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서태후의 '웃음 만발' 황실 정원..영국·프랑스 파괴 딛고 화려한 부활
<50> 베이징 문화여행 ② 이화원과 용재천피영문화박물관
청나라 건륭제가 자금성을 나섰다. 서북쪽인 이화원(颐和园)의 만수사 가는 길이다. 황태후의 환갑을 맞아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서다. 가마가 갑자기 부두에 멈췄다. 육로가 아닌 수로를 이용한다. 황가어하(皇家御河) 양쪽에 자란 버드나무를 감상하며 유유히 이화원으로 들어섰다. 20세기 초까지 약 157년 동안 6명의 황제, 100명이 넘는 황후와 후궁이 유람했다. 서태후(자희태후)는 평생 32번 이화원을 찾았다. 그때마다 이 수로를 이용해 자희수도(慈禧水道)라 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맞아 100년 만에 운행을 재개했다. 베이징전람관 북쪽에 있는 황제선(皇帝船) 부두를 출발한다. 버드나무 줄기 흐드러진 동물원을 지나 자죽원공원에 이르면 물길이 막힌다. 도보로 5분 정도 걷는다. 황제나 서태후는 가마를 탔다. 배를 갈아탄다. 수로가 넓어지고 어느새 이화원 곤명호(昆明湖)가 보이기 시작한다. 약 1시간 만에 남여의문(南如意门)에 도착한다. 입장권을 사면 들어갈 수 있다.
이화원 출입구는 꽤 많다. 여행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주로 동궁문으로 들어간다. 북궁문으로 입장하면 소주가(苏州街) 풍광을 볼 수 있다. 강남 수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골동품, 공예품, 비단, 장식품 등을 파는 점포를 만들었다. 백성이 들어올 수 없는 황실 정원이다. 태감(환관의 우두머리)과 궁녀가 판매원으로 분장을 했다. 황실 귀빈이 오면 영업을 시작한다. ‘장사놀이’ 하던 무대였다. 관광지가 되었으니 풍물 거리로 변했다.
청의원이 이화원으로 이름이 바뀐 까닭은?
다리 위에서 보면 양쪽 모두 가게가 다닥다닥 붙었다. 아래로 내려가 길을 따라 한 바퀴 돈다. 호반에 반영된 자연스러운 정취가 예쁘다. 첫눈이 사르르 녹듯 퍼지는 물결이 아름다운 떨림을 전달한다. 모서리 골목에 앉아 있으면 궁녀가 옷자락을 하늘거리며 봉긋한 다리를 건너는 착각에 빠질지 모른다. 가끔 나룻배가 지나며 노 젖는 소리가 고요를 깬다. 강남 순시가 많았던 건륭제가 황실 정원을 꾸미고 청의원(清漪园)이라 불렀다. 이화원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이다. ‘맑은 잔물결’이라 했으니 베이징을 점령하고 100년도 더 지난 만주족 황제의 여유로운 마음이 엿보이는 듯하다.
소주가를 지나 만수산 뒷산을 오른다. 티베트 사원 향암종인각(香岩宗印阁)을 거쳐 산을 넘는다. 정상에 무량불전인 지혜해(智慧海)가 자리 잡고 있다. 바다처럼 지혜로운 부처에 대한 찬양이다. 황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유리로 장식돼 있다. 외벽 불감에는 1,100여개의 부처가 다소곳하게 앉았다. 지혜해를 한꺼번에 카메라에 담기 힘들 정도로 가깝게 패방이 걸려 있다. 고대 인도의 불교 성지를 뜻하는 지수림(祗树林)이라 적었다. 반대쪽인 산 아래에서 보면 중향계(众香界)다. 불국토를 향한 분향이자 속세와의 경계를 상징한다.
패방 아래에 불향각(佛香阁)이 보인다. 이중 처마의 8면 3층 누각이다. 1860년 2차 아편전쟁 당시 베이징을 침공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의원을 모조리 훼손했다. 1888년에 이르러 서태후의 주도로 복원하면서 이화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피서를 즐기려는 별궁이니 ‘웃음이 만발하다’는 뜻인 이화와 잘 어울린다. 불향각은 원래 9층 탑이 있던 자리다. 20m의 기단 위에 높이 36.44m의 누각이 산비탈에 솟아 있으니 웅장하다. 누각 안에는 천수관음보살이 서서 열린 문으로 곤명호를 바라보고 있다. 만수산 불향각에 도착해 처음 마주친 곤명호 풍광, ‘황실 정원이야말로…정말’ 외치게 하는 감동이 밀려든다.
