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의 최전선, 궁극의 질문들>AI·데이터 숭배.. 과학, 미래 神의 자리 어디까지 넘볼까

기자 2020. 9. 21. 10: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러스트 = 이미영 작가

⑨ 종교의 끝은 과학일까? : 코로나 시대 종교의 미래

20세기 우주 역사·생명 진화에 관한 발견… 종교의 전통적 세계관 손보게 해

‘뇌사’ 삶과 죽음의 경계 흐려지고 ‘유전자 가위’ 생명체 조작 가능

외계 생명체 부정도, 맹목적 믿음도 능사 아냐… 두 가능성 열고 우주속 우리 성찰해야

LP와 CD의 음질 차이 때문에 LP를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 음향 기기에 별 관심 없는 나에게는 낯선 얘기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방에 디지털 피아노가 있는데, 가끔 뚜껑을 열고 두드릴 때면 늘 뭔가 아쉽고, 내 몸이 기억하는 일반 피아노의 건반 터치, 현의 울림, 나무 내음이 그리워진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에 원본과 모방의 차이까지 더해져 더 그런 것도 같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이번 학기도 일단 비대면 수업이다. 화상 강의가 어색하고 강의안과 PT를 계속 손봐가며 수업하기는 버겁지만, 어쨌든 그럭저럭 적응하는 중이다. 하지만 북적이는 캠퍼스와 서로 눈을 맞추며 수업하던 때가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비대면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대면 소통의 온기를 아쉬워하는 이율배반. 이는 한편으로 사진과 영화라는 새로운 복제 기술의 혁명적 잠재력을 간파한 발터 벤야민과 다른 한편으로 실체 없는 시뮬라크르뿐인 이미지 범람 시대의 허상을 간파한 장 보드리야르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다.

코로나19가 ‘문명의 전환’ 수준의 거대한 변화를 촉발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상황이 막중한 만큼 경청할 만하다. 그런데 대면·비대면에 대해선 생각해볼 게 있다. 배우는 카메라를 직접 쳐다봐선 안 되는데, 그래야만 영화 속 허구 세계의 관음증적 토대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배우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연출은 강한 이질적 의미를 내뿜기에 드물게만 쓰인다. 화상 소통은 어떨까? 화상 소통에서 나와 상대는 서로 눈을 맞출 수 없다. 상대가 내 눈을 보게 하려면 나는 카메라를 응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모니터에 비친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카메라와 모니터를 동시에 보는 건 불가능하다. 상대가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는 한 내가 볼 수 있는 건 눈을 카메라 아래 모니터로 향하고 있는 얼굴뿐이다. 화상 소통에서는 응시가 엇갈리고, 이는 소통 구조 자체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대면과 비대면의 차이는 단지 매체의 차이 이상이다. 거기에는 실제와 가상의 차이, 원본과 모방의 차이, 응시의 엇갈림이 엉켜 있다. 그 복잡성을 읽어야만 대면과 비대면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방역 체계를 흔든 것으로도 모자라 이를 신앙과 양심의 자유로 정당화하는 일부 개신교인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종교들은 아무리 달라도 서로 환유적으로 얽혀 있다. 일부 개신교인의 잘못은 개신교 전체를 보는 눈에 영향을 주고, 개신교의 잘못은 다른 종교들을 보는 눈에 영향을 준다. 다른 개신교 진영이 대신 사과하며 반성하고, 다른 종교들이 개신교의 위기를 걱정스레 지켜보며 자기 쇄신을 도모하는 건 이 때문이다.

