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하의 지식카페>5세기 부여·가라 기마민족 日열도 정복..'임나일본부설'은 날조

기자 2020. 9. 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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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설을 보여주는 유물들. 왼쪽은 3세기 대가야의 철갑 기병 출토 유물. 오른쪽은 이와 유사한 5∼6세기 일본열도에서 출토된 가라식 투구(위)와 말가리개(아래).

■ 신용하의 인류 5대 ‘古朝鮮문명’ - (20) ‘기마민족 일본 정복설’

백제·금관가야·왜 3국 동맹, 신라 구원 요청 받은 광개토왕 부대에 참패… 일본으로 들어가 ‘야마토’ 왕국 건국

한반도·대륙서 출토되는 마구류·갑옷·칼자루 등 5세기 초부터 일본서도 출토… 역사적 사실로 증명

고조선 문명은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고대국가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48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東京)대 교수는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을 발표했다. 그의 학설은 ‘대륙 기마민족에 의한 일본열도 정복과 천황가 및 일본 고대국가 형성설’과 ‘한·왜 연합 왕국설’로 구성돼 있다. 필자는 ‘한·왜 연합 왕국설’은 일제 어용사가들이 날조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에 집착해 허구에 빠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은 일본 고대국가 건국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창의적 학설이라고 생각한다.

요지는 이렇다. 한반도와 대륙에서 출토되는 철제 마구류와 갑옷, 기마전에 편리한 복식 등이 5세기 초부터 갑자기 일본열도에서 출토되고, 동시에 금·은 장식의 관·귀걸이·칼자루 등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열도 내의 자생적 문물이 아니라 대륙의 기마민족과 왕후 귀족적 문화가 갑자기 출현한 것이다. 이는 일본열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대륙문화 수용 결과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대륙으로부터 ‘기마민족’이 건너와 일본열도를 정복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특히 출토품이 ‘마구류’뿐 아니라 각종 무기, 복장, 장식품까지 일종의 문화복합으로, 대륙 기마민족과 동일한 것이다. ‘기마민족’이 말과 함께 일본열도로 건너와 소국들을 정복·통일해 ‘야마토(大和)’ 고대국가를 수립하고 ‘천황’ 등 일본 ‘지배층’을 형성했음을 증명한다.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은 발표되자마자, 일본 학계에 큰 충격을 줬고 일부는 경악하며 에가미 교수의 학설에 반발했다.

일본 야마토 고대국가 건국은 반드시 두 단계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 이동해 들어가 야마토 소왕국을 세운 사람들은 한반도 변한 고령(高靈)지방의 ‘미오야마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AD 42년에 남하한 부여족의 기마군단에게 미오야마나를 빼앗긴 후 약 1세기 동안 함께 생활하다가, 대가라(임나) 통치에 불복한 왕족과 무장세력 일부가 AD 2세기에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을 새 정착지로 정하고 “야마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야마토’ 소왕국을 건국했다. ‘미오’는 ‘성(聖)’ ‘왕(王)’ ‘궁(宮)’의 뜻이고, ‘야마’는 족명이며 ‘토’는 한국 고대어 ‘’(地, 土)의 변음이다. ‘야마’(야마토)는 ‘야마족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본국이 ‘미오야마나(任那)’이기 때문에 ‘미오야마나’를 읽을 때 줄여서 ‘미마나’로 읽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고대국가 야마토의 최초 기원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은 일본열도에 각각 출신 나라 호칭의 자치공동체 분국을 세웠다. 그 결과 AD 2∼4세기경에는 규슈(九州)와 혼슈(本州) 등 일본열도 여러 곳에 한반도 마한·진한·변한·임나·가라·고구려·백제·신라의 분국(分國)이 다수 존재하게 됐다. 중국 고문헌에 의하면 AD 1세기경 일본열도에 100여 개의 소국이 존재했다.

야마토 소왕국 건국(AD 2세기 중엽) 약 70년 후 세습왕자가 없자 무장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결국 AD 3세기 초 ‘히미코(卑彌呼)’를 여왕으로 추대해 야마토 소왕국이 안정됐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는 히미코 여왕을 무녀(巫女)로 설명하고 있는데, 중요한 요인 설명이 결여돼 있다.

필자는 ‘히미코’가 부여 왕족 왕녀 출신이었고, 야마토 왕국의 안정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부여 왕족 성씨 ‘해’는 일본어에서 ‘히’로 변음된다. 아침‘해’가 아사‘히’로 변음된 것과 같은 것이다. ‘미’는 ‘왕’ ‘궁’의 뜻이며, 코는 ‘자·녀’(子·女)의 뜻이다. 일본에서는 ‘미·코’를 합해 ‘미코(尊)’로 읽기도 한다. ‘히미코’는 (부여)‘왕족 해 씨의 왕녀’의 당시 용어이고, 이것을 ‘비미호(卑彌呼)’라고 표기한 것은 고중국 위(魏)나라 사신 장정(張政) 등이 나쁜 뜻 한자를 골라 음차 표기한 것이다.

