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장수말벌, 북아메리카 접수할까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0. 10. 6.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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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길이가 45밀리미터에 이르러 말벌 가운데 가장 큰 장수말벌은 커다란 턱으로 한 번에 꿀벌의 몸을 두 동강 낸다. 장수말벌 무리에 걸리면 꿀벌 수만 마리로 이뤄진 양봉 벌집이 순식간에 초토화된다. 위키피디아 제공

얼마 전 앞산을 산책하다 머리에 뭔가가 부딪쳤는데 충격 정도가 애매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도토리에 맞았을 때보다는 약했지만 어느 정도 무게감은 느껴졌다. 게다가 정수리가 아니라 뒤통수라 작은 도토리가 떨어진 것도 아니다. 

순간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어른 새끼손가락만한 장수말벌이 비틀거리며 비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마 빠른 속도로 날아가다 걸어가는 필자를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딪친 것 같다. 녀석은 곧 안정을 되찾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산길을 걷다 보면 말벌을 종종 만나지만 신경이 약간 쓰이는 정도다. 그런데 가끔 장수말벌이 등장하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짝 긴장한다. 그런데 이날은 뒤에서 돌진하는 장수말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해 처음 ‘접촉’을 한 것이다. 강한 충돌 뒤에도 필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고 제 갈 길을 간 녀석에게 고마울 뿐이다.

여러 마리 덤비면 사람도 위험

아무리 장수말벌이래도 벌레 한 마리에 너무 겁은 먹은 게 아니냐고 비웃을 독자도 있겠지만 장수말벌은 보통 말벌이 아니다. 덩치만 큰 게 아니라 독도 엄청 강하다. 길이 6밀리미터의 독침에 쏘이면 부위가 퉁퉁 붓고 며칠 동안 상당한 통증에 시달린다. 운이 없으면 급성 알레르기 반응인 ‘과민충격(아나필락시스)’으로 기도가 막혀 질식해 죽을 수도 있다. 장수말벌 여러 마리에게서 공격을 받으면 독 자체의 작용으로 사망에 이른다. 장수말벌은 아시아에서 분포하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서식 밀도가 높다. 장수말벌이 가장 번성한 곳인 일본에서는 매년 30~40명이 독침에 쏘여 목숨을 잃는다. 

말벌은 꿀벌의 천적이지만 특히 장수말벌은 무시무시하다. 예전에 TV에서 양봉 벌집 앞에서 장수말벌 한 마리와 꿀벌 수백 마리가 싸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삼국지’에서 관우나 장비가 단기필마로 전진에 뛰어들어 벼를 베듯이 적군을 쓰러뜨리는 장면이 연상됐다. 벌집 앞에는 장수말벌이 강한 턱으로 두 동강 낸 꿀벌의 사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장수말벌에 왜 ‘장수(將帥)’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꿀벌의 방어를 뚫은 장수말벌은 꿀을 실컷 먹고 꿀벌 애벌레와 벤데기는 자기 애벌레의 먹이로 삼는다. 장수말벌은 꿀벌뿐 아니라 다른 말벌의 벌집도 약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마귀나 거미 등 여러 절지동물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포식곤충이다. 가끔 새에게 공격을 당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장수말벌의 천적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밴쿠버섬에서 첫 발견

동아시아 원산인 장수말벌이 지난해 가을 북미 캐나다 밴쿠버섬에서 처음 발견됐고 올봄 인근 지역에서 추가로 발견됐다(흰색 동그라미). 최근 미국 워싱턴대 연구팀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사람의 퇴치 노력이 없을 경우 20년 이내에 미국 워싱턴주와 오리건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깊숙이까지 퍼질 것으로 예측됐다. 미국립과학원회보 제공

국제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9월 22일자 온라인판에는 장수말벌이 태평양을 건너 북미에 상륙했다는 소식과 이들의 미래를 예측한 미국 워싱턴주립대 연구진의 논문이 실렸다. 물론 장수말벌이 그 먼 거리를 날아간 건 아닐 것이고 화물선 같은 인간 활동의 힘을 빌려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북미에서 장수말벌이 처음 발견된 건 지난해 9월 캐나다 남서부 밴쿠버섬이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올봄 미국 북서부인 워싱턴주에서 장수말벌 일벌 4마리가 발견됐고 이어서 여왕벌 3마리가 발견됐다. 이들 지역은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 지대로 서로 가깝다. 따라서 2019년 태어난 밴쿠버섬의 장수말벌 여왕벌들이 겨울을 난 뒤 이듬해 인근으로 퍼져 새 둥지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연구자들은 장수말벌이 새로운 서식지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검증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북미 여러 지역이 장수말벌의 원산지인 동아시아의 기후조건(온대기후와 많은 강수량)과 비슷해 이들이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장수말벌이 1년에 50킬로미터 미만의 속도로 퍼져나간다고 가정했을 때 10년 뒤에는 워싱턴주 남쪽 오리건주까지 진출하고 20년 뒤에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깊숙이까지 퍼진다는 결과를 얻었다. 남북으로 한반도에 비교되는 거리다.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생태계 교란은 물론이고 양봉업계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고 사람의 안전도 문제가 될 수 있어 연구자들은 장수말벌이 자리 잡기 전에 퇴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워싱턴주의 시민과학자들이 장수말벌을 상시 모니터링해 발견하는 족족 없앤다면 아직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등검은말벌이 70% 넘게 차지

