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의 선생님, 이재명의 아버지..그 따뜻하고 슬픈 이야기

성한용 2020. 10. 4. 10: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344
집으로 불러 고기 구워주며 제자 격려하던 이낙연의 선생님
공부하지 말라고 검정고시 합격증 찢어버린 이재명의 아버지

고향·성격·노선 등 대조적인 두 사람 대선주자 양강구도 형성
경쟁과 협력으로 민주당 이끌어가야..정권재창출은 공동 과제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7월 경기도청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 기사는 사실과 함께 맥락도 중요합니다. 의미 분석에 치우치다 보면 상투적이거나 고루하기 쉽습니다. 상투적이고 고루한 기사는 독자들이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정치 기사를 연예 기사처럼 쓸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의미 있으면서 재미도 있는 정치 기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정치부 기자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디지털과 지면에 실리는 한겨레 정치 뉴스 중에 ‘정치바(Bar)’로 분류되는 기사가 있습니다. 한겨레 정치부 기자들이 ‘깊고 쉽고 유익한’ 정치 기사를 목표로 만들어내는 기사들입니다. 제가 연재하는 ‘정치 막전막후’도 정치바입니다.

이번 추석 연휴 기간 디지털에는 ‘정치BAR 추석특집-궁금하면 읽어BAR’가 실렸습니다.

첫 번째는 여당 반장 김원철 기자가 쓴 ‘이낙연 지지자는 누구? 이재명 지지자는 누구?’였습니다. 두 번째는 야당 반장 노현웅 기자가 쓴 ‘김종인은 대선에 출마할까요?’였습니다. 세 번째는 청와대 출입 성연철 기자가 쓴 ‘문 대통령 지지율 40%는 콘크리트일까요?’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가운데 김원철 기자가 쓴 ‘이낙연-이재명’ 기사에 이어서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 얘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정치는 선거입니다. 선거는 경쟁입니다. 승자와 패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이기냐’ 만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는 없을 것입니다.

‘맞수’나 ‘라이벌’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특기가 다르면서도 실력이 엇비슷해야 합니다.

실력 차가 현격한 싸움은 재미가 없습니다.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는 모든 어린이의 궁금증입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맞대결 장면은 어떤가요?

둘째, 경쟁 관계이면서도 동시에 협력하는 관계여야 합니다. 정치에서는 어쩌면 두 번째 조건이 더 중요합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이 바로 그런 맞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돼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불굴의 집념을 가진 대중 정치인들이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영남 사람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호남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었고, 1987년과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겨뤘습니다. 두 사람은 경쟁자이면서 민주화 동지였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와 힘을 합쳐 싸웠습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지사는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에 이어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정권을 재창출해야 하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무척 개성이 강한 정치인들입니다. 닮은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릅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을 잇는 정치적 맞수가 될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낙연 대표는 호남 사람입니다. 1952년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재명 지사는 영남 사람입니다. 1964년 경북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낙연 대표는 광주일고, 서울법대 출신 엘리트입니다.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가 정치에 입문한 5선 국회의원입니다. 전남지사와 국무총리를 지냈습니다.

이재명 지사는 초등학교를 나와 공장 생활을 하다가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중앙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성남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성남시장을 두 번 지내고 경기지사가 됐습니다. 2017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도전했습니다.

정치 스타일도 많이 다릅니다.

이낙연 대표는 태도를 중시합니다. 부드럽습니다. 권투로 치면 아웃복싱을 합니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치는 크로스 카운터가 일품입니다.

이재명 지사는 본질을 중시합니다. 날카롭습니다. 저돌적인 인파이터입니다. 가운데를 곧바로 치고 들어갑니다.

정책 노선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낙연 대표는 중도보수에 가깝습니다. 이재명 지사는 진보 정치인입니다.

