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열기구 타고 구름 사이로~따스한 환대의 나라 터키

2020. 8. 28.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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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유적지 터키 카라반세라이
이방인 환대하는 이들이 지구의 희망
카파도키아 지역을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열기구들. 사진 신동신 피디 제공

“환대란 시(詩)적인 행위다.”

손님의 이름도 묻지 않고, 보답도 바라지 않으며, 모든 것을 주는 환대를 ‘절대적 환대’라 불렀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이다. 그는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환대로 충만한 세계를 희망했으며, 환대가 사라지는 세계를 안타까워했다.

2004년 지구의 문지방을 넘어 그는 다른 세계로 떠났다. 그가 다른 세계에서 어떤 환대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궁금해진다. 코로나19로 이방인(손님)을 적대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2020년을 살고 있다면 어떤 말을 할지….

철학자는 세계를 분석하고, 혁명가는 세계를 변화시키며, 여행자는 세계를 떠돈 경험을 나눈다. 환대가 젖과 꿀처럼 흐르던 날의 경험을…. 터키에서 받았던 환대는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터키는 한일 월드컵 기간 중 더욱 친해진 나라, 한국전쟁 때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터키인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실제 그들의 조상은 가까운 이웃이었다. 고대 역사서에 등장하던 ‘돌궐족’ 말이다. 이들은 고구려, 중국, 몽골과 충돌하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했고, 이윽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다. 오스만 튀르크. 그 후 전성기를 지나 1차 세계대전과 독립전쟁 등 복잡다단한 과정을 겪은 후 1923년에 세운 신생공화국이 현재의 터키(Turkey)다. 투르크의 땅, 돌궐족의 나라.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이 묵던 카라반세라이는 터키 악사라이에 현존 최대 규모가 남아있다. 사진 신동신 피디 제공

20대 말의 첫 터키 방문 이후 18년 만에 다시 터키를 찾았다. 여행 다큐멘터리 촬영 팀과 함께인 터라 짧은 기간에 여러 도시를 방문해야 했다. 이스탄불, 에디르네, 부르자, 안탈야, 코니야…. 20일 만에 10여개 도시를 방문했으니 이동의 연속이었다. 여행이 아니라 그림책을 들춰보는 기분이 되기 십상이었는데, 마음을 온통 휘젓는 장소가 하나 있었다.

터키 중부 악사라이를 지날 때였다. 현지 코디네이터인 박광희씨가 말했다. “근처에 실크로드 유적이 있어요. 가볼래요? 촬영 계획엔 없지만 짬을 낼 순 있어요.” 눈이 번쩍 떠졌다. “유적 이름이 뭐죠?” “카라반세라이입니다.”

카라반세라이는 ‘상인들’을 뜻하는 ‘카라반’(Caravan)과 ‘저택’을 뜻하는 ‘세라이’(Serai)의 합성어로, 조선의 객주와 닮았다. 시대와 10000㎞ 넘는 장대한 길 위라는 게 다를 뿐. 비단(로마인에게 비단으로 만든 옷은 부를 자랑할 수 있는 최고 명품이었다.)과 더불어 보석, 향신료 등 값비싼 물건을 낙타 등에 싣고 이동했던 대상은 늘 강도 떼의 표적이었다. 낮 동안 20~30㎞를 이동하고 해가 지면 카라반세라이에 깃들었다. 숙박·위탁판매·물물교환·경호업무 등 무역상이 필요한 모든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심지어 사흘간 숙식은 무료였으니, 당시 이방인들로 들끓는 카라반세라이만큼 재밌는 장소가 있었겠는가?

화산 폭발과 지진에 이어 홍수와 바람이 만들어낸 카파도키아 지역의 기암괴석들. 사진 신동신 피디 제공

악사라이 소재 카라반세라이로 들어섰다. 수용 인원 3000명, 현존 카라반세라이 중 최대 규모라고 했다. 짐 실은 낙타가 들고 날 수 있는 높이 13m의 문, 닫으면 그 자체로 요새였다. 안마당을 가로질러 낙타들이 쉬던 방으로 갔다. 유적 방문 시 나만의 습관이 있는데, 첫 번째 유물 앞이나 마음에 드는 자리에서 환청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낙타를 묶던 기둥 사이를 걷노라니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낙타 울음소리, 각 부족어로 떠드는 짐꾼의 대화. 환청을 따라 마당으로 나왔다. 나무 위에선 새들이 짹짹거렸고, 각지에서 온 이방인들이 피로를 달래기 위해 저마다의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고, 합주를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맛본 최고의 환청이었다.

카라반세라이의 기원은 ‘로열로드’(Royal Road)의 역이다. 2500년 전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를 동서로 잇는 고속도로를 만들었고, 2700㎞의 왕도는 훗날 중국 시안을 잇는 무역로로 활용되면서 실크로드에 흡수되었다. 헤르도토스에 따르면 왕도를 따라 여러 역이 존재했으며 오가는 이의 피신처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카라반세라이는 12~13세기를 거치며 수백개로 불어났다.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 덕분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꽃을 피운 것처럼 ‘카라반세라이’가 없었다면 실크로드도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며 여러 문화를 접한 튀르크인은 이방인을 환대했으며, 손님을 ‘하늘이 준 선물’로 여겼다. 그들의 정신적 유산은 현재의 터키인으로 이어졌다.

