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55] 교회 첨탑에 불이 켜지자 시민들은 자유를 위해 말을 달렸다

보스턴/송동훈 문명탐험가 2020. 7. 8.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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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노스 처치와 폴 리비어

보스턴의 상징과도 같은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은 자유를 향한 투쟁의 기록인 동시에 자유를 위해 싸웠던 전사(戰士)들의 방명록이다. 새뮤얼 애덤스가 가장 돋보였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보스턴의 혁명을 이끌었던 건 아니다. 그에겐 동지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폴 리비어(Paul Revere 1734~1818)다. 프리덤 트레일의 여정에 유일하게 포함된 개인 주택의 소유자다. 가장 유명하고 낭만적인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유일한 기마상의 주인공 폴 리비어

폴 리비어의 집(Paul Revere House)은 프리덤 트레일에서 '자유의 요람(Cradle of Liberty)'이라 일컫는 패뉼 홀(Faneuil Hall) 다음 순서다. 눈길을 끈다.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건물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암회색 목재로 지어진 2층 집이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 식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300년 넘는 세월을 견뎌냈으니 건물 자체로도 유산이다. 그러나 폴 리비어가 집주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껏 버틸 수 있었을까? 그곳에서 하노버 스트리트를 따라 북쪽으로 300미터쯤 올라가면 기마동상이 나타난다. 한참을 달려온 듯 말은 가쁜 숨을 내쉬고, 기수의 표정은 심각하다. 폴 리비어다. 프리덤 트레일은 기마상에서 붉은 벽돌 위로 하얀 첨탑이 인상적인 멋진 교회로 이어진다. 올드 노스 처치(Old North Church). 역시 폴 리비어와 관련돼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영국의 압제로부터 시작된다.

영국과의 충돌이 임박하다

보스턴 티 파티(1773년 12월)에 대한 여론은 식민지인들 사이에서도 좋지 않았다. 비록 인기 없는 동인도회사 소유 차(茶)를 바다에 버린 것이었지만, 재산권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영국 정부가 유화적이고 합리적으로 나왔다면 식민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되찾아 올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반대로 행동했다. 보스턴 티 파티에 관련된 사람들을 '폭도'로 규정했고, 보스턴 시에 배상을 요구했다. 국왕 조지 3세는 정부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지시했다. 영국 의회는 보스턴을 봉쇄하고 매사추세츠주를 굴복시키기 위한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1774년). 식민지인들은 이 법안들을 '참을 수 없는 법안들'이라 이름 붙였다. 식민지의 자유와 자치가 백척간두에 섰다. 타협의 여지는 사라졌고, 무력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에 위치한 폴 리비어의 기마 동상. 그 뒤로 보이는 높은 첨탑의 교회가 올드 노스 처치로. 독립전쟁 전야에 영국군의 진격을 알리는 랜턴(등)이 걸렸던 곳이다.

보스턴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토머스 게이지(Thomas Gage 1718~1787년) 장군에게 런던의 밀명이 도착한 건 1775년 4월 14일이었다. 국왕과 내각은 보스턴의 반란 주동자 체포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게이지 장군에게 명했다. 보스턴 현지의 엄중한 상황을 몰랐던 런던의 책상물림들은 게이지 장군에게 내린 명령을 어려운 임무라고 생각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런던의 정책 결정자들은 식민지인들을 아무런 계획도 없고, 연대도 없는 '무식한 오합지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해 말 달리다

게이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행동해야 했다. 그는 렉싱턴과 콩코드를 타깃으로 정했다. 혁명 지도자인 새뮤얼 애덤스와 존 행콕이 은신해 있고, 반란군의 무기가 숨겨진 곳이었다. 몇 개월 전부터 혁명 세력도 영국군의 군사행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스턴 전역에 소위 감시자들을 배치해 영국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폈다. 폴 리비어는 감시 조직의 책임자였다. 그는 보스턴의 성공한 은세공업자이자 판화가였다. 폴 리비어는 독립을 지지하는 열렬한 애국주의자로 애덤스, 행콕의 정치적 동지였다. 또한 보스턴 장인 사회의 존경받는 리더였다. 애덤스와 행콕이 영국군을 피해 보스턴 외곽으로 도피한 상태에서 도시를 책임져 줄 적임자였다.

