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미있는 역사]1940년대 학교에선 한글과 우리 역사를 배울 수 없었어요

2020. 8. 19.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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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 사용 금지령' 내려져 모든 수업을 일본어로 교육
숙제는 풀 베고 솔뿌리 채취.. 공부보다 농사일 시켰어요
일제강점기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에 실린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홍보하는 삽화. 일제강점기 국민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에게 일본 말과 역사를 가르치고 고된 노동을 시켰다. 동아일보DB
광복(해방) 이전에는 현재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불렀습니다. 국민학교 명칭이 초등학교로 바뀐 건 1996년이죠. 일제강점기 국민학교 학생들은 어떻게 생활하다가 광복을 맞이했을까요? 1940년대 국민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의 일상에 대해 알아보고, 이들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학교 생활은 어땠을까

일제강점기 국민학교는 오늘날과 같이 6년제였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대부분 조선식 옷이나 검정 학생복을 입고 고무신 혹은 일본식 나막신을 신었습니다. 1학년 학생이 첫 시간에 한 일은 무엇일까요? 담임 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일장기(일본 국기)를 종이에 그리고 일왕에 대한 설명을 듣는 일로 학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말 사용은 금지됐습니다. 일본어로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모든 학생의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1940년대 국민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로 배웠기 때문에 한글을 읽고 쓰지 못했고, 점차 친구들과 사용하는 말도 일본어를 사용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한 교육도 금지되었으며, 국사로 일본사를 배웠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철저하게 일본인이 되는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다 보니 1940년대 학교에 다녔던 학생들은 광복 이후에야 처음으로 학교에서 한글과 우리 역사를 배웠습니다.

학생들에게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행사가 강요됐습니다. 학생들은 매월 8일이 되면 학교 주변에 있는 일본 신사까지 걸어가서 궁성요배(일왕이 사는 곳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를 했습니다. 운동장에서 열리는 조회 시간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고 교장의 긴 훈화를 들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움직이지 않고 긴 훈화를 듣다가 학생이 쓰러져도 훈화는 계속되었습니다. 교사들은 어린 학생도 군인처럼 훈련을 받아야 한다며 인고단련(忍苦鍛鍊·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자신의 몸을 튼튼하게 훈련함)이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학교에서 인고단련을 강조하며 한 행사 중 하나는 소풍이었습니다. 당시 소풍은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교장의 훈화를 듣고 약 10km를 걸어서 갔습니다. 학생들은 도시락을 준비해 2∼3시간 걸어서 경치 좋은 곳으로 갔습니다. 경치를 감상하고 도시락을 먹은 뒤 다시 걸어서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소풍은 현재 군인들도 어려워하는 ‘행군’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중학생들은 무거운 배낭과 총까지 들고 군인처럼 행군을 했으며, 소풍지에 도착하면 학교에서 배운 군사훈련을 바탕으로 총검을 들고 언덕을 오르내렸습니다. 중학생 이상은 군인과 학생의 경계가 모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을 강요받은 학생

어린아이들에게 괴로운 숙제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여름철에는 학급별로 퇴비장을 만들고 등교할 때 풀을 베어 오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어린 학생이 가방 대신 지게를 지고 등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반별로 경쟁이 일어나고, 실적이 부진한 학급은 벌을 받았지요.

방학 중에는 여러 가지 노동을 숙제로 해야 했습니다. 1943년 여름 방학 때는 관솔(송진이 많이 있는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이나 솔뿌리 한 가마니를 만들어 개학 때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부과된 숙제였습니다. 관솔과 솔뿌리 채취는 수업 시간에도 진행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소나무가 많은 산에 올라 반별로 정해진 양을 채취하고, 도시락을 먹은 뒤 자신들이 채취한 솔뿌리와 관솔 등을 지게에 지고 학교로 걸어와야 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한 학생들이 나막신을 신고 지게에 짐을 진 채로 산길을 내려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정해진 작업 양을 채우지 못하면 도시락을 먹을 수 없어서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었습니다. 체격과 체력이 달라도 일률적으로 부과된 노동의 양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일제는 이렇게 모아진 관솔이나 솔뿌리를 이용해 송근유(松根油)를 만들었습니다. 송근유는 항공기의 연료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연료의 효율이 많이 떨어져 사용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광복 직전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지역의 소나무들이 수난을 당했고, 당시 소나무에 난 상처는 아직도 전국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 및 학교 주변의 땅에 각종 농작물을 심어 재배했습니다. 농사에도 동원되었습니다. 성인 남자들이 징용, 징병으로 끌려가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전쟁 말기 방공 훈련이 빈번하게 이뤄지면서 학생들은 폭격에 대비해 주변의 산이나 건물 주변에 방공호를 팠습니다. 흰옷은 눈에 잘 뜨인다고 하면서 검은색으로 염색하도록 하였습니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군인처럼 보였겠지요. 야간에 울리는 공습경보, 그리고 비행기 소리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광복의 의미

1945년 8월 15일 일왕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본의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믿기 어려워했고, 방송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5일에 광복의 기쁨을 표현한 사람은 드물었고, 16일부터 조심스럽게 기쁨을 표시하다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가 쓴 ‘나의 해방 전후’라는 책에는 광복의 기쁨에 대해 인상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광복 후 며칠이 지난 다음 담임 선생님이 친구들의 이름을 출석부에 기록하고 한 명 한 명 확인하며 한글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기억입니다. 유종호와 친구들에게 있어서 최초의 광복은 담임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불러주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물론 노동성 숙제나 각종 행사가 많이 사라져 더 좋았겠지요.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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