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된 임시 거처..사람 살 수 있을까 싶은 곳에 그들이 산다

김희진·조문희·오경민 기자 2020. 8. 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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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이재민 대다수가 이주노동자..폭우에 더 취약
이주노동자들 대부분 논밭 위 비닐하우스·가건물에 거주
"농축산어업 특히 심각..노동부, 가건물 숙소 인정도 문제"

[경향신문]

열악한 환경 경기 안성시 일죽면의 한 농장주가 10일 이주노동자들의 숙소를 보여주고 있다. 폭우로 물이 들어찼던 이곳은 최근 배수작업을 마쳤지만, 아직 거주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사론(22)은 지난 3월 혼자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왔다. 부모님과 동생 등 여섯 식구에게 보낼 돈을 벌기 위해 경기 안성시 한 농장에 일자리를 구했다. 지난 2일 폭우가 내리며 농장이 물에 잠겼다. 사론이 생활하던 농장 근처의 비닐하우스 속 컨테이너 숙소에도 물이 들어찼다. 한순간에 지낼 곳도, 일감도 잃었다. 그는 안성시가 마련한 대피소로 지난 7일 이동했다. 약 13명의 이주노동자가 대피소로 모였다.

10일 대피소인 안성시농민문화체육센터에서 회색 운동복 차림의 사론을 만났다. 그는 임시천막과 빨랫줄에 널린 빨래 옆에서 지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맨발에 신고 있는 슬리퍼에는 마른 진흙이 묻어 있었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론과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물에 잠긴 집을 봤을 때 불행했다”며 “원래 지내던 집은 농장과 가까웠지만 쓰레기가 많았다. 그래도 대피소보다는 집이 낫다”고 말했다.

전국을 강타한 기록적 폭우의 피해가 주로 농촌에 집중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취약한 주거환경에 놓여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피해가 크다. 농촌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다수는 논밭에 위치한 비닐하우스나 컨테이너 숙소에 살고 있다.

안성에서 야채농장을 운영하는 고진택씨(51)도 농장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9명을 모두 대피시켰다. 지난 2일 배수로에 물이 들어차기 시작하면서 농장과 함께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던 숙소가 침수됐다. 농장 한쪽, 검은색 그물망이 씌워진 비닐하우스가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비닐하우스 안 컨테이너 방 두 개와 화장실을 5명이 사용했다. 침대, 에어컨, 냉장고를 구비해 겨우 방 모양새를 갖췄으나 지난 2일 허벅지 높이까지 물이 찼다.

가구를 모두 빼낸 뒤 수도꼭지만 남아 있는 컨테이너 내부는 사람이 살던 방으로 보기 어려웠다. 물을 빼낸 숙소에는 물이 들어왔던 높이만큼 흙탕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컨테이너 앞에는 물에 젖은 작업복과 장판이 널려 있었다. 계속되는 비에 배수작업 속도가 더뎌지자 이주노동자 5명은 ‘하루라도 돈을 안 벌 수 없다’며 다른 농장을 찾아 떠났다.

고씨는 “20년 전 기자재를 보관하는 용도로 지어진 공간이었으나, 외국인 인력이 들어오면서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게 됐다”며 “복지를 생각한다면 수해를 입은 이곳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다. 임시 거주시설이라도 마련해야 하지만, 인건비를 주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경기 이천시에서는 폭우로 인해 주거공간을 잃어버린 이재민 중 절반 이상이 이주노동자로 파악됐다. 이 지역은 지난 2일 내린 비로 율면 산양저수지가 붕괴되며 이재민이 발생했다. 물에 잠긴 산양리 근처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숙소도 비닐하우스 내 컨테이너가 다수였다. 이천시 재난상황실에 따르면 10일 율면 실내체육관과 율면고등학교에 대피한 이재민 172명 중 118명이 외국인이다.

이주와인권연구소가 지난해 2월 내놓은 ‘2018년 이주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주거환경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농축산어업 이주노동자 중 94.8%가 사업주가 정해주거나 제공하는 숙소에 거주한다고 답했다. 그중 작업장 부속 공간이나 가건물 등 임시 주거용 공간에 산다고 답한 비율이 55.4%였다. 농축산업의 경우 조립식 패널이나 컨테이너로 지은 가건물 비율이 36.7%로 다른 업종에 비해 높게 나타났다. 송은정 이주노동희망센터 사무국장은 “제조업 등과 비교했을 때 농축산어업 쪽 이주노동자의 주거환경이 특히 열악해 호우 피해도 크다”며 “비닐하우스는 집이 될 수 없음에도 노동부가 이를 숙소로 인정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김희진·조문희·오경민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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