두 사람의 이런 차이가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기 대선 경쟁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측면을 몇 가지 말씀드렸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두 사람의 성장기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정치인도 인간입니다. 어린 시절 어떤 과정을 통해 성장했는지가 인격과 능력을 크게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자서전을 찾아보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스토리가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내용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글 한 편씩을 소개하겠습니다.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연들입니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낙연 대표의 글입니다. 2000년 7월 31일 광주일고 동문 에세이집 ‘때론 치열하게 때론 나지막이’에 ‘선생님을 그리워하며’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2003년 출판한 책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에 나오는 프로필
나는 선생님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학생 시절의 중요한 고비마다 선생님들의 큰 도움을 받았다. 선생님들께서는 나에게 바른길을 제시해 주셨고, 내가 조금이라도 빗나가지 않게 배려해 주셨다. 나에게 거의 정기적으로 고기를 먹여 주시기도 했다. 나는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 그곳에는 삼덕초등학교라는 조그만 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폐교돼 법성초등학교로 통합됐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전체 학생 수가 200명 남짓밖에 안 됐다. 각 학년에 한반 씩, 학생 수도 30~40명 정도였다. 그런 곳이어서 광주 같은 대도시의 중학교로 진학한다든가 하는 것은 거의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주변에도 그런 전례가 별로 없었다. 나도 대도시로 진학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6학년이 됐다. 그런 때에 광주 출신의 박태중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여드름투성이의 스물 두살 총각이셨다. 사범학교를 졸업하시고 군대를 마치신 뒤에 맨 처음 부임하신 곳이 우리 삼덕초등학교였다. 부임하시자마자 박 선생님은 나를 지목하셨다. 광주서중으로 진학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셨다. 그리고는 과목별로 목표점수를 지정해 주셨다. 국어 95점, 산수 90점 하는 식이었다. 그 점수에서 1점이 모자랄 때마다 회초리를 한 대씩 때리셨다. 나는 공부를 가장 잘하면서도 선생님한테 회초리를 가장 많이 맞았다. 회초리가 너무 아파서 “내가 언제 광주서중 간다고 했습니까?”라고 항변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 뿐만이 아니었다. 박 선생님은 며칠에 한 번꼴로 밤에 우리 집에 오셨다. 수련장이나 전과를 갖다 주시기도 하고, 과자를 사다 주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공부 잘해 ”하고 격려하시곤 했다. 대도시 진학이나 입학시험이라는 개념 자체를 갖지 못했던 나도 조금씩 달라졌다. 그래도 나는 공부보다는 아버지와 농사 심부름을 하거나 친구들과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전기였던 광주서중에 합격하지 못하고 후기였던 광주북중에 합격했다. 광주에서 입학시험을 보는 기간에도 나는 박 선생님의 자택에서 먹고 잤다. 광주북중(현재의 북성중) 1학년 때의 담임은 국어를 가르치신 정종선 선생님이셨다. 정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나를 자택에 불러서 밥을 먹여 주셨다. 그때 선생님 댁에서 먹었던 쇠고깃국과 고소한 김, 그리고 따뜻한 놋그릇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은 밥상에 나와 단둘이 앉아 나에게 이것저것을 먹게 하시고 인생에 보탬이 될 만한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은 나의 가정사정도 자주 물으셨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아신 선생님은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아버님께 갖다 드려라” 하시면서 김이나 쇠고기를 싸주셨다. 광주북중 3학년 때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성적으로 보면 광주일고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 일고에서는 장학금을 받기가 어려웠다. 일고를 졸업한 뒤에 대학에 가려 해도, 아버지는 나를 대학에 보낼만한 재산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광주고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광주고에 가면 장학금을 받기가 쉬웠고, 광주고에서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많이 진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들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3학년때 담임 위후량 선생님께서 ‘주동 ’이 되셨고 다른 선생님들이 동조하셨다. 정종선 선생님도 동조자의 한 분이셨다. 위 선생님은 나에게 “일고로 가거라” 하시면서 “학비 걱정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머뭇거리자 위 선생님은 “아버님을 학교에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며칠 뒤에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교무실에 갔다. 위 선생님 등은 아버지에게 “낙연이 학비는 우리 선생님들이 모아서 댈 테니 낙연이를 일고에 보내주십시오”하고 요청하셨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지셨다. 아버지는 즉석에서 동의하셨다. 선생님들이 실제로 학비를 모아 주시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나 나는 선생님들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광주일고 3학년때 담임은 국어를 가르치신 김정수 선생님이셨다. 김 선생님께서도 나를 몇 사람의 학생들과 함께 간간이 자택에 불러서 돼지 불고기를 먹여 주시곤 했다. 선생님께서는 늘 “너희들 나이에는 잘 먹어야 하는데 내가 가난해서 이것밖에 못 준다”며 미안해하셨다. 옆에서 고기를 구워주시던 사모님께서는 “당신이 검사나 변호사를 했더라면 돈도 더 많고 학생들에게 고기도 많이 먹게 했을 텐데···”라고 거드셨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내가 선생이 아니었으면 당신을 만나지 못했겠지”하고 되받곤 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우리는 교련반대 데모 열풍에 휩싸였다. 나도 때로는 친구의 자취방에 찾아가 데모를 모의하곤 했다. 학교로서는 큰 고민이었다. 대학입시를 몇 달도 안 남긴 시점에 데모라니···. 그런 고민들을 하셨던 모양이다. 선생님들은 고민 끝에 ‘묘안 ’을 내놓았다. 3학년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다시 가자는 것이었다. 데모 열기를 다른 데로 돌리려는 아이디어였던 셈이다. 그러나 데모를 모의하던 친구들은 수학여행을 거부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무렵 나의 하숙방은 좁은 골목으로 손바닥만 한 창문이 나 있었다.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을 열어보니 김 선생님이 서 계셨다. 선생님은 “응, 공부하냐?” 하시더니 “수학여행 가거라. 