악사라이에서 괴뢰메로 가던 길, 삼륜트럭이 우리가 탄 차량 곁을 지나갔다. 신동신 피디가 얼른 통역을 부탁해 운전사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빈자리에 한사람 태워줄래요?” 운전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뒷좌석에 나를 태운 운전사는 마을로 들어섰고, 뜻밖의 장소에 섰다. 미리 섭외를 해도 이처럼 규모가 큰 양떼몰이를 접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괴뢰메 마을의 아침, 한가운데 대표적인 유적인 우치히사르 바위성이 보인다. 사진 신동신 피디 제공

1000마리에 이르는 양떼가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몰려오고 있었다. 사내들은 양떼를 몰고, 아이들은 어미양이 달아나지 않게 끌어안고, 여인들이 젖을 짰다. 장관이었다. 사람이 먹을 젖을 짠 후 양치기가 새끼 양떼를 몰고 왔다. 구름 같은 양떼, 어미젖을 찾는 새끼양의 울음소리. 한바탕 소동이 잦아들고 한 여인이 내게 양젖이 담긴 병을 내밀었다.

“한번 맛을 보실래요?”

“우와 정말 신선하고 고소해요!”

“하하하, 우리 집에서 간식이라도 들고 가세요.”

이방인을 스스럼없이 초대하는 사람들. 온 가족이 환영했고 양젖으로 치즈를 만드는 과정이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빵 에크멕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은 정주해 살지만 일상 곳곳에 유목민 문화가 남아있었다. 손님의 이름도 묻지 않고, 보답도 바라지 않는 환대도.

“내가 양털로 짠 양말이에요. 무척 따뜻하죠. 선물로 드릴게요.”

그들은 자고 가라고 했다. 터키인 집집마다 침대로 변하는 소파를 갖고 있었다, 손님을 재울 수 있게. 우리의 별 대수롭잖은 언행에도 웃는 가족과 밤새워 어울리고 싶었지만 촬영 일정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와요. 며칠이든, 몇 달이든 머물러도 좋아요!” 작별 키스를 나누고 차량에 오르자 박 코디가 시동을 걸며 말했다.

“도시는 다르지만 시골을 여행하면 곳곳에서 이런 환대를 받을 수 있어요. 몇 마디 터키어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더욱 반긴답니다. 차비만 있으면 몇 달이고 이런 식으로 여행할 수도 있죠.”

터키 악사라이 지역에서 양젖 짜는 가족들. 사진 신동신 피디 제공

괴뢰메는 ‘요정의 굴뚝’이란 별명이 붙은 기암으로 유명한 마을. 300만년 전 화산 폭발과 지진 이후 홍수와 바람에 풍화된 대지가 협곡으로 변했고, 수많은 기둥이 생겨났다.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은 날카로운 돌이나 금속제 도구로 쉽게 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집을 팠다.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동굴 집을 떠나는 주민이 늘었지만 여전히 동굴 집에서 사는 이들이 있고, 여행자를 위한 숙소로 개조되기도 했다.

오전엔 열기구를 타고, 점심엔 우치히사르 성을 둘러보고, 오후엔 버섯 모양으로 치솟은 기암괴석 배경으로 촬영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갓길 따라 당나귀 수레를 몰고 가는 농부를 발견했다. 당나귀 수레 탄 풍경은 분명 다큐멘터리를 더욱 돋보이게 할 터, 신 피디가 급히 말을 걸었다. “뒷좌석에 잠깐 타도될까요?”

돌아온 대답은 삼륜트럭 운전사와 딴판이었다. “타고 싶으면 돈부터 내!” 노인은 탑승료로 우리 돈으로 치면 5000원 정도를 요구했다. 결국 값을 치르고 올라탔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의 심술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다. 예상 밖 전개에 놀라워하며 그를 따라갔다.

할머니께선 우리를 반겼고 저녁 식사를 차려 주었다. 할아버지는 꿀처럼 단 건포도를 자랑하더니 한 아름 안겼다. 그리곤 온 김에 자고 가라고 했다. 이번에도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현관을 나서는데 할아버지가 꽃을 꺾어 내밀더니 이별가를 불렀다. “꼭 다시 와!” 할아버지의 눈은 젖어 있었고, 그 때문에 내 눈자위도 물렁물렁해지고 말았더랬다.

환대가 사라져 가는 올해를 견디며 지구 곳곳에서 받은 환대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다 문득 20세기 철학자가 ‘절대적 환대’를 논하기 750여년 전 이미 터키에선 ‘절대적 환대’를 노래한 시인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잘랄루딘 루미는 <여인숙>이란 시에서 말했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라.’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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