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동 골목-아직도 구멍가게가 있는 '토박이들 동네' [골목 내시경]

2020. 9. 2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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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완만한 경사지에 보광동이 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한강이 보인다. 강가로 경의중앙선이 지나고 있어 가끔 기차가 지나는 정경도 볼 수 있다. 보광동이란 지명은 신라 진흥왕 무렵 이곳에 보광도사란 이가 보광사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지금 그 보광사는 찾을 수 없고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이 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골목 상권은 주민들의 편의 중심으로 형성됐다.


수십 년째 보광동에서 살고 있다는 주민에게 이곳의 좋은 점을 물었다. “뭐든지 다 있다. 버스·기차·전철 다 있고, 시장·학교가 있어서 멀리 나설 것 없이 이 안에서만 지내도 모자란 것이 없다”고 답한다. 나쁜 점은 무엇이냐 묻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동네가 좀 시끄럽다. 낮이고 밤이고 시끄러운데다가 집마다 개를 안 키우는 집이 없어서 이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면 머리가 아프다”고 답한다. 하긴 개를 끌고 다니는 주민들이 쉽게 눈에 띈다.

보광동은 도시 속의 작은 섬처럼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뒤쪽으로 이태원으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가 있고, 앞으로는 기찻길과 한강이 막혀 있다. 좌우로 한남대교와 반포대교를 잇는 큰길과 군사시설 등으로 꼼짝없이 포위된 형세다.

터줏대감이라는 은근한 자부심

지금은 보광동으로 가려면 한남동과 용산 쪽에서 강변을 따라 들어갈 수 있지만, 과거엔 이태원에서 2차로 외길을 따라 들어와야 했다. 보광동엔 버스 종점이 있었다. 종점은 이 도시에서 가장 외진 곳이란 뜻이다. 보광동의 시작과 끝이었던 종점은 사라졌고, 널찍한 공터로 흔적을 남겨놓았다.

옛 도시계획의 난맥상을 한눈에 보여주듯 비탈진 보광동길은 하루종일 버스와 자가용, 택시와 트럭으로 혼잡하다. 큰길 안쪽 골목의 사정도 다르지 않아 누군가 일을 보러 길가에 잠깐 차를 댔다면 한순간에 흐름은 막혀버린다. 골목길 가게 주인은 늘 겪는 일인 양 막힌 차들을 유도하여 길을 터준다. “보다시피 길이 막히면 사람 지나가기도 어렵고 장사에 피해 보면 나만 손해다. 길 뚫는 게 남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서 나선다”고 했다. 골목 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니 차를 어디로 움직여 피해갈 수 있는지 도가 통한 것이다.

골목길은 사정이 복잡해서 차가 비껴갈 수 있는 길도 있고, 외통으로 막힌 길도 있었다. 더러는 가파른 계단도 나오고 사람 둘이 어깨를 맞대고 걸을 만한 좁은 길도 보인다. 다양한 골목 표정을 구경하기에 보광동만 한 곳이 없어 보인다.

보광동 골목길은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유난히 토박이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 보광동이라고 한다. 그들 나름 터줏대감이라는 은근한 자부심도 있다고 한다. 하나 그 토박이의 역사도 겨우 100년을 넘겼을 뿐이다. 지금의 용산 미군기지 지역에 과거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그곳 둔지미 마을 사람들이 보광동으로 쫓겨 와 마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윗보광이라 부르는 지역부터 정착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상이군인들의 정착촌이 또 들어왔다. 이후로 도시 철거민들도 흘러들어와 보광동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긴 그 100년 동안 우리가 겪은 드라마는 남의 1000년과 맞먹을 터이니 풍상의 경험이 켜켜이 쌓였을 법하다.