지난 2003년 국내에서 처음 보고된 등검은말벌은 불과 16년 만인 지난해 전국에서 채집한 말벌 개체의 72%를 차지하는 우점종이 됐다. 등검은말벌은 덩치는 장수말벌보다 작지만 공격성이 강해 조심해야 한다. 등검은말벌과 벌집. 위키피디아 제공

최근 북미에서 발견된 장수말벌이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간 것일지도 몰라 잠깐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우리가 남 걱정해줄 처지는 아니다. 지난 2003년 부산에 상륙한 한 말벌이 지금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등검은말벌이다. 중국 남부지역이 원산지로 아열대 종인 등검은말벌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아마도 부산항에 정박한 배나 화물을 통해) 파죽지세로 퍼져나가 지금은 우리나라에 사는 말벌속(Vespa) 10종 가운데 우점종이 됐다. 등검은말벌은 지난해 생태계교란생물로 지정됐다.

지난 5월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말벌 전국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9년 전국 280개 지점에서 채집한 말벌 1만1562 개체 가운데 무려 72%가 등검은말벌이었다. 장수말벌은 2위를 차지했지만 비율은 8%에 그쳤다. 

특이한 점은 경기도와 강원도 등 고위도 지방(우리나라만 봤을 때)에서 최근 등검은말벌이 급격히 세를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후변화로 우리나라 평균온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아열대종인 등검은말벌에게 점점 유리한 조건으로 바뀐 결과로 보인다. 게다가 등검은말벌은 ‘꿀벌 킬러’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꿀벌에 공격적이다. 농촌진흥청은 등검은말벌로 인한 국내 양봉 농가의 피해액을 연간 1700억 원으로 추정된다. 등검은말벌의 등장으로 야생 꿀벌(재래종)이 얼마나 타격을 받았는지도 걱정이 된다. 참고로 양봉 농가에서 기르는 벌은 유럽에서 들여온 서양꿀벌이다. 

외래종 유입 앞으로도 증가세

1960-2015년 유입된 외래종 수(가로축)와 2005-2050년 예상 외래종 수(가로축)를 비교한 그래프로 대각선보다 위쪽이면 증가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가 속한 온대 아시아(temperate Asia)를 보면 절지동물(arthropods. 채워진 갈색 동그라미)의 증가 폭이 큼을 알 수 있다. 지구변화생물학 제공

학술지 ‘지구변화생물학’ 10월 1일자에는 2005~2050년 동안 유입될 외래종의 수가 같은 기간(45년)인 지난 1960~2005년 동안 유입된 외래종 수보다 36%나 더 많을 것이라는 예측을 담은 논문이 실렸다. 독일 젠켄부르크 생명다양성 및 기후연구센터가 주축이 된 다국적 공동 연구팀은 지구촌을 8개 권역으로 나눈 뒤 ‘외래종 첫 기록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1950~2005년 기간의 외래종 수의 변화 추이를 토대로 2005~2050년 동안 각 권역에 유입될 외래종 수를 예측했다.

그 결과 유럽이 2500여 종으로 1위를 차지했고 우리나라가 포함된 온대 아시아가 1600종 가까이 돼 2위에 올랐다. 참고로 1960~2005년 대비 증가 폭도 유럽이 60%로 1위이고 온대 아시아가 50%로 2위다. 

1950~2005년 유입된 외래종을 생물 분류에 따라 보면 식물이 54%로 1위이고 곤충이 포함된 절지동물이 28%로 2위다. 그런데 온대 아시아의 2005~2050년 유입될 외래종 수를 보면 식물은 41%로 느는 반면 절지동물은 무려 117%가 늘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1950~2005년 온대 아시아에 유입된 절지동물 외래종이 후반부로 갈수록 급격히 늘고 있다는 뜻이다. 등검은말벌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기록된 것도 2003년이므로 이런 경향을 보이는 데 기여한 셈이다.

이런저런 경로로 도입된 외래종은 생존 조건이 안 맞아 소멸할 수도 있지만 재래종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급증할 수도 있다. 게다가 최근처럼 급격한 기후변화가 일어나면 재래종보다 외래종에 더 적합한 환경으로 바뀌면서 등검은말벌처럼 불과 10여 년 만에 외래종이 우점종이 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고려말 관리였던 야은 길재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보고 낙향한 뒤 10년 만에 옛 수도 개성을 찾아 둘러본 뒤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여기서 ‘인걸’의 자리에 ‘재래종’을 쓰면 한 세대 뒤인 2050년 한반도 생태계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8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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