코로나19와 종교 얘기를 하려면 과학, 정치 등 온갖 얘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능력도 달리고 지면도 좁다. 기왕 종교계와 종교학계에서 논의가 좀 있었고, 새로운 논의들도 예정돼 있다. 관련 기사나 자료도 구하기 쉬우니 여기선 접으련다. 조금 얘기를 해 보자면, 개신교가 유별나긴 해도 사실 공동체와 의례가 중요하지 않은 종교는 없다. 모임 욕망은 모든 종교에 다 있다. 자제할 뿐이지 모임 욕망을 버린 건 아니다. 또 종교인들이 비대면보다 대면 의례를 선호하는 건 단지 교리나 타성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앞서 살핀 대면과 비대면의 차이가 똑같이 얽혀 있다. 코로나19 이후 종교마다 비대면 의례가 늘고, 소그룹이 강화될 것으로 예측할 수는 있지만 그 변화의 의미를 알고 변화의 향방을 가늠하려면, 더 많이 살펴야 한다. 디지털과 영상에 익숙한 Z세대가 잘 적응하고, 아날로그적인 베이비붐 세대는 적응하지 못한다는 식의 세대론은 답이 아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실제와 가상, 원본과 모방 사이의 틈을 파고들어야만 비로소 무언가 읽어낼 수 있다.

많은 게 변하겠지만, 다 코로나19 탓은 아니다. 이미 진행 중이던 변화가 더 크고 빨라졌을 뿐인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진행 중이었고, 코로나19는 거기에 규모와 속도를 더하고 있다. 종교의 미래도 그렇다. 인간의 일들치고 영원불변한 건 없다. 모든 게 생성, 변화, 소멸한다. 종교도 다르지 않다. 많은 종교가 생겨났다가 사라졌고, 지금의 종교들은 살아남고 변했기에 그렇게 있는 거다. 코로나19 이후 종교의 미래에도 기존 변화의 확장 및 가속화와 뜻밖의 새로운 변화가 동시에 벌어질 것이다.

종교의 미래는 두 갈래로 살필 수 있다. 개별 종교들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종교들의 출현. 20세기 종교들은 과학 기술의 발달·자본주의화·도시화·세계화 탓에 크게 변했는데, 21세기에는 과학 기술의 영향이 더욱 커질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 역사와 생명 진화에 관한 발견들은 종교들이 전통적 세계관을 크게 손보게끔 했다. 그러지 못한 종교는 위축되거나 소멸할 수 있다. 진정한 초교파적 연합은 못 하면서, 가짜 과학인 창조과학을 좋아하고 보란 듯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데에 모든 교파가 같은 세계관을 가진 개신교의 미래가 걱정되는 건 이 때문이다. 가톨릭도 걱정된다. 가톨릭은 진화론 같은 현대 과학은 수용하면서 생명관은 전통에 집착한다. 그래서 낙태와 관련해서도 여성은 제외하고 태아만 본다. 과학적 진화론과 전통적 생명관을 병치하는 그 절충주의는 자기모순이며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

현대 과학은 놀라운 발견과 발명들로 우주·생명·인간을 다시 정의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이 숙제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종교의 미래는 숙제 풀이에 좌우될 것이다. 현 우주가 팽창을 멈추고 식어버린 채 끝날지 아니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할지 알 수 없지만, 불교처럼 윤회론으로 쉽게 숙제를 마친다면 별 유익이 없다. 그보다는 인간도 생명도 흔적 없이 사라질 우주의 종말에 비추어 신과 인간의 관계를, 생명과 인간의 의미를 다시 쓰려 하는 가톨릭·개신교 현대 신학자들의 분투가 더 흥미롭다. 외계 지적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라엘리언처럼 외계 존재를 그냥 믿는 것도, 전통주의 가톨릭·개신교처럼 우리의 유일성만 믿고 외계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그보다는 상반된 두 가능성에 비춰 우주 속의 우리를 성찰하는 게 낫다. 우리는 언젠가 외계 존재의 증거를 찾을 수도 있고, 끝내 못 찾을 수도 있다. 과학소설(SF) 영화 ‘콘택트’(1997)는 그 발견의 감격을, ‘애드 아스트라’(2019)는 발견 실패의 절망을 그린다. ‘콘택트’에서 우주는 아름답고 우린 전혀 외롭지 않다. ‘애드 아스트라’에서 우주는 쓸쓸하고 우린 사무치게 외롭다. 물론 둘 다 똑같이 우주 속의 우리 이야기를 새로 쓰라는 숙제를 준다.

