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령 살던 집에 접시꽃 활짝 피었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최현태 2020. 7. 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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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왕이 되기 전에 살던 강화 용흥궁/아담한 한옥 안마당엔 접시꽃 흐드러지게 피어/세도정치 휘둘리던 비운의 왕 고향집 농사꾼 삶이 더 행복했으리/용흥궁 뒤편 120년 한옥성당 불교상징 보리수와 공존/강화10경 연미정...조양방직 카페 추억 소환

용흥궁과 접시꽃
용흥궁(龍興宮). 그러나 이름과 달리 궁궐은 아니고 아주 아담한 한옥이다. 더구나 경사가 심한 땅에 계단식으로 지었으니 주인은 그리 부자는 아닐 것같다. 그런데도 궁이라니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작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화사한 접시꽃이 활짝 웃으며 맞는다. 빨강꽃과 연분홍꽃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고즈넉한 한옥 담장을 수놓았다. 집 주인의 사연 때문일까. 접시꽃이 없었다면 초라한 한옥은 매우 쓸쓸했을 텐데 접시꽃이 살렸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 고요한 한옥 툇마루에 앉아 접시꽃을 한참 구경한다. ‘구중궁궐’에 갇혀 외로울 때마다 꽃이 가득한 강화집 안마당을 몹시도 그리워했을 집 주인의 기구한 삶을 떠올리니 접시꽃은 화려한데 마음이 쓸쓸하다. 그는 조선의 25대 왕 ‘강화도령’ 철종이다.
용흥궁
#강화도령 살던 집 접시꽃 물들었네

강화 도령의 기구한 인생은 조선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에서 시작된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 27살에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다. 가계도가 좀 복잡하다. 사도세자와 후궁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정조의 이복동생)의 서자 전계군의 셋째아들이 이원범이다.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로 몰려 죽자 은언군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상소가 빗발친다. 정조는 하나 남은 이복동생을 살리려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지만 부질없다. 신유박해때 은언군의 아내와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로 드러나면서 결국 역시 셋다 죽임을 당한다. 

용흥군 앞마당 접시꽃
서슬퍼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지배하던 시절, 사도세자의 후손들은 서자라도 언제 역모로 몰려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그래도 살아남고 싶었기에 신분을 감춘채 움막에 살면서 머슴살이 하는 기구한 삶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원범이 14살때 아버지와 큰형 역시 역모로 죽는다. 사진의 칼날이 이제 자신의 목을 겨눌 무렵, 정조의 손자이자 조선의 마지막 직계왕족인 24대 왕 헌종이 23살에 아들없이 승하한다. 이에 안동 김씨 세력은 이원범을 23대 왕 순조의 양자로 입적, ‘허수아비 왕’으로 앉히는데 그가 바로 철종이다. 글도 모르고 농사만 짓다 졸지에 왕에 오른 철종은 면전에서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안동 김씨 세력의 놀림감이 됐다고 한다.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탐관오리가 득세해 전국적인 민란까지 일어난다. 하지만 정권을 좌지우지한 안동 김씨 세력 밑에서 14년동안 왕노릇만 하던 철종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과 32살의 젊은 나이에 병사한다.
11살에서 왕위에 오르는 19살때까지 철종이 살던 집이 인천시 강화읍 관청리 용흥궁이다.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른지 4년 뒤 강화 유수 정기세가 한옥을 짓고 이름을 용흥궁으로 붙였다. 그전에는 아주 낡은 초가였다고 하니 강화도령의 팍팍한 삶이 가슴에 와닿는다.  작은 공간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들인 살림집 수준이라 다소 초라하다. 하지만 봄이면 목련이 흐드러지고 5월에는 작약이, 6월이면 접시꽃 피어 화사한 한옥으로 변신한다. 처마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니 조용히 앉아 책읽기 좋은 곳이다. 가족과 연인들은 한옥과 접시꽃을 배경으로 근사한 사진을 얻을 수 있겠다. 접시꽃 꽃말은 단순, 편안, 다산, 풍요다. 세도정치에 휘둘리며 비참한 삶을 살았을 왕보다, 사계절 아름다운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며 맘껏 숨 쉴 수 있던 강화도령의 단순한 삶이 더 편안하고 행복했으리.
강화성당
강화성당 내부
#한옥 성당과 불교 상징 보리수의 공존

용흥궁을 구석구석 둘러보며 뒤쪽 언덕의 출입구로 나가면 다른 한옥이 기다린다. 우리나라 최초 한옥 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고요한 신부로 알려진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 존 코르페가 1900년에 세웠으니 올해 120살이 됐다. ‘성베드로와 바울로성당’으로도 불리며 1896년(고종 33) 강화에서 한국인이 첫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성당이 지어졌다. 

강화성당 사진
강화성당 오르간
다양한 흑백사진들이 전시돼 성당의 역사를 얘기한다. 그중 갓을 단정하게 쓰고 기념사진을 찍은 첫 세례 신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고풍스런 오르간도 만난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의 의미를 담아 배 모양을 따랐는데 마당의 커다란 보리수가 눈길을 끈다. 높이 18m 둘레 3m로 웅장한데 성당에 불교의 상징인 보리수나무라니.
강화성당 보리수
1900년 영국 선교사 트로로프 신부가 인도에서 10년생 보리수 묘목을 가져와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토착 불교 문화와 잘 어우러지게 보리수를 심었다니 한옥 성당과 함께 한국의 전통을 해치지 않으려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아픈 역사도 지녔다.
강화성당 입구
일제가 1943년 대동아 전쟁이 터지자 필요한 물자를 강제 공출하면서 정문 계단 난간과 종을 강제로 압수했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게된 일본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침략전쟁을 참회하고 평화공존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2010년 난간을 복원했다.
고려중지와 외규장각
#연미정 오르니 북한 개풍이 지척인데

강화 원도심 투어는 가볼 만한 곳들이 몰려 있어 짧은 시간에 둘러보기 좋다. 성당을 나서 고려궁지로 향한다. 고종19년(1232년)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의 수도를 천혜의 요새인 강화로 옮겼는데 개경 환도때까지 39년동안 왕이 머문 궁터가 남아 있다. 1636년 병자호란때 강화성이 청나라 군에 함락되는 등 여러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화려했던 궁궐은 건축기단과 돌계단만 남긴채 사라졌다. 아쉽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수도권에서 확산되면 고려궁터는 지난 5월부터 관람이 중단됐다.