아래로 내려간다.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이 많다. 오르다가 멈춰서 이미 여러 번 바라봤을 풍광이다. 양쪽 계단이 아주 가파르다. 너무 힘들어 가마를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예전에 한 번 올라온 적이 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래로 내려가면 축수(祝寿)를 빌던 덕휘전(德晖殿)이 나온다. 이번에는 조금 낮은 계단이 나온다. 천천히 따라가면 배운전(排云殿)이다.
건륭제가 모친의 환갑을 축원하기 위해 건축한 대보은연수사(大报恩延寿寺)의 대웅전이었는데, 서태후가 배운전으로 바꿨다. 남북조시대 문학가 곽박의 ‘유선시(游仙诗)’가 출처다. ‘신선이 구름을 타고 나온다’고 노래했다. 신선놀음을 하고 싶었을까? 서태후의 생일 축하 행사를 연 장소다. 약 8,000㎡의 공간에 수많은 왕공과 대신이 모여 축하했다. 자금성 전각과 비슷하다. 서태후의 침궁은 약 400m 떨어진 낙수당(乐寿堂)이다.
산보를 즐기는 서태후를 위해 만든 장랑(长廊)이 있다. 곤명호에서 불어오는 살랑바람을 맞으며 산보하기 좋은 복도다. 낙수당을 나와 배운전을 지나 728m 이어진다. 목조건물에 1만4,000폭에 달하는 그림을 그렸다. 삼국연의ㆍ서유기ㆍ수호지ㆍ백사전 등 흥미진진한 옛이야기와 산수풍경에 꽃ㆍ새ㆍ물고기ㆍ곤충도 있다. 서태후가 지루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이야기해준다. 중간에 정자도 있어 가끔 쉬어 간다. 그래야 다음 이야기를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을까?
장랑 끝에 청안방(清晏舫)이라 부르는 배 한 척이 떠 있다. 석방(石舫), 즉 바위로 만든 배로 36m 크기다. 2층 누각은 나무로 지었는데 대리석처럼 보이도록 색칠했다. 윗부분은 벽돌로 장식했다. 삼조(三雕)인 석조ㆍ목조ㆍ전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그냥 돌로 조각한 배로 보인다. 창문에는 서양식인 오색 빛깔의 유리를 끼웠다. 2층에 고인 빗물은 4개의 공심주(空心柱)로 흘러내린다. 1층 옆면의 4개 용두(龙头)로 빗물이 빠져나간다. 호수 위에 세운 멋진 수상 건축물이다.
석방 부두에서 유람선을 탄다. 용 머리와 꼬리가 앞뒤에 새긴 배를 타고 십칠공교(十七孔桥)로 간다. 섬을 잇는 다리로 구멍이 17개다. 겨울에 가면 호수가 얼어서 그냥 걸어가도 된다. 10년 전에 갔더니 다리 반대쪽이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150m의 다리 위에 사자 조각상이 544개가 있다. 맑은 날에는 불향각이 또렷하게 보인다. 가을 하늘, 산들바람이 불면 이화원을 온종일 거닐어도 좋다.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다녀야 한다.
영화 '인생'의 '살아 남으라' 절규 떠올리는 그림자놀이
이화원 동문에서 동쪽으로 약 3km 거리에 용재천피영문화박물관(龙在天皮影文化博物馆)이 있다. 은막 뒤에서 펼치는 그림자극 무대가 있다. 가죽으로 만든 캐릭터를 조종하고 전통악기 반주에 맞춰 목소리 연기를 한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한나라 무제가 총애하던 이부인(李夫人)이 전염병으로 죽자 상심이 컸다. 한 대신이 우연히 그림자놀이를 봤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천과 나무로 이부인 형상을 만들고 색을 입혔다. 황제 앞에서 휘장을 두르고 등불을 켰다. 무대에 나타난 인형의 자태에 매료돼 크게 기뻐했다. 인형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피영(皮影)의 기원이라 자랑하지만, 명나라 중기 이후에나 무대극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중원과 화북 지방과 서역 등에서 전수되다가 청나라 말기에 대중 예술로 번창했다.
악기 소리가 나더니 무대가 올랐다. 4대 민간 전설로 꼽히는 ‘백사전(白蛇传)’이다. 천년 묵은 백사인 백소정이 항저우 서호에 사는 청년 허선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백소정이 정체를 드러내자 허선이 쓰러진다. 백소정은 허선을 구하기 위해 영지를 찾아 곤륜산으로 간다. 전투를 벌이고 신선의 감동을 끌어내고 허선을 살리는 대목이다. 제목이 ‘도선초(盗仙草)’다.