말쑥하게 지은 연립주택들이 골목 안 주택의 대부분이다. 간간이 70년대풍 저택도 눈에 띄지만, 전성기의 모습은 빛이 바랬다. 골목 주민들은 서넛이 모여 동네 얘기를 하고 있었다. 통장이라는 이가 “영감님이 며칠 동안 안 보여서 돌아가신 줄 알았다. 문 두드리니 멀쩡히 나오시더라”며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듣던 이들도 “보이다 안 보이면 마음이 덜컥한다”고 대꾸를 했다. 그들의 모습도 대략 60은 넘어 보였으나, 이야기 속 주인공은 한참 더 꼬부랑 늙은이인가 보다. 골목 끝에 쭈그리고 담배를 피우던 이는 누군가와 통화에 바쁘다. “낚시나 하면서 지낸다. 요즘 일이 있어야지”라며 타버린 그의 속내를 흰 연기로 길게 뱉어냈다.

보광동 골목 주민 상당수는 다문화 가정이다.


이슬람 성전과 다문화 학교

보광동 토박이들은 대체로 자기 집 한 채는 가지고 산다. 시대에 맞춰 칸을 나누고 방을 만들어 세를 주거나, 허물어 다가구주택을 지었다. 한동안 보광동은 서울 다른 곳에 비해 방값이 싸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 덕에 젊은이들의 유입도 많았다고 한다. 부동산 업자는 “이제는 많이 올랐다. 수요가 늘어나니 방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되묻는다.

보광동 골목길을 걷다가 자주 만나게 되는 이들 중 예사롭지 않은 모습이 있다. 히잡을 쓴 여인과 이방인의 얼굴을 한 아이들이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를 맞아 집으로 데려가는 히잡을 쓴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꼭 잡거나 어깨를 토닥이며 걷는다. 방글라데시 출신이라는데 아이와 능숙한 우리말로 대화를 하고 있다. 이 골목에는 이방인들이 많이 산다.

언덕 위 장문고개는 보광동과 이태원을 갈라놓고 있다. 고개 넘어 이태원 쪽 모습은 이방인들의 영역인 양 간판이며 가게 물건까지도 영어와 인도며, 중동의 글자들이 수놓고 있지만 언덕 사이로 분위기가 바뀐다. 보광동 쪽에선 케밥을 파는 식당도 볼 수 없고 양고기 전문점도 찾을 수 없다.

보광시장은 몇몇 반찬집과 떡집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장문고개 위에 있는 보광초등학교는 서울의 대표적인 다문화 학교다. 전교생 3분의 1이 다문화 가정 어린이며 출신지도 제각각이어서 30개국 가까운 나라 출신 학생들이 공부를 한단다. 이슬람 성전이 지척에 있는지라 무슬림들이 다수이나 베트남, 러시아, 몽골 등에서 온 아이들도 뒤섞여 있다. 그 아이 중 상당수는 보광동에서 언덕을 올라 학교를 오간다. 하굣길에 마중 나온 엄마와 함께 골목을 걸어 귀가하고, 가게 아저씨가 농담을 건네면 웃음으로 받아준다. 가족이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은 이방인이나 토박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매대 위 감자를 괴롭히는 어린 딸에게 “마스크 똑바로 써라. 물건 가지고 장난치지 마!” 외치는 히잡 쓴 여인은 우리의 엄한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아이와 인사를 나눈 주민에게 이방인들에 대해 묻자 “사람 사는 게 어디나 똑같지 다를 게 뭐 있겠나. 생긴 거 빼곤 다 같다”고 답한다.

골목 곳곳엔 오래된 마을의 흔적이 박혀 있다.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편의점은 보광동에선 희귀하다. 구멍가게가 더 흔하고, 주민들이 드나드는 치킨집과 실내포장마차가 골목의 대변인이다. 음료수를 들고 가게를 나서는 주민에게 구멍가게의 장점을 묻자 “수십 년을 얼굴 보고 살아온 사이라서 외상도 주고, 없는 물건은 나중에 구해서도 주고 하니 마음 편하다”고 답한다. 가게는 좁고 어둡고 구색은 부족해도 인심은 넉넉하다는 이야기다. 편의점에선 외상이 안 되니 구멍가게의 확실한 승리다.

