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감동으로 작곡의 길을 걷게 됐어요"

박성준 2020. 9. 3.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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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무대에 작곡·대본 오페라 올리는 신예 작곡가 전예은

국립오페라단은 1년에 대여섯 작품만을 무대에 올린다. 국내 최고 무대답게 잘 알려진 고전 명작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올해는 창작오페라가 두 편이나 포함됐다. 지난주 호평 속에 초연된 ‘빨간바지’와 4,5일 초연 예정인 ‘레드슈즈’가 주인공이다. 클래식 음악의 위기를 이야기하지만 그만큼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가 쌓아온 내공이 작지 않음을 보여준다.

직접 곡과 가사를 쓴 창작 오페라 ‘레드 슈즈’를 국립오페라단 무대에 올리는 작곡가 전예은
게다가 ‘레드 슈즈’는 올해 35세인 젊은 작곡가 전예은이 작곡은 물론 대본까지 직접 쓴 작품이다. 오페라 세계에선 드문 일이다. 그 과정도 남다르다. 유망 예술가 육성 과정에서 만들어진 30분짜리 짧은 작품이 가능성을 인정받아 몇 단계 과정을 거쳐 국립오페라단에서 한국창작오페라 프로젝트로 위촉되기에 이르렀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아직 젊은 나이에 주어진 큰 기회에 대한 감사함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음악을 공부해왔지만, ‘오페라’라는 분야는 음악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대본, 무대, 의상, 조명 등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완성되는 ‘총체적 예술’인 만큼 이를 아우를 수 있는 작곡가의 경험과 연륜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창작오페라에 대한 국립오페라단의 관심과 지원에 작곡가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레드 슈즈’는 소녀가 주문 걸린 빨간 구두를 신고 계속 춤을 추다 결국 발을 잘라낸다는 안데르센 잔혹 동화 ‘빨간 구두’를 새롭게 각색한 오페라다. 욕망을 경고하는 단순한 내용을 전예은은 목사와 목사의 딸 카렌, 그리고 목사에게 배신당한 여인 마담 슈즈가 펼치는 욕망의 드라마로 현대화했다. 전예은은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창작오페라가 대중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에 익숙한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원작을 그대로 오페라로 만들어 보려는 의도로 시작했는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와 연결해 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고 동화 속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곡가로서 직접 원작을 각색하고 대본을 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많은 작품을 살펴보며 공부했고 또한 대본을 쓰는 과정에서부터 음악을 상상하며 극을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전예은은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돌아와 국내 활동 중이다. 서울시향 ‘아르스노바’ 위촉 작곡가로 활동하며 주요 음악제에서 작품을 발표했고 내년에는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위촉작품을 발표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클래식계가 기대를 거는 신예인데 음악가 길을 걷기로 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라고 한다. 그것도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음악이 준 감동이 길잡이가 됐다. 

“음악을 좋아해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가야금 등의 악기들을 오랫동안 배웠지만, 음악을 전공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악기를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고, 혼자 연주하는 것보다는 학교 내의 관현악반에 들어가 앙상블로 함께 연주하는 것이 더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클래식 음악들을 많이 알고 연주도 했었지만, 우연히 보게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통해 음악 때문에 극 분위기가 극대화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이야기에 음악을 입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작곡가라는 꿈으로 이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음악 전공을 꿈도 꾸지 않았다는 인문계 고등학생이 2학년 때 결심해서 서울대 음대에 진학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다. 전예은은 그저 “악기를 오래 배운 게 도움이 많이 됐고, 작곡은 공부로 풀어야 하는 부분이 많아서 늦게 시작했지만, 바짝 공부해서 그냥 들어가게 됐다. 원래 절대음감이기도 했고…”라고 말했다. “대여섯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는데 진짜 전공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즐기는 게 좋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선생님이 ‘어? 잘하는데? 예고를 준비해보자’하셔서 잠깐 한두 달해보니 다시 재미가 없어져 아예 그만둔 적도 있어요.”

오선지 위에 단단한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작곡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마법사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살아있는’ 클래식 작곡가는 이미 불멸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작곡가들과 경쟁해서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 활동 중인 조은화 작곡가는 최근 방한 기자회견에서 “어릴 때 ‘살아있는 작곡가가 있어?’하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서 (작곡을) 시작했다”며 “작업 환경에서 보자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작곡에만 몰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곡가가 작곡가로 살 수 있도록 어떤 여건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현재 생존해 있는 작곡가의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5일 네이버TV에서 무관중 생중계 예정인 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 ‘레드 슈즈’ 연습장에서 작곡가 전예은이 연습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이처럼 한국에서 ‘살아있는 작곡가’로 활동하는 어려움에 대해 전예은은 “힘든 건 맞는 데 좋아지고는 있다”면서도 “클래식 음악이 가요 등과 비교했을 때 점점 더 외면받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현실이 어렵지만)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어요. 작곡가들이 ‘조금만 더…’하면서 안간힘을 쓰는 건 사명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발버둥이라도 치고 노력해야지 단 한 명, 단 한 곡이라도 세계에서 알아주는, 무대에서 연주가 되는 작곡가와 곡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다 같이 발버둥 치는 것 같아요. 실제 진은숙 선생님 같은 좋은 본보기가 있으니깐요.”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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