보스턴에서 렉싱턴-콩코드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처음부터 육로를 통해 가거나, 바다를 통해 찰스턴에 내린 후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후자가 훨씬 가까웠고, 대량 수송에도 편리했다. 폴 리비어는 영국군의 진격을 렉싱턴-콩코드에 빠르게 전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올드 노스 처치의 가장 높은 곳에 랜턴(Lantern·등)을 달기로 했다. 육로로 움직이면 한 개, 바다로 이동하면 두 개. 랜턴이 걸리면 영국군의 이동을 알리는 파발마들이 여러 곳에서 렉싱턴과 콩코드를 향해 달릴 터였다. 4월 18일 깊은 밤, 드디어 올드 노스 처치 꼭대기에 랜턴이 걸렸다. 두 개였다. 폴 리비어는 작은 배를 타고 찰스턴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부터 말을 타고 렉싱턴을 향해 내달았다. 그 유명한 '한밤의 질주(Midnight Ride)'의 시작이었다. 가는 동안 폴 리비어는 주민들에게 영국군의 진격을 알렸다. 렉싱턴에 도착한 폴 리비어는 애덤스와 행콕을 깨웠고, 그들을 무사히 콩코드로 피난시키는 데 성공했다. 본인은 콩코드로 가는 도중 영국군 순찰대의 검문을 받아 되돌아와야 했지만, 그는 의무를 다한 후였다.

자유를 위한 신화로 남다

이날 영국군의 작전은 실패했다. 폴 리비어를 비롯한 전령들의 활약으로 혁명 리더들은 피신에 성공했고, 민병들은 속속 콩코드로 모여들었다. 작전 개시 다음 날인 4월 19일, 렉싱턴과 콩코드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첫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미국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건 식민지 민병대였다. 런던의 내각이 오합지졸이라 무시했던 식민지 민병들이 천하무적이라 자부하던 영국 정규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전의 승리였고, 그 주역은 폴 리비어였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폴 리비어는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미국과 함께 성장했다. 은세공업자에서 산업혁명 초기의 기업가로 변신했다. 그의 공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 사회에 필요한 교회용 종과 군대용 대포를 비롯한 각종 제품을 생산했다. 그는 혁명 동지였던 애덤스나 행콕 등과 달리 정치에 투신하지 않았고, 평생을 기업가로 살았다. 정치가의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은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위대한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년)가 'Paul Revere's Ride'(1860년)란 시(詩)를 쓰기 전까지는. 폴 리비어의 스토리는 롱펠로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어 한 편의 시가 됐다. 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지며 신화가 됐다.

시는 비록 폴 리비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한 사람만을 영웅시하기 위한 작품으로 읽히진 않는다. 폴 리비어와 함께 자유라는 대의(大義) 앞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한 세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위대한 사회와 강한 국가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누군가 대의를 위해 싸우고 희생하기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용기있는 자에 '은빛 랜턴' 케네디 재단 제정… 오바마도 賞 받아

20세기 보스턴과 매사추세츠를 대표하는 정치가는 미국의 35대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였다. 그는 자유와 진보, 인권과 우주개발의 상징이었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케네디 도서관 재단은 1990년 'Profile in Courage Award'를 제정했다. 상의 이름은 케네디에게 퓰리처상의 영광을 가져다준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이란 책 제목에서 따왔다. 선정 기준은 여론의 반대나 지엽적인 이해관계에 맞서 자신의 경력을 걸고 더 큰 대의를 추구했느냐에 있다.

케네디 대통령(35대)의 딸인 캐럴라인 케네디가 오바마 대통령(44대)에게 ‘Profile in Courage Award’를 수여하고 있다. 그녀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주일 미국대사로 활약했다.

선정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빛나는 은빛 랜턴(Lantern)이다. 미국 독립전쟁 전야에 외롭지만 밝게 빛났던 보스턴의 랜턴처럼 어두운 시대에 희망과 용기의 불빛이 되어줬음을 상징한다. 2017년 수상자는 버락 오바마(미국 44대 대통령)였고, 2019년 수상자는 낸시 펠로시(미 하원 의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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