이번에는 술을 마셔도 좋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멋있어서 나는 “예, 가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데모를 모의하던 친구들을 설득해 수학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수학여행 2박 3일 동안 나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시 공부에 몰두할 수 있게 됐다. 그 후로도 밤에 하숙방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면 김 선생님이 서 계시곤 했다. 선생님은 “응, 공부하냐? 나 간다”하시며 그냥 가시곤 했다. 고 3시절을 그렇게 보내고 나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친 뒤에 내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는 동안에 김 선생님은 정년퇴임하셨다. 선생님은 경기도 과천으로 이사해 살고 계셨다. 선생님은 간간이 신문사에 찾아오셔서 “자네 글 잘 읽었네. 열심히 하게”하시며 그냥 가시곤 했다. 그리고 내가 2000년 4·13 총선거에 출마하자 선생님은 과천에서 전남 영광까지 내려오셔서 얇지만 따뜻한 봉투를 놓고 가셨다. 나는 선생님들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의 백만분의 1도 보답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허둥지둥 살고 있다. 선생님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저리고 눈물이 솟구친다. 이 글이 선생님들에 대한 나의 작은 속죄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떻습니까? 참 따뜻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이낙연 대표를 만든 사람들은 이낙연 대표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선생님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다음은 이재명 경기지사가 2017년 자전적 에세이 ‘이재명은 합니다’에 쓴 글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나를 단련시킨 것은 아버지와 가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내게 큰 선물을 준 셈이다. 나의 성장기는 아픔의 연속이었지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 속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프게 자리 잡고 있다. 아버지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를 싫어한 이유는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장의 역할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5남 2녀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 누이가 하나 있었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었다. 이렇게 많은 자식을 두었는데도 아버지는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가사를 책임지고 자식들을 길러낸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아버지도 한때는 대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현재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청구대학에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중퇴를 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꾼이 되었다.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논밭 하나 없이 화전을 일구어야 할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공부’라는 말만 나오면 표정이 일그러졌고, 자식의 교육에도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아버지는 심지어 내가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조차 반대하며 번번이 훼방을 놓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아버지는 돌연 집을 나가버렸다. 말도 없이 무기한 가출을 한 것이다. 어머니와 7남매의 생계 따위는 아버지의 안중에 없었다. 혼자서 7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다 할 돈벌이를 찾기도 어려운 시골에서 어머니는 남의 집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날품팔이 삶을 살았다.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위태로운 나날들이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그 당시 불법인 줄 알면서도 몰래 막걸리를 빚어 팔기도 했다. 퉁퉁 불어터진 어머니의 손을 볼 때마다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힘겨울 때마다 이 모든 시련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에 저주의 감정마저 들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에게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경기도 성남이라는 곳에 터전을 마련해놨으니 모두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들뜬 마음을 안고 고향을 떠나 성남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절망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 성남시에 정착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성남시 상대원동 공단지역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집이라는 것도 달랑 단칸방 하나여서 여덟 식구가 다닥다닥 붙어 자야만 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성남이라는 도시와 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성남시는 서울에서 이주해온 이른바 ‘달동네’ 출신들로 북적였다. 서울의 청계천·창신동·금호동 일대 판자촌에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그곳 서민들을 이주시켜 만든 황량한 도시가 바로 성남시였던 것이다. 맨주먹으로 살기엔 차라리 고향인 안동 산골보다 못해 보였다. 고향에서는 그나마 열심히 땅을 파면 입에 풀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살던 공단지역에서는 먹고살기 위해 누구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내가 12세의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도 생존을 위한 필수 코스일 뿐이었다. 공장 생활은 산재 사고와 중노동, 그리고 무수한 구타로 점철된 시련의 시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폭력은 이미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고향인 안동의 초등학교에서도 교사들에게 수없이 매를 맞으며 자랐다. 집이 가난해서 학습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한 아이들은 무조건 매를 맞아야 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억울하고 화가 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까지 교권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를 맞아야 했던 나는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기에 이르렀다. 실컷 때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공장 생활을 하면서 변했다. 교사에서 공장 간부로 꿈이 바뀐 것이다. 