현대 의학은 죽음의 처소를 심장에서 뇌로 옮겨놓았다. 하지만 비록 보조장치 덕분이긴 해도 사랑하던 이가 숨 쉬고 심장이 뛰는 걸 보면서 뇌사를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종교계의 생명 선언보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소설 2013, 영화 2016) 같은 작품에서 얻을 게 더 많다. 종교는 오랫동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확신해왔기에 그 경계가 흐려진 현재와 미래를 준비하는 데 더딜 수도 있다. 유전자 편집은 어떤가? 2012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출현으로 세계는 크게 바뀌었다. 크리스퍼는 치료에 혁신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인간이 모든 생명체를 조작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게다가 꽤 간단해서 정부, 대학, 기업 연구소 바깥으로도 퍼지고 있다. 예전 생명복제 논란 때는 과학자의 윤리와 제도적 통제가 관건이었지만, 이젠 다르다. 의료 민주화라는 신념의 바이오해커들 덕에 누구라도 크리스퍼를 택배로 받아 유전자 편집 실험을 할 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신 노릇(playing God)’의 민주화다. 이 문제에 대해선 경전보다 ‘부자연의 선택’(넷플릭스, 2019) 같은 다큐멘터리가 더 유익하다.

거시 역사가 유발 하라리가 미래의 ‘데이터교’를 예상한 것이나(‘호모 데우스’·2016), 구글 자율주행차 엔지니어였던 앤서니 레반도프스키가 인공지능(AI) 종교 ‘미래의 길’을 창시한 걸 보면(2017), 미래의 새로운 종교들에 대해서도 할 얘기는 많다. 이와 관련해 ‘혹성 탈출 2: 지하 도시의 음모’(1970)를 권한다. 영화에서 지구의 지배자 유인원들을 피해 지하에 숨어 사는 돌연변이 인간들은 핵폭탄을 신으로 숭배한다. 미래의 종교에 대한 상상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상상의 소재가 주로 냉전 시대 핵폭탄이나 21세기 빅데이터와 AI 같은 과학적 산물이라는 점은 꽤 흥미롭다. 하지만 다른 기회로 미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지면도 필요하고 공부도 더 필요하다. 이제 기획 연재 집필 순번도 지났으니, 다시 독자가 돼 즐거이 듣고 배우련다.

김윤성 한신대 디지털영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용어설명

신 노릇(playing God) : 누군가가 자신이 신인 양 판단하고 행동할 때 경고하며 쓰는 말이다. 모두를 살릴 수 없다면 누구를 살릴 것인지 정하는 일도 신 노릇의 하나다. 영화 ‘프랑켄슈타인’(1931) 속 교회 지도자들이 이 말을 쓴 뒤로 유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대개 보수적 견해에서 과학을 경계하는 데 쓰인다. 그 대상도 인공수정, 생명복제, 유전자 편집, 기후공학, 인공지능(AI) 등 다양하다. 에일리언의 기원이다.

데이터교 vs 미래의 길 : 빅데이터와 AI가 서로 밀접한 만큼 두 종교도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차이가 더 크다. 데이터교는 미래를 상상하는 이들이 예상한 종교이고, 미래의 길은 미래를 확신하는 이들이 미리 창시한 종교다. 데이터교는 정보의 흐름을 궁극적 가치로 믿고, 미래의 길은 인격체가 될 초지능 AI를 숭배한다. 데이터교의 신앙 대상이 우주적 원리인 다르마나 도(道)에 가깝다면, 미래의 길의 신앙 대상은 절대자 유일신인 야훼나 알라에 가깝다.

[ 문화닷컴 바로가기 | 문화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 | 모바일 웹]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