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로서 반세기 '북한 연구' 아닌 '북한 관찰' 고수해왔다"

김경애 2020. 9. 2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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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1970년 조지아대학 교수 부임 이래
'정년 보장 종신 교수' 새로운 큰 산
1950년대 '행태주의' 데이비드 이스턴
1969년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 충격
"가치중립·계량화 '정치학' 위기" 경고
첫걸음 학자에게 등대 같은 방향타
"사회문제 찾아내고 처방 제시" 결심
한반도 평화 해법·다양한 시각 제공
1976년 종신 교수 심사 무난히 '통과'
'친북인사' 낙인·해임 압력 '방어막'
2002년 최고 영예 '대석좌교수' 승격
길을 찾아서 (40회) 내가 학문하는 목적은
박한식 교수는 1976년 조지아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임용된 지 6년 만에 연구와 강의 성과를 인정받아 ‘테뉴어’(종신 교수)가 됐고, 2002년에는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대학 자체에서 주는 최고 영예인 ‘대석좌교수’ 직함도 수여받았다. 2009년 9월 박교수가 조지아대학 주최로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 여성 기자 2명의 석방 협상을 막후에서 조율해낸 후일담’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고 이제 다 왔나 싶으면 더 높은 고개와 마주하는 것이 인생인 듯싶다. 처음 도미하여 유학길에 오를 때는 박사학위만 받으면 다 될 것 같았는데 학위를 마치니 직장을 구하는 것이 걱정이었고, 들뜬 마음에 시작한 조지아대학의 교수 생활은 테뉴어라는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테뉴어(Tenure) 제도는 미국 대학에서 교수의 직장을 평생 동안 보장해주는 정년 보장 또는 종신 교수직이다. 테뉴어 제도의 목적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주위의 부당한 압력이나 해고 또는 보복의 두려움 없이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교수에게 고용 안정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이다. 테뉴어는 보통 임용된 지 5년 또는 6년 후에 학과 또는 단과대학 단위로 테뉴어 심사위원회에서 결정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학문과 연구 그리고 표현의 자유 보장이라는 본래의 취지와는 무관하게 근무 업적과 실적으로 평가와 심사가 이루어지는 게 현실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작금의 현실은 테뉴어 제도의 본래 취지에 맞게 보호를 받을 만한 대상의 학자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학교수들이 테뉴어 제도의 혜택을 받을 만한 연구나 강의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학문적으로 주류에서 벗어난 이론을 주창하거나 정부 정책에 신랄한 쓴소리를 쏟아내는 교수들이 없다는 현실은 참 슬픈 일이다. 나는 조지아대학 재직 내내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친북인사로 낙인찍혀 외부로부터 수차례 파면과 해고의 압력을 받았지만 테뉴어 제도 덕분에 연구와 강의를 지속할 수 있었다.

테뉴어는 주로 연구 실적(Research), 강의 평가(Teaching), 그리고 봉사 활동(Service) 등 세 가지 분야의 실적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결정되는데, 행여나 통과하지 못하면 짐을 싸서 이직하거나(현실적으로 이직도 쉽지 않지만) 또는 고용 안정 없이 평생을 소위 말하는 ‘비정규직’으로 지내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세 가지 분야 모두에서 좋은 실적을 내기는 참 쉽지 않다. 연구에 중점을 두면 강의가 조금 소홀해지는 측면이 있고 강의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연구 실적이 미흡할 수가 있다. 또한 봉사는 주로 연구나 강의와 관련된 학교 내외의 행사 활동들을 심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조금은 번거로운 일이다. 나는 첫해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싶은 생각에 몸과 마음이 바빴다.

사실 연구 실적에 대한 걱정은 별로 없었다. 무엇을 연구하고 싶고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관점과 철학이 있었다. 또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창의적으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과 같다는 생각에 제대로 운전을 해보고 싶은 자신감도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연구와 학문의 목적은 단 한 가지, 바로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다. 1950~60년대 미국 정치학계를 지배하던 행태주의 풍조는 정치현상에 대한 설명과 예측이라는 측면에만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이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일은 등한시하고 있었다.

