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인간미 가득한 동네 언니 박세리
한국 여자 골프 사상 최고의 선수는 단연 박세리다. 골프 여제로 불리던 그에게 최근 국민 언니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사업가로도 변신하며 인생 2라운드를 열정적으로 열고 있는 박세리가 전하는 삶의 이야기와 또 한 번의 응원 메시지.
소소하면서 행복한 박세리의 요즘 일상
골프가 연령대가 있는 운동이다 보니 어르신 팬들이 많았는데, 방송 출연 이후 젊은 분들이 반가워하세요. 지나가다가 알은체하며 인사하는 젊은 팬들도 많아졌고요. 일례로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여성 두 분이 "다이어트한다고 하셔서 건강 주스 드려요"라며 주스를 선물해 주셨어요. 지인들은 제 성격을 잘 아니까 방송에서의 소탈하고 친근한 모습을 익숙해해요. 방송 덕분에 대중들이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동네 언니가 된 것 같아요(웃음).
대전에 위치한 집은 '세리 빌리지’라 불릴 만큼 화제였어요.
부모님 집 옆에 4층 규모의 집을 지어 언니, 여동생과 살고 있어요. 언니와는 다섯 살, 동생과는 네 살 터울인데 자매들끼리 모든 걸 공유하고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요. 세 자매가 친해서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집을 지을 때 설계부터 인테리어까지 원하는 스타일이 반영되도록 신경 썼어요. 미국에서 살 때 편했거나 익숙했던 구조를 가져와 반영하기도 했고요. 대표적인 공간이 팬트리랍니다. 또 층고를 높게 해 답답해 보이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어요. 가장 의미 있는 건 초대형 트로피 장식장으로, 트로피 크기를 일일이 재서 맞춰 제작했어요.
옥상 텃밭에 심은 쌈 채소는 잘 자라고 있나요.
텃밭은 평소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실제로 해보니 뿌듯한 기분이 들고 소소한 재미도 있더라고요. 각종 쌈 채소를 심었는데 정말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요. 요즘 쌈 채소 없애느라 고기 먹는 날이 더 많아졌네요(웃음).
반려견을 3마리나 키우시더라고요.
첫째 모찌는 2016년 은퇴하면서 분양받은 보스턴테리어고, 둘째 찹쌀이는 블랙탄 포메라니안으로 팬이 분양받아 주셨어요. 셋째 시루는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리고 왔고요. '방앗간 삼남매’라 불리는데, 제게는 동물이 아닌 가족 같은 존재들이에요. 다들 박세리 패밀리에 당당히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려견들과의 생활도 행복하겠지만, 든든한 짝에 대한 생각도 있을 것 같아요.
결혼할 생각은 있지만 맘에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 듯해요. 새로운 만남도 어렵고요. 부모님 역시 결혼에 대해 재촉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셔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상형은 친구 같은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만나고 싶어요.
30년 가까이 골프와 함께하고 계신데, 골프는 어떤 의미인가요.
골프는 그야말로 저의 삶이었죠. 골프를 해서 지금의 박세리가 있었을 만큼 인생의 절반을 골프와 함께했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이제 남은 삶은 다른 많은 걸 배우고 적응하면서 새롭게 시작해야 하겠죠. 물론 그 삶에도 여전히 골프는 함께할 것 같아요.
최고의 골프 여제로 평가받고 있는데, 선수 시절을 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궁금해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우승했던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사실 LPGA 선수 자격 테스트를 받고 골프를 시작할 때 3년 정도 적응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첫해에 운이 좋게도 4번의 우승을 했지요.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기회가 왔고 우승을 잡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연장전에서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극적으로 우승했던 US여자오픈을 기억해주고 계세요. 저 역시 그 경기가 기억에 남는데, 메이저 대회 두 번째 우승이었지요. 많은 화제가 됐던 US여자오픈 때문에 처음으로 우승했던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이 묻혀서 조금 아쉬움이 남아요(웃음).
