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 없이 알바 → 계약직 → 정규직 이동 '캐나다의 고용 사다리' [다른 삶]

성우제 2020. 7. 3.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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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경계인'

[경향신문]

캐나다로 이민을 오기 직전 친구가 내게 전해준 이야기가 있다. 내 형이 친구에게 했다는 말이다. “우제는 왜 기득권 다 버리고 이민을 가려 하는지 모르겠다.” 낯선 땅에서 고생할 것이 불을 보듯 훤하니 속이 상해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듣고도 나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에게 버릴 기득권이 있기는 한 건가’ 하고 잠깐 생각했을 뿐이다. 한번 전염되면 벗어나기 어렵다는 ‘이민병’에 걸렸던 탓에 그런 종류의 어떤 조언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토론토의 어느 푸드코트. 평소 점심시간이면 사람들이 가게 앞에 줄을 서는 푸드코트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손님이 거의 없다.

토론토 정착 초기까지만 해도 내가 한국에서 가졌던 기득권의 정체를 잘 몰랐다. 새로운 일을 하겠다는 ‘전투적인 의지’만 불태웠을 뿐 내가 한국에서 누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고 몇년이 지나 밥벌이를 겨우 하게 될 즈음, 내 형이 했던 말이 평범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자영업자로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캐나다에서 내가 가진 기득권이란 것은 없었다. 한국의 학력이나 기자로서의 경력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제로 베이스’에서 쌓아나가야 했다.

알바하며 석사과정 유학 후배 K
오지의 계약직 공무원으로 시작
경험·실력·전문성 쌓으며 이직
추천서·인터뷰로 ‘정규직’ 이동
주정부 ‘국장급 공무원’에 올라

‘캐나다서 일한 경력’ 중시 문화
자영업 시작 전 알바 구할 때도
“딴 데서 일한 경험 있냐 ” 물어
대졸 취직준비 힘든 노력 만큼
현장의 전문성 인정 받는 사회

자영업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내가 이곳에서 일단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헬퍼’(한국식으로는 ‘알바’)밖에 없었다.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면서 일을 배우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물론 최저임금이었다. 그마저도 아무나 뽑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민 초보자라는 사실은 ‘알바’ 인터뷰에서도 감점 요인이었다.

‘알바’ 생활을 시작한 곳은 샌드위치숍이었다.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배달 수레를 뛰다시피하며 밀고 다녔다. 흰색 유니폼을 입었으니 한국의 배달원(일명 ‘철가방’)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샌드위치냐, 짜장면이냐만 다를 뿐 일 자체는 똑같았다. 처음 하는 육체노동이 힘에 부치기는 했으나 이렇게 배우고 익히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한 가닥은 늘 품고 있었다. 비록 의심스럽기는 했어도 가느다란 그 희망마저 없었다면 힘든 시간을 통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 회사 후배인 K가 나보다 6개월 먼저 토론토에 와 있었다. 친구처럼 지내게 된 K는 나와는 달리 대학원에 들어갔다. 석사학위를 발판 삼아 취직을 할 심산이었다. 후배는 열심히 공부해 최대한 빨리 석사과정을 마쳤으나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2년 남짓 샌드위치숍 배달과 설거지를 경험했다 해도 내가 안정적으로 운영할 만한 가게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하지 않았던 자영업에 종사하려 하다보니 무엇보다 두려움이 컸다. 까딱 잘못하면, 아파트 판 돈에 퇴직금을 합친 얼마 안 되는 목돈마저 다 날려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론토 북쪽의 동양계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노스욕 거리. 이런 화창한 날씨면 사람들이 쏟아져나오는 곳이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한산해 보인다.

캐나다에는 참 이상한 고용문화가 있었다. 이곳 직장들은 사람을 채용할 때마다 늘 ‘캐나다 경험’을 요구했다. 나처럼 자영업을 하려는 사람은 수용 여부를 당사자가 결정할 수 있으나(경험이 많으면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로), 화이트칼라인 K에게 그 요구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캐나다에 이민 와서 대학원 다닌 경험밖에 없는 사람에게 캐나다 직장 경험을 요구하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캐나다 경험을 요구한다는 것은 ‘다른 직장에서 어떻게 일했는가를 보고 당신의 능력과 자질을 따져보겠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영어학교에서 만난 다른 나라의 고학력 구직자들 또한 신규 이민자에게 캐나다 경험을 요구하는 캐나다 고용문화를 맹렬히 비난했다. 하다못해 최저시급 육체노동 ‘알바’ 자리를 처음 구하러간 나에게도 “딴 데서 일한 적 있나요?”라고 물었으니, 고학력자들이 찾는 직장에서는 캐나다에서 일한 경력을 훨씬 더 중하게 여겼다. 캐나다 경험을 요구하는 것은 이민자들 앞에 놓인 절벽이었다.

그러나 그 높은 절벽에도 그곳을 타고 오르는 가느다란 길이 있기는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면밀하게 찾는 사람한테만 보이는 암벽등반 코스 같은 길이었다.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며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올라갈 수 있는 길이었다.

석사과정을 마친 K는 바로 그 좁은 길을 찾아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내가 더 내려갈 수 없는 곳에서 ‘알바’를 시작한 것처럼, 후배 또한 자기가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갔다.