캐나다 출신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1917~2014년)은 시카고대학 교수이자 미국정치학회 회장이던 1969년 발표한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 논문을 통해 1950년대 자신이 주창했던 행태주의 이론을 비판해 학계에 큰 충격을 줬다. 사진 위키피디아

1969년 12월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 미국 정치학회보에 논문이 한 편 발표되었다. 상당히 짧은 논문이었지만 정치학계에 던져준 파장은 상당했다.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The New Revolution in Political Science)이란 제목의 글이었는데 요지는 행태주의 풍조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학문으로서 정치학이 존립 위기에 처해 있다는 섬뜩한 경고였다. 이런 경고를 들고나온 학자가 다름 아닌 1950년대 행태주의의 부흥을 주도했던 데이비드 이스턴이라는 사실에 정치학계는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이스턴은 정치학이 나가야 할 새로운 길로 후기 행태주의라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스턴의 주장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행태주의 풍토에서 학문은 무조건 가치중립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과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규범과 가치가 절대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또한 행태주의 연구가 관찰 가능하고 계량화가 쉬운 문제들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데이터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들에만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정치학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좀 더 크고 중요한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정치학 연구가 현실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학자들이 현실 문제 연구와 해결에 더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데이비스 이스턴이 1969년 <미국정치학회보>에 발표한 ‘정치학의 새로운 혁명’ 논문. 박한식 교수는 1970년 조지아대학 교수로 부임하면서 이 논문을 학문의 등대로 삼았다. 사진 위키피디아

행태주의 학풍에서도 문제 해결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후기 행태주의의 등장에는 주목할 만한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후기산업사회로의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고 산업과 시장의 팽창으로 인해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식량 부족, 전쟁, 전염병, 그리고 환경 파괴 같은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이면서 회피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에 정치학계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고 데이비드 이스턴이 경종을 울리게 된 것이다. 시블리 교수의 플라톤에 관한 한 편의 논문이 나를 미네소타대학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이스턴의 후기 행태주의를 주창한 이 논문은 학자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나에게 등대와 같은 구실을 해주었다.

학문에 대한 나의 평생 신조는 문제 해결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크고 작은 사회문제들을 발견해 내고(identify) 원인을 찾아서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자 학자의 소명이라고 믿는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어떤 모습인가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는 일은 그 자체가 규범적이고 철학적인 연구이며 이는 행태주의에서는 철저히 배척되어 오던 연구 행위였다.

흡사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어디가 아픈지, 어떤 병이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건강한 신체의 기준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상적인 체온과 혈압이 얼마인지에 대한 개념 없이는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학문의 목적은 문제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 사회를 도안하고 설계하는 것이 학자의 역할이자 책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는 우리가 품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된 사회이며 그러한 사회가 ‘발전된(developed) 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상적인 사회의 설계를 위해서는 정치발전론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치고 연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만의 정치 발전 이론을 정립하고 발전시켜 1984년 <인간의 필요와 정치 발전>(Human Needs and Political Development) 제목으로 책을 낼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가 1984년 나름의 정치학 이론을 정리해 펴낸 저서 <인간의 필요와 정치 발전>의 표지. 아마존닷컴

대부분 나를 북한 전문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나는 평생 북한의 정치와 사회를 정치발전론의 개념으로 관찰하고 연구했지 북한 자체를 공부하지는 않았다. 정치 발전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미국도 중국도 한국도 그리고 북한도 이상적인 사회로 발전해 가는 과정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많은 내재적인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발전 중인(developing) 사회’이다. 북한이 처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국가 안보와 인민을 먹이는 문제다. 사회주의나 주체와 같은 이데올로기도 그리고 핵무기도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 정치 발전의 과정에서 사용되는 하나의 도구라는 게 내 생각이다.

2009년 9월 박한식 교수가 조지아대학 주최로 ‘북한 억류 미국 여성 기자 2명의 석방 협상 후일담’ 특강을 마친 뒤 청중들과 뒷풀이를 하고 있다. 박 교수는 정치학과 더불어 다양한 과목을 강의하고 공익 봉사 활동도 활발하게 펼쳐 ‘전전후 내야수’로 불렸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교수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연구만큼이나 중요하고 보람있는 일이다. 내가 가르치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학생들이 스스로 지혜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실이었다. 나는 첫 강의 시간에 항상 두 가지 질문을 학생들에게 하곤 했다. 첫째는, 30년 뒤 너희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사회가 되기를 바라느냐? 둘째 질문은, 30년 뒤 어떤 사회가 될 것 같으냐? 전자는 규범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이고 후자는 경험적인 질문이다. 학생들에게 이 두 가지 질문을 항상 생각하라고 가르쳤고 졸업 이후 어떤 직장을 갖든지 현실적으로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내가 어떻게 공헌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라고 가르쳤다. 즉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는 게 나의 교육 철학이었다.