수호지의 한 대목인 ‘무송타호(武松打虎)’가 이어진다. 술 한잔 거나하게 취한 후 고개를 넘어가는 무송이 호랑이를 만나 맨손으로 때려잡는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며 멀고 가깝게, 빠르고 느리게 자유자재다. 악기 반주도 이야기 전개에 맞춰 기승전결이다. 성우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 인사를 하러 나왔다. 처음에는 모두 어린이인 줄 알았다. 용재천극단의 단원은 모두 선천적으로 키가 작은 사람들이다. 품위 있게 슈전런(袖珍人)이라 한다. 70여명의 단원 모두 스무 살 전후로 키가 1.2m가량이다. 어린이 관객이 많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 뒤를 개방한다. 실제 체험을 하도록 도와준다. 손과 발, 몸동작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요령을 알려준다. 공연을 보고 직접 체험도 할 수 있다. 피영 공예품도 판매한다.
피영을 소재로 만든 영화 '인생'이 있다. 중국어 제목은 ‘훠저(活着)’다. 위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장이머우가 연출했다. 당대 특급 배우인 거여우와 궁리가 부부로 출연했다. 1994년도 작품으로 중국에서 스크린 상영이 금지된 영화다. 문화혁명 시대 마오쩌둥을 비하하고 체제 비판을 연상하는 내용이 많아서다. 청나라 말기부터 문화혁명 시대까지 피영을 연기하며 목숨을 부지한다. 문화혁명 시대가 되자 피영을 불태우게 된다. 아들과 딸을 잃고 손자가 애지중지하는 병아리 집이 된 피영 상자가 마지막 장면이다. 아들을 교통사고로 죽게 한 후배는 문화혁명 당시 주자파(자본주의자)로 몰려 고충을 겪는다. 자살할 뜻을 품고 참회의 심정으로 거여우의 집을 찾는다. 궁리는 골목으로 사라지는 후배에게 죽지 말고 살라는 말로 '훠저'라고 소리친다. 살아남으라는 절규, 문화혁명의 괴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바람,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강렬했다.
피영은 무대가 크지 않아도 공연이 가능하다. 고난도 기술도 아니어서 전국을 다니다 보면 자주 만난다. 항주만대교 휴게소에서 피영 '서유기' 공연을 봤다. 피영의 레퍼토리는 경극과 많이 비슷하다. 배우가 출연하는 경극과 그림자극을 비교해 봐도 재미있다. 무형문화재인 피영은 공예품으로도 제작해 판매한다. 유리 액자로 만들어 파는 피영은 가격도 저렴해 자주 사는 편이다. 집에 남기지 않고 강의 때나 모임이 있으면 선물한다.
용재천 무대는 낮 공연이 많다. 공연을 보고 바로 옆에 있는 원명원(圆明园)을 찾는다. 강희제가 황제에 오르기 전 옹정제에게 하사한 황실 정원이다. 이후 건륭제 시대에 동쪽에 있는 장춘원(长春园)과 남쪽에 있는 기춘원(绮春园)을 묶어 확장하면서 지금의 원명삼원 형태가 됐다. 세 개의 정원을 묶어 원명원이라 부른다. 청나라 황제가 피서와 정무를 보던 ‘여름 궁전’이다. 기춘원으로 들어가 장춘원을 거쳐 원명원까지 둘러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매년 여름 연꽃을 관람하는 사람으로 북새통이다. 시든 연꽃이 호수를 수놓은 모습도 볼만하다.
영불 연합국의 만행을 증거하는 서양루 흔적
장춘원 북쪽에 서양루(西洋楼) 유적지가 있다. 1759년에 서양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바로크 양식과 중국 전통을 결합한 건물 10여채를 지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설계한 프랑스 궁정 조경사 앙드레의 정원 양식을 따랐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이화원과 함께 원명원을 송두리째 파괴했다. 정원은 사라지고 석조의 뼈대만 남았다. 아편을 팔다가 전쟁을 일으키고 문화까지 말살한 마귀의 모습 그 자체다. 그 증거가 고스란히 남았다.
건물 잔해를 보고 복해(福海)로 간다. 전체 정원의 중심이고 원명원의 동호(东湖)였다. 왜 굳이 ‘복’을 썼을까? 유래는 멀리 진시황까지 올라간다. 동해에는 신선이 거주하는 세 개의 산이 있고 장생불로하는 명약이 있다. ‘서복이 바다를 건너 선약을 구한다’는 서복해중구선(徐福海中求仙)의 전설을 황제는 믿었다는 말인가? 황제의 장생불로와 강산의 지속을 염원하는 ‘복’을 빌었다. 이화원의 곤명호가 수원이었다. 지금은 북쪽의 저수지로부터 물을 끌어온다. 영불 연합군의 폭거 이후 수계가 막혔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석양이 진다. 눈을 감으면 잔영은 그저 무채색으로 변하듯 진나라도, 청나라도 사라졌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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