공장 간부가 되려면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 꿈을 가로막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버지였다. “공장에서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쓸데없는 공부는 무슨 공부!” 아버지는 내가 공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매일 같이 구타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공부를 해서 바꿀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식의 공부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하는 자격지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버지가 뼛속 깊이 절망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긍정도, 한 줌의 희망도 없는 삶. 그런 인생을 자식에게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이었던 걸까. 나는 공장에서 간부들이 휘두르는 주먹보다 아버지의 그 절망이 몇 곱절 더 아팠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주변 사람들까지 절망의 늪으로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정말로 극복해야 할 대상은 가난과 시련이 아니라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 마음 하나로 독하게 공부를 해나갔다. 그리고 중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고등학교 검정고시까지 마쳤다. 나는 ‘해냈다’는 심정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증을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보였다. 아버지는 합격증을 받아들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수고했다’, ‘잘했다 ’는 말 따위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고개 정도를 끄덕여줄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공단 거리를 걷고 또 걸으며 울분을 삭였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방바닥에 합격증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받은 합격증인데···.’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그렇게 켜켜이 쌓여갔다. 대학 재학 시절 나는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졸업 후에 다시 도전해서 1차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지병인 위암이 재발한 것이다 . 그때 문병을 온 친척 한 분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버지가 자네 자랑을 많이 하더군.” 알고 보니 아버지가 친척들 앞에서 ‘우리 재명이를 내가 법대에 보냈네’라며 자랑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검정고시로 중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고, 공장에서 일하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내게 한마디 격려조차 없었던 아버지가 무슨 낯으로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내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도움을 전혀 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법고시 공부를 위해 신림동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몇 달 치 월세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직후여서 매월 학교에서 20만원씩 받던 생활보조금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 사정을 알고 내 통장으로 돈을 넣어준 것이다. 고시 공부에 전념해야 할 때라 한두 푼이 절실했던 나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돈이었다. 한편으론 그것이 아버지와 나눈 최초의 화해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사법고시 2차에 합격했다. 최종 합격 발표 후 어느 날 아버지와 마주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말을 단 한마디도 못 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집에서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나는 병상에 누워 잠든 아버지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내 목소리는 알아들은 것 같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천천히 눈을 떴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무엇인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느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는가 싶더니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아버지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 ‘아버지, 사실은 제가 잘되기를 바라셨죠? 모른 척하면서도 저를 쭉 지켜봐 주신 거죠? 제가 마음 단단히 먹고 살아가기를 바라신 거죠?’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그 큰 과거의 아픈 벽을 허물고 화해했다. 그 후 아버지는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한마디 유언도 없이 영원히 잠들었다. 어쩌면 그 눈물 속에 모든 말이 담겨 있었던 게 아닐까. 당신의 한 많은 인생에 대하여, 부자의 정을 한 번도 나누지 못한 채 떠나는 회한에 대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날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시간도 내가 태어난 시와 똑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그날, 그 시간에 맞춰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날의 임종은 결국 아버지와 나만을 위한 마지막 화해의 순간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가슴 속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오랫동안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원망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 뒤로 여러 해가 흐르면서 나는 한동안 아버지를 잊고 지냈다. 하지만 문득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인권 변호사로서 시민운동을 하다가 수배자로 몰려 수난을 당할 때, 정치에 입문해 정적들이 나를 함부로 겁박할 때, 가족 문제로 큰 시련을 겪을 때, 답답하고 억울하고 마음이 지칠 때마다 어김없이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매번 거짓말처럼 오기와 투지가 솟아나곤 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 앞에서 눈물 흘리던 그 얼굴이 나에게는 용기의 원천이 된 것이다. 비록 오랫동안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증오심은 오히려 불과 물과 망치가 되어 나를 담금질해온 셈이었다. 덕분에 내 의지는 강철같이 단단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거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진정한 토양을 내게 길러준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내게 준 유일한 선물이자 가장 소중한 유산이었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그 선물의 진정한 가치를 뼈저리게 실감하곤 한다.

