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교동 골목-주택가와 출판 유통업체들의 공존 [골목내시경]

2020. 9. 2. 09:1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간경향]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4번 출구를 나서면 동교동과 서교동, 연남동 골목이 있다. 넓게는 홍대 문화권이지만, 홍대 인근과는 색다른 풍경과 문화가 있는 곳이다. 홍대 인근의 유동인구는 대략 10만명선. 국내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사람들의 밀집지역이고, 그 대부분은 젊은이들이다. 그러니 이 근처를 얼씬거리면 오늘의 젊은 문화를 눈여겨볼 수 있다.

동교동·서교동·연남동 일대는 출판사와 디자인 관련 산업 밀집 지역이다.

홍대 인근 골목길의 경향이 소비문화가 중심인 반면, 양화로 건너편 지역의 골목은 그 결을 달리한다. 골목마다 카페와 음식점이 있는 것은 비슷하지만 주류라기보다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 골목의 주인은 대부분 사무실과 주택들이다.

홍익대학교와 서교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상수역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이 청년문화의 중심이 된 것은 오래전부터이다. 인디밴드와 청춘 주점들, 버스킹과 힙합문화. 담장마다 스프레이로 그린 벽화들이 홍대 앞 골목의 색깔을 보여준다면 서교동에서 동교동 그리고 연남동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점잖다. 젊지만 청춘을 넘긴 사회 초년생의 문화를 보여주는 듯싶다.

경의선 철길은 숲길과 책거리길 등의 공원이 조성됐다.

의사·교수·기업체 간부들의 단독주택

과거 이 지역은 전형적인 중산층 주택가였다. 우리 사회에 적당히 자리 잡은 의사나 교수, 기업체의 간부급 인사들이 넓은 단독주택을 짓고 살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약간의 연립주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널찍한 단독주택들이 골목을 메우고 있다. 지금 그곳에 살던 이들은 대체로 강남이나 분당 등지로 거처를 옮겼고, 옛집들은 리모델링하여 사무실이나 가게터로 변했다.

골목길 곳곳에서 디자인 사무실이나 출판사 간판을 볼 수 있다. 또 그들이 한 곳에 모인 복합공간도 눈에 띈다. 이 지역의 골목골목에 5000개 이상의 출판 관련 업체들이 있다. 그중 출판사만 해도 2000개에 육박한다. 그야말로 국내 출판 관련 업체들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다.

연남동 골목은 맛집 순례객들의 명소이다.

출판사 중엔 1인 출판사로 시작하여 성장에 성공한 곳도 있으나, 대부분은 10년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 출판 편집자로 월급을 받으며 일하다가 일머리가 생길 무렵 욕심을 일으켜 출판사 창업을 하고, 한두 권 베스트셀러를 내거나 그마저도 만들지 못하며 버티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출판업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창업은 쉬우나 성공은 점점 어려운 현실이다. 대형 출판사 편집자를 거쳐 소규모 출판사 사장이 된 이는 “그래도 유명한 저자를 잡으면 기본은 하고, 또 주목받으면 금세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이 있다”고 말한다.

팟캐스트에서 유명한 여행전문 독립서점도 연남동 책방거리의 주인공이다. 여행작가들과 만날 수 있고, 여행 관련 다양한 책들도 볼 수 있는 특색이 있다. 골목을 헤매다 보면 문학 전문 서점도 만날 수 있고, 음악 관련 전문 책방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독립출판물을 다루는 전문 서점과 인문학 관련 서점이다. 대형서점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책들의 보물창고이다. 전문성으로 무장한 동네서점이 골목을 돋보이게 한다.

골목 안 음식점은 전 세계 식단을 모두 볼 수 있다.