‘삼국지’ 왜전에 의하면, 히미코 여왕이 (AD 248년) 별세하자, 지름이 100여 보나 되는 큰 무덤을 만들고, 100명의 노비를 순장했다. 이러한 ‘순장제도’는 부여·가라 왕족의 풍속이다. 히미코 여왕의 승계자로 남자 왕이 등극했다. 그러나 무장들의 내란이 일어나서 피살된 자가 1000명에 달했다. 다시 히미코 여왕의 종실 여성 ‘이요(壹與·일여)’를 왕으로 세우자, 나라 안은 안정됐다. 여기에 깊이 개입한 위나라 사신 장정 등은 귀국해 야마토 상황을 위나라 조정에 보고했다.

중국 고문헌의 정보는 여기서 끝나고, 그 후 2세기간 일본열도와 야마토국에 대한 정보는 일본에도 거의 없다. 6세기 초에 가서야 기나이(畿內) 지방의 야마토에 대한 편린이 일본 고문헌에 몇 점 나오기 시작한다. 일본열도 역사기록이 없는 AD 5세기에 역사적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는 고고유물이다. 이 시기 5세기 초부터 일본열도의 출토 고고유물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일본열도에 갑자기 나타난 대륙과 한반도의 가라식 선진 철제 마구, 무기와 금은 장식물들이다.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왕조설의 근거가 되는 유물이다. 그러나 에가미 교수는 정복 주체인 기마민족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았다.

여기서 필자는 5세기 초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의 주체 이름을 가라(加羅), 특히 금관가라(金官加羅) 기마부대와 그 연합 세력이라고 특정해 설명하려 한다. AD 399년에 백제 아신왕은 신라를 병합하고자 백제·금관가야·왜의 동맹을 맺어 3국 연합군을 편성했다. AD 399년에 왜는 기병이 없이 모두 보병이었다. 백제·금관가야·왜의 연합군은 신라군을 격파해 400년에 신라 수도 경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신라 왕이 고구려에 구원을 청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동아시아 최강의 기병 부대를 남하시켜서 백제의 3국 연합군을 참패시켰다. 백제 4만 명의 보병은 대부분 전사하고 포로가 8000명이었다니 그 참패를 추정할 수 있다. 금관가라의 기병부대와 왜 보병도 참패해, 금관가라의 수도 김해까지 점령당했다. 그 후는 어떻게 됐을까? 백제 패잔병 중 보병의 희생은 막심했지만 기병부대 패잔병은 백제로 돌아갔을 것이다. 살아남은 왜군 보병은 물론 일본열도로 귀환길에 올랐을 것이다. 막강했던 금관가라 등 가라 기병부대들은 어떻게 됐을까? 김해 수도까지 점령당하고 갈 곳이 없는 가라 주력 기병부대는 패전한 왜 보병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들어갔다고 본다. 보병전에서는 아직도 막강한 대규모 가라 기병부대가 왜 원정보병과 연합해 일시에 일본열도에 상륙한 것이다. 일본열도에서 5세기 초부터 갑자기 출토되는 다수의 가라 마구가 이를 증명해준다.

필자는 5세기 초 일본열도를 정복한 기마민족의 주체는 금관가라 기병 부대를 중심으로 한 ‘가라’ 기마부대라고 본다. 즉 가라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이 되는 것이다. 가라의 기마문화와 기병부대의 계보는 부여(夫餘)의 그것이다. 기원까지 넣으면 부여·가라 기마민족의 일본열도 정복이 되는 것이다. AD 5세기 초 일본에 들어간 가라 기병부대는 일본열도를 일거에 휩쓸 막강한 기마부대는 아니었다. 광개토대왕 기병부대와의 전투에서 패전한 기병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라 기병부대는 일본열도의 한반도 가까운 지방에서 거의 20년간 양마와 철제무기 제조 등 기병부대 실력을 증강한 후 동정(東征)해 야마토 소왕국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본다. 이때 정권을 교체해 왕이 된 세력은 ‘금관가라계’ 기병무장세력으로 추정된다.

