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형의 애정만세] 夏하하하?여름에는 하이볼과 칵테일이지
우연히 들어간 곳에서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 그 책이 남들도 다 아는 그런 책이 아니라 혼자 조용히 좋아하고 있던 책이라면? 그런 경험이 딱 한 번 있다. 어쩌다 들어간 카페에서 계산을 하려다 그 책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마치 꽃병이나 오브제처럼. 깜짝 놀란 걸 숨기지 못하고 주인에게 물었다. “아니, 이 책이 여기 왜 있어요?” 신기하고 놀랍다는 말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내 문제다.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 책이에요.” 담담하고 작은 목소리였다.
제주에서였다. 나는 ‘핫플’인 어떤 곳을 가려고 내비게이션을 찍었던 것인데, 그 ‘핫플’을 실제로 보니 여러 가지로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차를 빼려고 주차장으로 가던 도중 그 카페를 발견했다. 첫눈에 편안함을 느꼈다. 구조도, 창을 낸 방식도, 조도도, 테이블 간격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음료도 맛있었고, 간식으로 생각하고 시켰던 감바스도 좋았고, 기본안주로 나왔던 참크래커와 크림치즈도 정겨웠다. 메뉴판을 보는데 입 꼬리가 올라갔다. 여름 ‘夏’자를 써서 ‘夏 하하하’로 써놓은 메뉴판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화장실에 있는 핸드솝까지, 어디 하나 주인의 세세한 손길이 닿지 않은 데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책을 쓴 사람이 하는 곳이라니. 두 배로 특별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저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책에서 저자는 자신에 대해서 여러 층위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들을 따라가며 읽다보니 어떻게 생긴 사람일지, 목소리는 어떨지, 긴 머리일지 숏컷일지 연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방식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또, 나는 그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술과 안주와 음식에 대해 읽으며 ‘그녀가 만든 안주를 먹고 싶다’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역시 이룬 것이었다. 엉겁결에 소원을 두 개나 이룬 날이었다.
술과 안주와 술을 같이 마신 사람들과 술을 마신 장소와 술을 마신 상황과 정황 등등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제목도 ‘술 마시고 우리가 하는 말’. 교보문고 매대를 어슬렁거리다 홀린 듯 이 책을 집어왔었다. 이 책을 보고 있으면 마시고 싶은 술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책에 대한 책인 서평집을 보다가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가득하게 책을 담는 ‘물욕’과도 비슷하다. 나는 ‘책욕’과 ‘술욕’이 있는 사람이라서 술에 대한 책은 웬만하면 다 사고 있는 형편이다. 이 책을 보다가 필스너우르켈과 코젤다크처럼 관심이 전혀 없던 술에도 관심이 생겼고, 기네스에 스파클링 와인을 타서 만든다는 블루벨벳이 먹고 싶어졌고, 저자가 여름마다 담근다는 살구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기억의 마디마다 호명하고 있는 와인은, 아는 게 나오면 기뻤고 모르는 게 나오면 적어두었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도, 그리고 다시 보고 있는 지금도 가장 궁금한 술은 뱀파이어주.
“만드는 법은 이렇다. 온더락 잔에 먼저 임페리얼을 스트레이트 잔으로 반쯤 붓는다. 다음은 홍초 스트레이트 잔 하나를 붓는다. 그리고 얼음을 네 개 정도 넣고, 화룡점정으로 페리에를 15~20cm 높이에서 얼음벽을 겨냥, 얼음 사이로 흘러들어가게 한다. 온더락 잔의 절반 정도가 액체로 채워지면 된다. 잘 만든 뱀파이어주는 페리에가 섞이지 않고, 상단에 투명하게 그대로 존재한다. 이쁘고 곱다. 더할 나위 없는 미모의 술이다. 그리고 그 자리의 모두가 그대로 원샷이다.”
지난주에 잭콕(잭다니엘과 콜라를 섞음)을 응용한 짐콕을 하겠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짐빔을 샀는데 아무래도 임페리얼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뱀파이어주를 만들어야 하니까. 홍초도, 페리에도 없으므로 다 사야 한다. ‘더할 나위 없는 미모의 술’을 만들고 싶으니까.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하면서(지난번에 쓴 한은형의 애정만세 ‘음주에 숙달돼야해, 그렇지 않으면 술이 자네들을 부린다네’를 참조하세요), 그러니까 관련 술들을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세운 나름의 원칙이 있다. 있는 술에 더해 응용할 수 있는 리큐르나 스피리츠만 산다는 것. 그렇게, 알뜰살뜰하게 홈 칵테일 바를 확장하려고 했었는데… 원칙을 세운 지 한 달도 안 되어 깨야할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쓰고 있자니 내가 꽤나 술에 미친 사람인 듯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책과 마찬가지다. 책을, 책 읽는 행위를 취미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적절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늘 곁에 있는데 볼 때도 있고 거들떠도 보지 않을 때도 있기 때문에. 집에 있는 가구라거나 식물 같기도, 때론 먼지 같기도 하다. ‘글 좀 쓰는 언니들의 술 이야기’라는 헤드 카피가 붙은 ‘취중만담’이라는 책을 읽다가 나와 비슷한 술에 대한 견해를 발견했다. 소설가인 가쿠타 미쓰요가 쓴 부분이다. “어른이 되어 술을 마시게 되면서 술이란 존재는 해마다, 해가 갈수록 일상이 된다.(…) 하지만 나에게 술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좀 애매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돼지고기를 매우 좋아하는데, 돼지고기의 맛을 좋아하는 것처럼 술맛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 술은 좋아한다기보다는 필요한 어떤 것이다.”
딱 그렇다고 생각했다. 술이란 일상이고, 필요한 어떤 것이다. 일상은 덤덤한 어떤 것이지 늘 즐겁고 기쁘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덤덤함을 그나마 ‘좀 덜 덤덤함’으로 바꿔주는 게 다양한 종류의 술인 것 같다.
‘취중만담’에 실린 개성만점이었던 무로이 시게루의 문장을 변행해보기로 한다. 나는 맥주도 좋아하고 소주도 좋아하지만 건배할 때는 역시 ‘쏘맥’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음식에 따라 레드 와인이나 화인트 와인을 선택하기도 한다. 여름에는 하이볼과 칵테일을 자주 마시고 겨울에는 역시 ‘백주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루쉰의 소설을 보고서는 한동안 소흥주만 마셨고, 미드 ‘보어 투 데쓰’를 보고서는 소설가이자 탐정인 주인공을 따라 머그컵에 소비뇽 블랑을 콸콸 따라 마셨다. 소화가 좀 안 된다 싶을 때에는 아마레또나 포트와인을 마신다. 요즘 주로 마시는 술은 무알콜 맥주(알콜 함유량 0.5%)나 라들러(알콜 함유량 2.5%)다. 술 냄새도 안 나고, 마시면서도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다 쓰고 자기 전에는 얼음을 잔뜩 넣어 아와모리 한 잔을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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