오래된 마을 특성상 주택수리 업체와 가전 수리점이 많다.


보광동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업종은 집수리 업소와 철물점이다. 어떤 골목엔 서너 개 업체가 줄지어 있다. 더불어 새시, 중고가전 업체도 보이고 보일러 설치와 수리 업체도 골목마다 있다. 수리 업체 사장은 “30~40년씩 된 집들이니 손 볼 데가 많다. 헐고 짓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고칠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세 내준 집들은 이사 들고 날 때마다 이것저것 수리할 것들이 줄 서 있다”고 말한다. 불황 속에도 호황인 업종은 따로 있는 법이다.

이태원 옆이지만 유행과 거리 멀어

고개 넘어 곧바로 이태원이고, 젊은이들도 많이 오가지만 보광동 골목길은 유행과는 거리가 멀다. 요즘 범람하는 예쁘고 화려한 골목카페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옷가게에서 된장과 간장을 함께 팔고, 구멍가게에서 배추와 무를 판다. 철물점에서 시골에서 짜온 들기름에 곁들여 청국장도 팔고 있다. 그릇가게에서 추석 상차림 반찬을 주문받고 있다. 예쁜 것보다는 실용적인 것이 더 중하게 와닿는 것이 보광동 사정이다.

서울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보광동의 전통시장은 쇠락했다. 건물 안에 자리 잡은 보광시장엔 떡집과 반찬가게 몇 곳만이 남아 있다. 나이든 떡집 주인은 대목을 준비하느라 일일이 손으로 송편을 빚고 앉아 있고, 반찬가게 주인은 전 거리를 손질하느라 분주하다. 예전 시장들이 하던 일은 길가 대형마트 두 곳이 나눠서 지고 있다. 그리고 길을 따라 간식거리며 채소를 파는 가게들이 바쁘게 손님을 맞는다.

마트 밖에서 장바구니들이 줄줄이 배달을 기다리고 있다. 직원은 영수증과 담긴 물건들을 한 번 더 점검한다. “동네가 다 비탈길인데다가 골목이 좁아서 장바구니를 무겁게 들고 다니기 힘들다. 장 보고 영수증에 주소 적고 가면 다 배달해준다. 오래 해서 주소 보면 대충 누군지 안다”고 한다. 이 가게가 유난히 붐비는 까닭이 있다.

장보기를 마친 할머니들이 마트 옆 계단에 앉아 서로에게 가정사 울분을 털어놓고 있었다. 심각하게 푸념을 듣던 노인은 “그 집에 며느리가 하나인데 그러나? 나도 죽어서 제삿밥 얻어먹기는 틀린 것 같다”고 한숨짓는다. 이번 추석도 제사 때문에 집안은 시끄러울 모양이다.

언덕을 내려와 제법 좋은 목에 자리 잡은 세탁소에 폐업 안내가 붙어 있다. 다음 달 15일까지만 영업하니 그 전에 맡긴 옷을 찾아가라고 안내한다. 열심히 재봉질하는 안주인과 달리 세탁소 주인은 한가롭게 문에 기대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에게 폐업 사정을 묻자 “이젠 그만하려고 한다. 40년을 일만 했는데 쉴 때도 되지 않았냐”고 답했다.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하고 몸이 건강할 때 쉬겠다는 것이다. 보광동 터줏대감인 그는 인생의 승자인 셈이다. 제자리를 지키고 흔들리지 않았으며 할 일을 다 마쳤다. 그는 밀려나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로 은퇴를 선택했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보광동엔 김유신을 모신 당집도 있고, 제갈공명을 모신다는 사당도 있다. 해마다 마을굿도 벌이는 서울의 흔치 않은 동네다. 원주민이라 부르는 토박이와 함께 멀리서 온 이방인도 골목길의 주인공이다.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남을 밀어내지 않고서도 서로 섞여 살아도 된다는 사정을 비탈진 마을의 골목길에서 배운다. 보광동 골목길의 모습처럼 변화에 조급한 세상 속에서 변하려고 허덕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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