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말했다 "다음 주엔 애인을 데려오겠어"

2020. 6. 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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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아무튼, 주말]
일러스트= 안병현

사랑은 심장에서 생겨나 심장을 태우는 불이라 생각한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다 조금 약아져서는, 한갓 뇌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게 되었죠. 지금은 이렇게 믿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몸 어느 부위로든 침투하여 온몸으로 퍼져 나가며 열띤 증상이 가라앉은 뒤에도 우리의 장기 곳곳에 추억과 정이라는 다발성 흔적을 남기는 질긴 바이러스라고. 홍여사

코로나 우울증도 무서운 병이라며, 남편이 오랜만에 외출을 하자더군요. 차를 몰고 어디 경치 좋은 곳 조용한 찻집에 가서 커피나 한잔하고 오자고요. 그런 데가 어디냐고 물으니 두말 말고 따라만 오랍니다. 삼십 년째 듣는,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소리.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되어 버린 그 말에 나는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일으켜 차에 올랐습니다.

"언제쯤이면 세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까?"

"코로나란 병, 걸리면 그렇게 고생한다며?"

"무증상 감염자들도 많아 쉽게 잡히지 않을 거야."

코로나19를 피해 차를 몰아가면서도 우리는 그 지겨운 코로나 얘기를 했습니다. 오래된 부부의 대화가 대체로 그러하듯, 맥락도 없이 아무 얘기나 불쑥 꺼내고, 상대의 말에 동문서답을 하는 식으로…. 차창 밖을 보니 그새 어딘지 모를 국도변. 초여름의 푸릇푸릇한 산과 따갑게 반짝이는 햇살을 올려다보며 남편에게서 방금 들은 말을 되뇌어 보았습니다. 무증상 감염이라는 말. 요즘 자주 듣는 그 말은 이상하게 저를 매번 소름 돋게 합니다. 병에 걸리고도 느끼지 못한다면 본인에겐 그나마 다행일 텐데, 저는 왜 그게 더 무서운 일로 느껴질까요?

"자, 이제 다 왔습니다, 사모님!"

남편의 목소리에 다시 한 번 눈을 들어 밖을 봅니다. 어느새 접어든 짙은 숲길이 오른쪽, 왼쪽으로 구부러지더니, 오래된 대저택의 정문과 같은 고풍스러운 철제 대문이 보이고 그 옆에 반쯤 지워진 글씨의 간판이 보입니다. 그 글씨를 읽어보기도 전에, 아니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대번 알았습니다. 아, 이곳은….

십 년쯤 전에도 한 번, 우리는 그 카페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도 남편은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했었지요. 이런 곳에, 이런 곳이 있다니 싶은 묘한 카페였습니다. 조금 낡고 서늘해서 건물 자체가 아름다운 앤틱처럼 느껴졌던 그곳엔, 이층의 작은 방이 따로 나누어져 있었죠. 그 작은 방에 들어섰을 때 마주친 의외의 커다란 창이 잊히지 않습니다. 하얀 레이스 커튼이 쳐진 그 유리창은 5월의 햇살 속에 춤추는 푸른 나무 잎사귀들로 가득했죠. 저는 그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늘 꿈꾸던 아름다운 창문이 바로 이런 창이었지만, 그래서 울었던 건 아닙니다. 나를 이런 곳에 데려다 준 남편의 정성에 감동했던 것도 아닙니다. 저는 슬퍼서 울었습니다. 이 방에 서 있는 남편과 내가 기막혀서 울었습니다.

그 당시 남편은 저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답니다. 남편은 오십 초반, 저는 마흔 몇 살 끄트머리 때의 일입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우리 둘 중 한 사람에게 한 번쯤은 일어날 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포기한 듯 나날이 시들어가고 있었고 남편은 가는 세월을 남몰래 초조해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건 남편의 거짓말은 충격이었죠. 저는 우연히 그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진욱이라는 이름의, 남편이 부쩍 자주 만나는 후배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며 이름도 가짜라는 사실을. 당연히 의심스러웠지만 즉시 캐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우선 남편의 모든 것을 뒤지기 시작했죠. 휴대전화도 밤마다 들여다봤고, 이메일도 훔쳐봤습니다. 지갑과 양복 주머니도 샅샅이 뒤졌고 현관 밖에 몰래 숨겨놓고 들어온 가방은 없나 살펴봤습니다. 그러다 한 번씩 그 여자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내게 되면, 저는 비명과 환호를 동시에 질렀습니다. 이거 봐. 맞잖아. 절대로 나를 속일 순 없어.

저는 그때 깊이 병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질투하고, 아파하는 대신 묘한 쾌감을 느끼며 남편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파헤치고자 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은 천박하지도 노골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오고 간 메시지는 그 흔한 이모티콘 하나 없이 사무적이고 간결했죠. 그러나 이미 꼬리를 잡은 내 눈엔 다 보였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맞추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과, 간신히 참는 다정한 밤 인사가. 저는 그들이 내일 어디서 만날지를 알고 그들과 함께 밝아오는 내일을 기다리곤 했답니다. 그들이 만났을 시간이 되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놀라게 해 보기도 했죠. 그게 다 뭐 하는 짓이었을까요? 나는 언제까지 그런 변태적인 쾌감에 젖은 채 남편을 내버려둘 생각이었던 걸까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저를 그 카페에 데려간 겁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장소를 찾았다면서요. 사실 남편은 한눈을 파는 동안에도 저에겐 다정했죠. 그녀를 만난 다음 날엔 더욱 친절했습니다. 저는 그의 친절에 반쯤 조소를 보내며 모르는 척 남편을 따라가 봤습니다. 그런데 카페의 그 작은 이층 방에 들어선 순간 알아버렸죠. 그곳은 일주일 전 남편이 비밀의 그녀와 다녀간 곳이란 걸. 그녀를 만난 날 남편은 아름다운 창문을 사진으로 찍어두었거든요. 아내가 늘 말하던 푸른 나무가 내려다보이는 하얀 레이스 쳐진 예쁜 창문을 말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 걸까요? 우리 집사람도 이곳에 데려오고 싶다고. 애인과 아름다운 장소들을 찾아내고, 그중 좋은 곳엔 아내를 데려가는 남자의 심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너무 슬프고 기막혀, 저는 남편의 얼굴을 감싸쥐고 눈을 들여다보며 울었습니다. 남편은 제가 행복해서 우는 줄 알았겠죠.

그날 저는 남편의 비밀이 가진 진짜 비밀을 알았습니다. 남편은 그 여자와 불장난을 하는 것도, 진짜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잊었던 설렘을 느끼고, 다시 젊어진 기분을 탐하는 중이었습니다. 누군가와 연애하는 기분 자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내와는 더는 느낄 수 없는 그 짜릿한 감정에 말입니다. 저는 끝내 남편에게 진실을 묻지 않았답니다. 남편의 외도를 알고도 덮고 사는 여자라고,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지금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그 당시 남편에게서는 더는 아무런 설렘을 느낄 수 없었거든요. 저는 그러고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남편은 한 번쯤 방황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그 비밀의 여자가 언제 어떤 식으로 남편에게서 사라졌는지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남편은 내 곁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뿐. 우리 부부의 방황과 배신은 그렇게 무증상으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 일은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은 걸까요?

십 년 만에 아름다운 창문이 빛나는 그 방으로 우리는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기억할까요? 이곳에 함께 왔던 또 한 명의 여자를? 저는 눈물 대신 이번엔 웃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등진 채 말합니다.

"다음 주엔 애인을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네. 그 사람이 딱 좋아할 장소거든."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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