강화산성 북문 성곽길
하지만 왼쪽 강화산성 북문쪽으로 오르다 보면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불태운 수난의 역사가 담긴 외규장각과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를 도로에서도 볼 수 있다. 강화산성도 몽고 침략을 막기 위해 천도와 함께 쌓은 도성이다. 내성·중성·외성의 3겹으로 쌓았지만 지금은 내성만 남아있다. 강화읍을 에워싼 성의 둘레는 약 1.2㎞인데 이곳저곳 핀 들꽃을 즐기며 고즈넉한 성곽길을 따라 걷는 재미가 있다. 강화버스터미널∼갑곶돈대 구간으로 구성된 강화 나들길 1코스 심도역사문화길(총 18km)과 15코스 고려궁 성곽길(총 11km)속한 길이기도 하다. 짧게 둘러볼 수  있다. 10여분쯤 오르면 북녁땅이 멀리 보이는 북장대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오읍약수다. 시원한 물 한잔하고 다시 북문으로 돌아 나오면 된다.
연미정에서 본 북한
고려궁지에서 승용차로 8분 거리에 있는 월곶진과 연미정(燕尾亭)은 강화여행의 필수코스. 월곶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해상로의 요충지로 서해와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꼬리와 비슷해 정자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조선 중기 무신 황형은 중종때 삼포왜란때 전라좌도 방어사로 왜적을 크게 무찔렀고 함경도 야인 반란을 제압하는 큰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오른 인물. 왕이 그에게 선물로 연미정을 하사했다고 한다. 입구에는 월곶진의  문루인 조해루를 복원해 놓았다. 황형 유적비와 타원형으로 쌓은 월곶돈대를 거쳐 고풍스런 연미정에 오르니 넓은 평야와 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이 장관이다. 강 건너 손을 뻗치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땅이 북한 개풍군으로 백마산이 강을 따라 달린다.
연미정
연미정
연미정 오른쪽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500년 수령을 자랑하듯 하늘을 향해 무성한 가지를 뻗었다. 왼쪽에 비슷한 규모의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지난해 9월 태풍 링링때 밑둥 1m만 남기고 완전히 부러져 고사해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았다. 예전 사진을 보니 강화10경에 든 이유를 알겠다. 좀더 일찍 이곳을 찾지 못한 게으름에 후회가 밀려든다. 
국화저수지
국화저수지
#핫플레이스 방직공장 카페에 뉴트로 감성 가득

고려궁지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인 국화저수지에도 둘러보자. 강태공들의 천국으로 입소문 난 곳으로 가마우지와 백로가 자맥질을 하면서 물고를 잡느라 분주하다. 저수지를 따라 데크가 잘 조성됐고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 아니어서 조용하게 사색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조양방직
강화읍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나는 조양방직 카페는 요즘 강화의 핫플레이스다. 넓은 주차장은 승용차로 가득하고 주말이라 가족이나 연인들로 넘쳐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공장으로 한옥과 일본주택 건축양식이 섞여있다. 일제강점기때  강화 갑부이던 홍재묵·재용 형제가 1933년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했으니 1936년 시작된 서울 경성방직보다 역사가 오래됐다. 이어 평화직물, 심도직물, 이화직물 등 크고 작은 직물 공장 60여 곳이 들어섰고 1960년대까지 국내 최고 품질의 인조직물을 생산해 한때 강화를 섬유산업으로 메카로 만들었다. 강화읍에만 직물 공장 직원이 4000명이 넘게 거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영난으로 1958년 조양방직은 문을 닫는다. 단무지 공장, 젓갈 공장으로 명맥을 이어지만 결국 폐허로 방치됐다가 2018년 신문리 미술관 조양방직 아트갤러리로 다시 생명을 얻었다. 
조양방직
조양방직 공중전화 부스
빨간 우체통이 인상적인 입구를 지나면 추억돋는 풍경이 가득하다. 서울 성수동 등의 공장 내부만 개조한 카페와는 많이 다르다. 공장의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잿빛 시멘트 건물 여러채가 부서지고 깨진 상태 그대로 남아 갤러리로 변신했다. 직원들을 실어 나르던 낡은 버스, 동네 골목을 찾아오던 흔들 목마, 부서진 농기계와 오토바이, 낡은 캐비닛과 미싱, 빛바랜 간판 등 세상의 모든 버려진 것들을 다 모아 놓았다.
고장난 저울은 의자가 되고 방직기계 작업대는 카페의 테이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줄을 서서 기다리던 빨간 공중전화 부스 3대는 뉴트로 감성을 빚내는 포토존으로 인기를 끈다. 카페는 층고가 높아 개방감이 돋보이며 벽돌과 목조 트러스트가 그대로 노출돼 있다. 역시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국민학교 시절의 산수책과 지구본, 집집마다 어김없이 걸려있던 백일사진, 로마의 휴일 등 빛바랜 영화 포스터 등이 아련한 시절의 추억으로 이끈다.

강화=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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