1970년 교수 임용 첫해부터 강의도 정말 열심히 했다. 강의 준비도 많이 했고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쳤다. 기존에 개설되어 있던 과목들도 있었고 내가 새로 만든 과목들도 많았다. 총 7과목을 강의했다. 나의 중점 연구였던 정치발전론과 정치학 방법론은 학부와 대학원에서 강의했고 정치학과의 필요와 요청에 따라 미국 정치, 비교 정치, 국제 정치, 인권론, 동아시아 정치 등을 강의했다. 내가 이렇게 다양한 과목을 개설해서 강의하니 동료 교수들이 나에게 ‘전천후 내야수’(utility player) 별명을 붙여 주었다.

45년 동안 강단에 서 있었으니 나에게 배우고 졸업한 학생이 몇천명은 족히 될 듯싶다. 마치 나는 강물 한가운데 솟아 있는 바위 같고 학생들은 그 바위를 스쳐 지나가는 물결 같다는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학부생들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지만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학생들은 지금도 한 명 한 명 기억에 생생하다. 얼마 전 내가 지도했던 한 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성요셉대학(Saint Joseph’s University)에 재직하고 있는 카즈야 후쿠오카 교수였다. 그는 올 가을학기부터 정교수로 승진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이어서 무한한 보람을 느꼈다.

박한식 교수는 45년간 조지아대학에서만 재직하며 수천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최근 미국 필라델피아의 성요셉대학 정치학과 정교수로 승격된 카즈야 후쿠오카도 박 교수가 기억하는 제자 중 한명이다. 사진 성요셉대학 누리집

정년 때까지 박사과정을 지도한 학생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미국 학생도 상당수 있었고 특히 외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다. 조지아대학이 저렴한 학비에 비해서 질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명성이 난 덕분인지 외국 유학생들이 무척 선호하는 학교였다. 유럽과 인도 그리고 아프리카 학생도 여럿 있었고 특히 내가 동양인이다 보니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 유학생들이 나에게 지도교수를 많이 부탁해 왔다.

나는 특히 한국 학생들에게 유학 동안 한국을 옳게 보도록 지도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잘 안 보이던 것이 밖에서 보면 선명해질 수도 있고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교육했다. 전쟁과 남북 분단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평화로운 사회는 어떻게 만들고 평화통일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양으로 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고 고민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한국 학생들에게 내가 연구하고 터득한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문제 해결 방법을 강요하거나 주입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문제 해결 방법을 터득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가면서 각자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내가 강의하면서 조지아대학에 가장 공헌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시각을 소개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1990년대까지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마르크스를 읽으라는 과제물을 내주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다. 냉전으로 인해 미-소 진영 간의 학문적 교류와 소통이 전혀 없었고 자유민주주의가 그 어떤 통치 이데올로기보다 더 훌륭하다는 견해가 미국 사회와 대학에 지배적이었다. 공산주의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생겨났는가 등에 대한 연구와 강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단순히 나쁘다 또는 없애야 한다는 등의 선악 또는 흑백 논리만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미국 밖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제도와 이데올로기를 소개하면서 ‘다름’을 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내가 정립한 정치발전론의 시각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더 발전된 제도이고 공산주의는 낙후된 제도라는 인식은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더 효과적으로 성취시켜줄 수 있는 제도가 더 발전된 제도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생존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욕구다. 생존을 위해서 인간은 물과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욕구이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 빵을 먹을지 아니면 밥을 먹을지 또는 젓가락을 사용할지 포크를 사용할지는 전적으로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어떤 한쪽이 더 발전되고 우월한 제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학생들에게 즐겨 사용하던 예를 잠시 언급하자면 정치 발전은 등산과 같은 것이다.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그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결국 목표는 같지만 다양한 방법과 길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학문과 학자의 겸허한 자세이다. 구체적인 예로 미국 학생들이 보는 북한은 한마디로 악마다. 그러나 나는 미국 학생들이 북한도 하나의 정치체제이고 북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균형있는 시각을 갖도록 가르쳤다. 나에게 배운 학생들 대부분은 북한을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박한식 교수가 2015년 정년 때까지 45년간 재직한 조지아대학 스쿨 오브 퍼블릭 앤 인터내셔널 어페어스(SPIA)는 80년 가까운 전통과 우수한 교수진으로 미국 대학 서열에서 최상위권에 올라 있다. 조지아대학 누리집

공익 봉사 활동(Public Service)도 테뉴어 심사에 중요한 평가 항목이다. 나는 정치 발전과 평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북한을 방문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한 건 1980년부터이지만, 1970년 조지아대학에 임용된 때부터 준비를 했고 그것이 1980년대부터 조금씩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1976년에 무난히 테뉴어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고, 나중에는 연구와 강의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조지아대학으로부터 교수로서는 최고 영예인 대석좌교수(University Professor)라는 영광스러운 직함도 수여받았다.

구술집필 권준택 미국 유타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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