어떻습니까? 이재명 지사가 겪은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이재명 지사는 소년 시절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두 차례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약국에서 사 모은 수면제를 먹고 연탄불을 피웠는데, 처음에는 연탄불이 꺼졌고, 두 번째는 자형에게 발견됐습니다. 그가 약국에서 샀던 수면제는 소화제였습니다. 10대 소년이 수면제를 사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약사들이 수면제 대신에 소화제를 준 것입니다.

이재명 지사는 최근 코로나 19로 자해, 우울증, 자살이 늘고 있다는 소식에 ‘우리 죽지 말고 삽시다’라는 제목의 페이스북 글로 자신의 이런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낙연 대표나 이재명 지사나 참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 정치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열차는 무겁습니다. 한 대의 기관차로 끌고 가기에는 힘이 부칠 수 있습니다. 당분간 이낙연 기관차와 이재명 기관차 두 대가 필요할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경선 국면에서 서로를 감싸주고 배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열성 지지자들이 상대를 지나치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지지자들을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경선 이후도 중요합니다. 경선에서 누가 이기든 두 사람이 힘을 모아 2022년 3월 대선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경선에서 진 사람도 다음 기회가 올 것입니다.

손자병법에는 상산(常山)의 뱀 솔연(率然)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낙연 이재명 두 사람도 잘 아는 내용일 것입니다. 소개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병력을 잘 다룬다는 것은 마치 솔연(率然)과 같이 하는 것이다. 솔연(率然)이라는 것은 상산(常山)에 사는 뱀으로 그 머리를 치면 꼬리가 달려들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달려들며 그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달려든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