이때 야마토 소왕국의 정권을 교체해 새 왕조를 시작한 왕은 누구일까? 일본의 고문헌 자료가 완전히 결여된 시기이므로, 야마토 왕이 중국왕조에 보낸 조공사신에게 중국 황제들이 내린 ‘왜5왕’의 칭호에서라도 흔적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421년경 찬(讚) 세력이 이전의 ‘변진미오야마나·부여·임나’ 세력으로부터 무력으로 정권을 교체해 야마토 소왕국의 권력을 장악해 새 왕조를 연 ‘금관가라’ ‘가라’ 세력이라고 본다. 그러나 송(宋)나라는 이 왕조교체와 새 왜왕을 공인해주지 않았다. 새 왕조는 438년 진(珍)왕 때 송나라로부터 ‘왜국 왕’으로 인정받았다. 이어서 제(濟)의 아들 무(武) 때는 막강한 기병부대로서 일본 통일을 수행했다고 본다. ‘왜 5왕’은 모두 가라(특히 금관가라) 기병부대장 계보라고 추정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AD 451∼479년 사이에 왜왕 무가 중국 측에 대해 조공사절을 연달아 파견하며 정복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송서(宋書) 왜국전에 보면, AD 478년에 “왜왕 무가 송 황제에게 표문을 올리자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의 호칭을 내리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듬해 AD 479년에 야마토의 무왕은 남제(南齊)의 고제(高帝)로부터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그로부터 23년 후인 AD 502년에 야마토 무왕은 양(梁)의 황제로부터 정동장군(征東將軍)의 칭호를 받는다. 필자는 야마토 소왕국에서 제왕과 무왕이 AD 451∼AD 479년에 동정을 감행해 대부분 통일을 달성해서 야마토 고대국가를 수립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일본열도의 소국들을 다수 통일한 야마토국의 무왕은 누구인가? 일본역사의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필자가 여기서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AD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이다. 그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한반도를 그들의 역사적 기원이고 고향으로 동경해 왔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갑자기 일본이 한반도 임나 가라 지역을 AD 4∼6세기 약 200년간 무력점령해 임나일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둬 식민지 지배를 했다고 서술해 넣었다. 진실은 백제와 가라 연합군이 신라를 점령하려고 왜(倭)에 참가를 요청하자 보병부대 지원군을 AD 399년경에 김해에 상륙시켰다가, 이듬해 AD 400년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기병부대에 참패해, 가라 기병부대와 함께 패잔병을 배에 싣고 급히 돌아온 것뿐이었다. 그 후 5세기에는 막강한 고구려 세력 영향 아래 한반도 각국 경쟁이 있었고, 왜군은 전혀 한반도에 상륙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열도에서는 가라 기마민족에 의한 야마토 왕국의 정권교체와 새 야마토 왕의 일본열도 다수 소국에 대한 통일 정복 활동이 6세기 초까지 전개됐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열도 내의 한반도 왕국 계열 다수 분국(김석형 교수)을 가라계 새 야마토 조정이 통일 지배한 일본열도 내의 사실을 왜곡해, 마치 야마토 왜가 한반도에 상륙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지배한 것으로 날조한 것이었다. AD 4∼6세기 당시에는 ‘일본’이라는 국호도 없었다. 일본 명칭은 7세기 말∼8세기 초에 처음으로 정립된 것이었다. 5∼6세기에 가라 기마민족에게 정복당한 왜가 도리어 한반도의 가라6국을 점령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200년간 식민지 통치를 했다니, 동서고금의 역사책에서 이러한 왜곡은 다시 볼 수 없는 최악의 날조였다.

2세기 후반 일본 최초의 야마토 소왕국은 한반도 미오야마나(변한 고령지역)와 부여족 일단이 바다를 건너가 건국했다. 5∼6세기 야마토 고대왕국은 에가미 교수가 고고유물자료들로 증명한 바와 같이 대륙 및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를 정복해 건국했다. 필자는 이에 동의하면서 그 기마민족은 AD 400년 광개토대왕의 기병부대와 싸웠던 금관 가라국 및 가라국 기마민족임을 밝힌다. 즉 가라 기마민족이 원정왜군과 연합해 일본열도에 들어가서 일본열도를 정복해 통일 야마토 고대왕국을 건국했다고 밝힌다. 에가미 교수는 일본 왕실을 그 이래 한반도 진왕(辰王)계라 했는데, 필자는 이것도 더 좁혀 5세기 이후 일본 야마토 왕족은 금관가라 및 가라 기마부대장 왕족의 후예이며, 척족은 5세기에 그 왕족에 결합된 백제 기마부대장의 후예임을 지적하는 바이다. <시리즈 끝>

■ 용어설명

임나일본부설 : 일본 야마토(大和)국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에 진출해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6세기 중엽까지 지배했다는 주장.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17세기 초에 시작됐다. 이를 통해 일본 고대사회가 3세기경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논리로 비약되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으로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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