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에게는 '법관 독립'을 연구할 '학문의 자유'가 없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28)]

이혜리 기자 2020. 9. 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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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자유

[경향신문]

2017년 3월25일 서울 연세대 광복관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법원행정처는 이 연구회 회원들이 상고법원·인사제도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자, 연구회를 와해시키려 한 혐의를 받는다. 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하려던
법원행정처가 내세운 대응 이유
“인권법 아닌 사법제도 연구해서”

유엔 ‘사법부 독립에 관한 기본원칙’엔 이런 규정이 있다. “사법부의 구성원들은 다른 시민과 마찬가지로 표현·신념·결사·집회의 자유를 가진다. 다만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는 법관들은 항상 직무상 존엄과 사법부의 공평·독립을 유지해야 한다.”(8조) 조건이 따라붙기는 하지만 법관에게도 표현 등의 자유가 있고, 이 자유의 보장은 사법부 독립을 위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행정부·입법부 등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의 독립, 법관의 임기·적절한 보수·안전 등의 보장과 나란히 ‘법관의 자유’가 명시돼 있다.

법관의 자유는 한국에서 깊이 논의된 적이 없다. 사회 현안에 대한 판사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글을 놓고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언급된 정도다. 사법농단 재판에서는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된다. 법원 내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들이 상고법원·인사제도·대법관 구성 등에 목소리를 내자 법원행정처가 연구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대응한 혐의(직권남용)와 관련해서다.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지시가 법관의 표현 및 연구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공소장에 썼다. 법관에게 표현 등의 자유가 필요한지, 법관 독립을 지키는 사법제도는 인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재판에서 다뤄졌다.

■ 국제인권과 법관 독립은 무관?

법관 ‘학문의 자유’ 보장 위해서
연구회가 있는 건 아니란 주장도

2015~2017년 법원행정처에선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연구회 내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대응 문건이 여러 개 생산됐다. 법원행정처는 대응책으로 ‘사법국제화연구회’를 신설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 중 국제 쪽에 관심 있는 법관을 유인하는 방안, ‘법원·미디어·엔터테인먼트 law 연구회’를 통해 젊은 법관들을 끌어들이는 방안을 검토했다. 판사들 자율이 아니라 법원행정처가 주도해 연구회를 만들고 국제인권법연구회 힘을 분산시키려 했다. 예산 지원 중단과 인사 불이익도 주요하게 검토된 대응책들이다.

‘전문분야연구회의 구성 및 지원에 관한 예규’ 활용도 나왔다. 예규 3조는 법관이 2개 이상 연구회에 중복해 가입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이 규정 준수를 요구하면서 법관들이 1개 연구회만 선택하게 하면 중복가입자가 많은 국제인권법연구회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규정 미준수에 본능적 거부감이 있는 법관들의 통상적인 성향을 활용”이라는 문장이 있다. 법원행정처는 2017년 2월13일 예규에 따라 중복가입자는 연구회를 정리하라는 내용의 공지문을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렸다.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혐의를 부인한다. 그 첫 번째는 법관에게도 표현 등의 자유가 있는 것은 맞지만, 국제인권법연구회가 본래의 연구 주제인 ‘국제인권법’에서 벗어나 ‘사법제도’를 연구하는 것은 문제이기 때문에 법원행정처가 정당하게 대응을 검토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애초에 연구회 설립은 법원행정처장의 허가사항이고, 한정된 예산을 부적절한 활동을 하는 모임에 줄 수는 없다고 했다. 이 같은 주장은 국제인권법과 사법제도는 무관하다는 전제에서 나온다. “인권과 무관한 사법행정의 쟁점들을 인권을 명분으로 관여 시도” “사법제도는 연구회의 전문분야인 국제인권법과 관련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러한 소모임(인사모)은 부적절함”. 피고인들은 법원행정처 문건과 법관 인사관리시스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문구들을 근거로 댄다.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사법제도 연구는 ‘법관 독립을 해치는지’의 관점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이것도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연구할 주제는 아니라고 했다. 지난 4월20일 재판에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측 변호인의 말이다. “사람 인(人)자가 들어가는 인권이 아니라 물권이나 채권, 재산권과 거래 자유 및 안전의 보장은 과연 독립된 사법으로 가능합니까? 현재 전문분야연구회는 국제인권법연구회 외에 14개가 더 있는데 어느 누가 과연 법관의 독립을 논의하고 있습니까? 양성의 평등이나 형사절차는 재판제도가 엉망이라도 보존됩니까?” 젠더법연구회나 형사법연구회는 법관 독립과 사법제도를 연구하지 않는데, 왜 국제인권법연구회만 그러느냐는 취지다.