학생으로서 토론토에서 ‘알바’ 경험만 했던 그는 웬만한 사람이면 기피할 법한 일자리를 하나 찾아냈다. 인구 3000명의 소도시에서 근무하는 온타리오 주정부 계약직이었다. 문제는 토론토에서 자동차로 12시간 넘게 가야 나오는 오지라는 사실이었다. 토론토 토박이들도 잘 모르는 북쪽의 작은 도시였으니, 그런 외진 곳의 1~2년짜리 계약직 공무원 자리에 관심을 갖는 구직자는 거의 없었다.

부지런하고 능력있는 고학력자지만 캐나다 직장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공무원이든 기업이든 공개채용이 없는 나라이다 보니, 사람을 고용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너서클’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우선 지원 자격을 주었다. 그런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작지 않은 기득권이었다. 기득권자들이 새로운 이민자들에게 구직 기회를 쉽게 나눠줄 리가 없었다.

겨울이면 거센 눈보라 때문에 운전조차 할 수 없는 그 작은 도시에서, K는 정규직 매니저 1명과 함께 1년 넘게 일했다. 멀기도 하거니와 오가는 길 자체가 험해서 토론토에 있는 가족도 자주 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불안감을 계속 안고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캐나다 경험’을 한다 해도 더 나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계약직으로서 받는 월급도 가족이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몇년째 ‘까먹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불안감을 부추겼다.

한국에서는 과학 및 IT 전문기자로 ‘펄펄 날았던’ K는 캐나다 사람 버금가게 영어를 잘했으나, 캐나다 고용시장은 오로지 ‘캐나다 경험’만을 이야기했다. 캐나다 사회가 요구하는 ‘수업료’를 시간과 돈으로 지불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1년 남짓 작은 도시에서 일하던 후배는 토론토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조금 큰 도시에서 기회를 잡았다. 1년이나마 캐나다 직장생활을 했던 까닭에 지원 자격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첫 직장의 유일한 동료인 매니저가 써주는 ‘추천서’가 취업 여부를 결정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공무원이지만 계약직 신분과 박봉은 여전했다. 좀 더 집 가까이로 왔다는 것과 경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이 위안거리였다. 처음으로 한 단계 올라선 것이다.

출퇴근을 하는 데 하루 4시간이 걸리는 고된 생활을 또 1년 넘게 했다.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경력을 그만큼 쌓아가는 일이니만큼 불안감은 여전해도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가던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

작은 도시, 조금 큰 도시에서 경험을 쌓은 그에게 토론토에서 일할 기회가 왔다. 역시 계약직이었으나 이번에는 토론토시 공무원이었다. 대학원생 시절 ‘알바’ 경험을 했던 곳이다. 출퇴근하느라 고생하지 않게 된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기회가 많은 가장 큰 도시로 진입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K는 캐나다에 와서 5년이 넘는 시간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계약직으로서 경험만 쌓으며 지냈다. 나 또한 토론토에서 하는 자영업의 생리를 익히려고 4년 동안 ‘알바’ 생활을 하며 지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언론사 공채시험에 합격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장은 대단한 기득권이었다. 우리는 그게 기득권인 줄도 몰랐다. 학력은 물론 십수년 직장 경력 또한 큰 기득권이라는 사실을 나는 토론토에서 실뿌리를 내려가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제는 왜 기득권 다 버리고 이민을 가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던 내 형의 말이 떠올랐다. 캐나다 경험을 쌓으려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전에는, 내가 한국에서 기득권을 가진 줄도, 버리고 온 줄도 몰랐다.

최저시급 ‘알바’ 생활을 거친 후 나는 내 가게를 열었고, 후배 K는 드디어 온타리오 주정부 정규직 공무원으로 취직했다. 나나 후배가 ‘정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자양분은 해당 분야에서 터무니없는 박봉을 감수해가며 버티고 보낸 시간이었다. 필기시험은 보지 않았으나 인터뷰는 자주 했다. 당연히 후배는 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했다. 그는 직장을 옮길 때마다 인터뷰를 하고 전 직장 상사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제출했다. 실력은 기본이고, 캐나다 직장 경험과 인터뷰와 추천서가 그로 하여금 정규직 공무원의 자리까지 나아가게 했다.

K는 온타리오 주정부에서도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 일을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좋은 조건의 자리로 계속 옮겨갈 수 있었다. 좋은 조건이란 승진과 연봉 인상을 의미했다. 이후 후배는 앨버타 주정부 공무원으로 이동했다가, 캐나다 연방정부 산하기구를 거쳐 지금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정부 고위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매니저라고 하니 한국으로 치면 경기도청쯤 되는 곳의 국장급 공무원이다.

캐나다 경력이라고는 없던 K가 대학원 시절 ‘알바’에 이어 ‘계약직’을 전전하다가, 캐나다 정규직 공무원을 거쳐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불공정하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바’와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상사에게서 좋은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경험과 실력과 전문성을 키웠다.

K도 그렇고, 자영업으로 밥벌이를 하는 나를 포함한 이민자들 모두가 그렇게 홀로서기를 했다. 기득권이라고는 없으니 가장 낮은 현장에서 일을 배우고 경험을 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명문대학을 나오면 취업의 문이 훨씬 더 넓기는 하다. 그러나 취업 자체가 어려운 것은 세상 어디든 마찬가지이다. 도처에 취업준비생이다.

그렇다고 ‘알바’나 계약직으로 시작해 정규직 자리를 잡아가는 사람들을 두고 ‘공정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알바’든 계약직이든 현장에서 일하면서 전문성을 키우는 것 또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는 것 못지않게 힘들고 의미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5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5권을 냈다.』

성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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