 밖에 ‘선거정책 협의’ ‘최성 전 시장과 관한 일 협의’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 등의 약속 조항은 결과적으로 모두 이행됐다. ‘우리 측 공무원에 긴밀한 사안 첩보 협의’ ‘동·서구 의원실 민원 협의’ 조항 등은 녹취파일에 지켜지거나 추진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녹취파일은 고양시에 ‘시정농단’ 인물이 존재했음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이상호 선임기자 sh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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