이 지역이 출판사 밀집지역으로 된 것은 20여년 정도. 홍대 인근에 디자인 사무실과 출력실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마포 용강동 등지에 출판 유통업체들이 있었고, 연이어 동교동과 서교동 지역에 소규모 출판사들이 하나둘 둥지를 틀면서 지금과 같은 출판 밀집지구가 됐다. 대형 출판사와 인쇄소들이 파주 교하출판도시와 파주 일대, 일산 장항동 등으로 가면서 이곳에서 출판도시로 가는 직행버스도 생겼다. 아침에 그쪽 출판사로 출근하는 이들이 길게 버스를 기다리는 줄도 보이고, 낮에도 교정용지 봉투를 들고 파주로 향하는 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새벽에는 파주 쪽에서 책을 싣고 달려오는 트럭들이 골목골목 들어온다. 큰길을 따라 대형서점들이 들어서 있고, 골목 안에는 북카페들도 눈에 띈다. 한마디로 책이 만발한 골목이다.

잘 꾸민 단독주택을 살펴보면 디자인 회사 간판이 걸려 있다. 디자인 상품을 파는 가게를 겸한 곳도 있고, 사진 스튜디오도 골목 안에 흔히 보이는 업종들이다. 출력실들은 예전만큼 눈에 띄지 않고 간간이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 몇 개 보인다. 홍대 인근이라는 특성상 합주실과 인디음악을 다루는 사무실도 눈에 띈다. 관련 업종 종사자들이라 그런지 이 골목의 행인들은 유난히 독특한 차림이 많다. 한마디로 깔끔한 골목에 색색이 아롱다롱 보기 좋은 정경이 펼쳐진다.

경의선 책거리 공원엔 버스킹공연

동교동·서교동을 시발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가 있어서 출판·음악·방송·게임 등 콘텐츠 생산과 유통에 특화된 지역이 펼쳐지고 있다. 문화산업의 특성상 종사자들은 젊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짙어 골목 곳곳에 그런 분위기가 배어들고 있다.

골목 안에는 다양한 건물들이 있다.

과거 동교동은 국내 정치의 풍향계 역할을 하던 김대중 대통령의 사저가 상징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별다른 감흥 없는 김대중도서관이 옛 흔적을 지키고 있을 뿐 동교동은 단지 ‘힙한’ 유행의 골목길일 뿐이다. 대신 이 지역의 상징물은 경의선 책거리 공원이 됐다. 옛 경의선 철길을 공원으로 꾸미고, 출판문화를 상징하는 책거리로 만들었다. 잘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또 다른 숲길 공원이 나온다.

공원을 따라서 늘 버스킹공연이 열리고, 빈 공간에는 반짝 장이 서는 플리마켓이 펼쳐지고 있다. 공원이 또 다른 문화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덕분에 더 많은 젊은이가 몰려오는 효과가 있다. 공원 양옆으로 오래된 주택가 복잡한 골목 안에는 맛집으로 유명한 카페와 빵집들이 골고루 숨어 있고, 사회관계망을 따라 찾아오는 사람들의 행렬도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래 문 닫은 집들이 여럿 보인다. 새로 가게터를 얻으려는 젊은이인 듯, 문 닫은 가게를 열고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삼겹살보다는 등심을 이용한 요리가 더 나을 것 같다. 재료비도 삼겹살보다는 저렴하고 레시피에 따라 새로운 유행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나.” 동업자인 듯한 젊은이들의 대화는 사뭇 진지했다. 불황과 위기의 시기가 닥쳤어도 삶은 지속되고 생계는 가혹하게 어깨를 누르고 있다.

연남동 쪽의 골목을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반짝이는 장신구처럼 돋보인다. 젊은 손님들이 반쯤 누운 듯 앉은 듯 게으른 시간을 보내는 모습도 보이고, 출판사 직원인 듯 노트북과 원고 뭉치를 펼치고 진지한 시간을 감내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낮에도 카페 안은 어둡고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자기 앞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음식점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다. 연남동에서 연희동으로 넘어가는 골목은 중국 음식이 주류를 이루고, 연남동 쪽 골목엔 젊은 취향의 서양식 메뉴판도 눈에 띈다. 간간이 유명 셰프의 가게도 있다. 푸짐한 고깃집도 있고 막걸리와 전을 파는 술집도 눈에 띈다. 전 세계 맥주를 선보이는 맥주카페도 볼 수 있고, 양조 맥주를 파는 집도 있다. 옌볜식 양꼬치는 물론이고 멕시코 음식과 포르투갈식 안주를 파는 곳도 있으며, 타이 음식과 베트남 식당은 기본이다. 음식으로 세계 일주를 하고 싶으면 멀리 갈 필요 없이 이 구역 골목길만 맴돌아도 충분할 것이다.