연구회는 재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이지, 법관의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법원행정처의 대응이 법관의 자유 침해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연구회 제도가 만들어질 때 법원행정처에서 근무해 상황을 잘 안다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측 민병훈 변호사가 지난 4월23일 재판에서 말했다. “전문분야연구회는 사실은 본 변호인이 법원행정처에서 법관으로 재직할 때 제가 하자고 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최종영 전 대법원장님 취임 무렵에 법관의 향후 마스터플랜을 세우는 컨설팅 용역을 수행하면서 당시에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했던 ‘지식 관리’를 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 출발 때부터 법관의 동기·자긍심 부여와 법원 전체에 있어서의 지식 확보, 전문분야 연구의 역량을 강화하는 양쪽의 니즈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지, 오로지 법관의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만 (전문분야연구회가)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검찰은 반대 입장이다. “연구활동을 위해 법원행정처의 예산 지원을 받고 연구 결과물이 재판 업무에 활용된다고 해서 그 연구를 하는 법관들이 학문의 자유를 행사한 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법관들이 자유롭게 연구회를 선택하고, 자유롭게 연구하고, 연구 결과를 나누는 게 어떻게 학문의 자유와 무관하다는 것인지, 가장 이상적인 사법제도는 무엇인지를 인권 보장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연구하는 게 어떻게 전문분야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지…(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법관 독립을 위한 사법제도는 국제인권법 한 분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상고법원을 비판한다고 해서 인권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야말로 법원행정처의 주장일 뿐입니다.”(김현우 검사)

■ 독립된 법관의 인권 수호 역할

‘법관 독립’ 연구한 인권법연구회
유엔 인권 편람 “독립적 법조인들
인권보호에 본질적 역할” 규정
검찰 “인권보장을 위한 보루로서
사법제도 연구, 인권법 연구 맞다”

국제인권법과 사법제도 그리고 법관 독립은 정말 관련이 없을까.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14조는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공평한 법원에 의한 공정한 공개심리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독립적인 법원’은 사법부라는 기관 측면뿐만 아니라 법관이라는 개인 측면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당사국들은 이를 위해 제도적·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

유엔이 만든 ‘법률가를 위한 인권편람’의 서문에서 인권최고대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독립적인 법조인들은 인권 보호에 있어 본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권리가 침해된 개인이 효율적으로 국내법적 구제수단을 취할 수 있도록, 그리고 국제인권법이 적절하게 한 국가의 사법 과정에서 집행되도록 담보하는 국제인권법의 수호자입니다.” 이 같은 원칙에 따라 유엔은 당사국인 한국 정부에 법관 임명제도와 신분 보장에 관해 여러 차례 질문해왔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을 비롯해 법관에 대한 인사·평정권 등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로 인한 법원의 관료화, 법관 독립 침해가 문제돼온 상황에서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이를 연구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사법제도를 연구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판단은 일선 판사들이 아니라, 법원행정처가 내린 것이었다. ‘누가’ 판단했느냐는 문제는 곧 사법의 민주화와도 닿아 있다.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실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형연 전 판사(전 법제처장)는 ‘사법제도 연구가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테두리 안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지, 모임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지 않으냐’는 변호인 질문에 “그 테두리는 누가 정하는 겁니까”라고 반문했다.

같은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송오섭 판사는 인사모 활동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지는 이미 연구회 내에서 논의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인사모가 연구회와 맞는 조직이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법관 독립, 독립된 재판이 인권 옹호에 얼마나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는지, 국제인권규범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국내의 사법제도가 국제적 스탠더드에 맞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더 나은 제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송 판사)

법관의 호봉과 관련해 건의를 하자 윗선에서 부당한 인사조치를 했다며 방희선 전 판사가 이를 취소해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청구한 사건에서 헌재는 1993년 각하 결정을 했다. 그런데 당시 변정수 재판관이 소수의견에서 ‘법관의 자유’를 언급했다. “어떠한 기관에서나 구성원들의 의사표현의 자유는 충분히 보장돼야 하고 옳은 주장은 주저 없이 수용돼야 한다. 더구나 그의 직책의 본질이 정의 실현과 인권 수호에 있는 법관의 법원 내부에서의 의사표현의 자유는 -특히 법원행정에 대한 비판과 관련해- 어떠한 직업인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곧 사법의 민주화와 직결된다. (…) 피청구인(대법원장)으로서는 문제점을 지적한 청구인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권위의식을 버리고 겸허한 자세로 문제점을 검토해 시정할 사항이라면 주저 없이 시정하는 것이 사법의 민주화를 위해서나 인사권자의 권위를 위해서나 옳은 일이라 할 것이다.” 법원행정처가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 방안을 검토한 이유는 정말 연구 주제가 잘못됐거나 중복가입의 문제가 중대하게 커서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였을까.

‘양승태 법원행정처’의 인물들은 지금은 형사재판의 피고인으로서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이 정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법원행정처 문건엔 스스로도 연구회 예규 개정을 검토했던 부분이 담겨 있다. 2012년 기획조정실이 연구회 활동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차원에서 법원행정처장의 설립허가와 중복가입 금지 조항을 삭제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내용이다. 이때도 양 전 대법원장 재임 때다. 결국 이 규정들은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인 2018년 10월 개정됐다. 설립허가 대신 예산 지원 범위를 법원행정처장이 지정할 수 있도록 했고, 법관의 연구회 중복가입은 허용됐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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