경의선 숲길 공원은 버스킹과 플리마켓 공간이 됐다.

골목 생태계의 바람직한 공존 모습

골목 안 건물 형태는 다양하다. 어느 골목은 넓은 단독주택들이 있고, 어떤 골목은 연립주택 단지가 펼쳐진다. 또 다른 골목으로 접어들면 3~4층 높이로 새로 올린 소규모 빌딩들이 보인다. 리모델링으로 반짝반짝한 사무실 건물들이 줄을 이으며, 또다시 오래된 무채색의 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니 골목 생태계는 풍부하다. 슬리퍼를 끌고 느리게 걷는 동네 주민과 서류 봉투를 들고 잰걸음으로 바쁜 젊은이와 레게풍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는 문신투성이의 예술가를 한 골목에서 볼 수 있다.

다들 제각기 자기 위치에서 살아가느라 골목에 대한 불만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부동산 업자 말로는 “아직 개발할 여지가 많다. 단독주택들 평수가 넓어서 리모델링하여 사무실로 임대하면 높은 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늘 수요가 많고, 교통과 주변 환경이 좋은 곳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시작된 불황 탓에 비어 있는 사무실도 많아 보이고 ‘임대’ 표지를 붙인 가게 터는 더 많아 보인다.

경의선 철도 숲길 옆의 옷가게 주인은 “유행의 첨단을 보려면 강남과 명동을 가서 살피고, 튀는 유행은 홍대 인근에서 살필 수 있다. 그런데 젊은이들에게 잘 먹히는 트렌드는 이 지역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먹히는 옷은 튀지도 않고 너무 앞서지도 않아 적당히 젊은 패션이다. 옷뿐만 아니라 카페나 식당도 이 지역이 트렌드의 좌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적당히 깔끔하고 적당히 튀지 않고 적당히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지역에 흔한 우리 출판계의 풍조도 그런 모습이 아닌가 납득이 됐다.

동교동·서교동·연남동 일대 골목을 걷다 보면 우리 도시의 다양성과 만나게 된다. 은근히 서로 다르고 얼핏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생존의 방식을 볼 수 있다. 유행에 뒤처지지도 않고 너무 튀지도 않는 도시인의 모습이 있다.

그럼에도 이곳 골목길은 어느 곳보다 건강하다. 골목 생태계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주택지와 일터, 상업지역이 서로 배척하지 않고 다양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행인 하나 볼 수 없는 적막한 거리가 아니라 동네 주민이 의자를 놓고 부채질하면서 젊은 취객을 안쓰럽게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주말엔 공원 주변에서 각자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는 예술가들도 볼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취객은 시끄럽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지나친다. 낮에는 일터를 바삐 오가는 젊은이들로 골목이 분주하다. 그 사이사이 카페와 음식점을 순례하며 유행을 소비하는 이들도 보인다. 이 모두가 한 골목 안에서 이루어지는 풍경이다.

언제부터인가 골목은 도시계획의 구분으로 구획되기 시작하여 다양한 맛과 꼴을 잃었다. 주택가, 상업지구, 준상업지구 등으로 천편일률이 됐다. 그러나 적당히 섞여 살고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 서교동·동교동·연남동 일대의 골목길이다. 적어도 문화산업이 주류를 이루는 골목이라 이런 모습이 더 적절해 보인다. 생태계는 다양할수록 건강할 터이니, 이 동네 골목은 활발한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

인기 무료만화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