선수 생활의 밑거름이 됐던 건 도전정신과 자신감이에요.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물러서거나 겁이 없었고, 저에 대한 자신감이 컸어요.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믿었습니다. 저와 같은 조건에서 시작한 선수들이 많은데, 저는 노력도 했지만 감사하게 운도 많이 따랐다고 생각해요.
또 타지에서 혼자 생활하다 보니 강해질 수밖에 없었어요. 스스로 결정하고 도전하면서 제 자신을 트레이닝했지요.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최고의 순간에 오르기까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부분은 한정돼 있어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가장 큽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샷을 구사할지 등 스스로 생각하며 혼자만의 싸움을 지속해야 해요. 특히 골프는 혼자 견디고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스포츠예요. 그 싸움에서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단단히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긍정적인 성격이 크게 도움 됐을 것 같아요.
솔직히 실패하거나 일이 잘 안될 때도 있어요. 하지만 또 다른 기회가 있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사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성적이 처지거나 안 좋은 일도 있었어요. 그럴 땐 이 또한 자연스럽게 겪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크게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 번 더 배우고 성숙해지려고 애썼지요. 그 순간에 닥치는 시련이나 충격은 크지만, 힘들어도 여기서 끝이 아니니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겨내려 노력했어요.
이제 '박세리 키즈’라고 불리던 선수들이 LPGA에서 맹활약하고 있어요. 소감이 남다를 듯합니다.
후배 누구라고 꼽을 것 없이 다 예쁘고 고마워요. 처음 '박세리 키즈’라는 말이 나왔을 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어요. 골프는 개인 운동이라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함께하지 않잖아요. 하지만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선수끼리 서로 의지하고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후배들이 저를 보며 도전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됐어요. '내 꿈이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책임감이 생기더군요. 제 뒤를 잘 이어온 후배들이 고맙고, 다른 후배들이 쭉 그 길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골프 후배들에게 전하는 충고나 조언이 있다면요.
후배 선수들에게 더 열심히,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요. 그만큼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저 또한 그랬지만 선수들은 자신에게 무척 인색해요. 하루가 골프로 시작해서 골프로 끝날 만큼 골프 외에는 인생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 삶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정신적으로 지치고 힘들어져요. 그런데도 지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나는 괜찮다’며 최면을 거는 경우가 많아요. 체력적으로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감추지 말고 말했으면 해요.
특히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골프와 인생에 있어서 밸런스를 잘 잡아라’는 거예요. 균형을 잘 잡으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고 즐거움도 있을 거예요. 사실 저는 선수 생활 내내 우승도 많이 하고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적은 별로 없어요. 노력해서 성과를 얻은 것에 대한 감격은 있었지만, 힘들었던 기억이 많고요. 또 항상 불안감 속에서 살다 보니 제 삶에 대한 즐거움이 전혀 없었어요. 후배들이 필드 안에서는 선수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붓되 경기가 끝나면 한 인간으로서 어떤 게 필요하고 중요한 게 무엇인지 중심을 잡았으면 해요. 은퇴 후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제 모습이 후배들에게 좋은 예가 됐으면 합니다.
2016년에 이어 2020 도쿄 올림픽 여자 골프 대표팀 감독직을 맡고 계세요.
대표팀 감독이 선수 생활만큼 힘들더라고요(웃음). 선수 생활 내내 골프가 올림픽 종목에 선정된다, 안 된다 말이 많았었어요. 그러다 은퇴하는 시즌에 마침내 올림픽 종목이 됐지요. 선수로서는 출전을 못 해도 감독으로 한번 참가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운이 좋게 감독직을 맡게 됐어요. 이후 리우 올림픽에서 박인비 선수가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후배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컸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해서 기뻤고 도쿄 올림픽 준비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감독으로 일하면서 후배들을 위해 많은 걸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후배들에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는 회사도 시작하는 계기가 됐어요.
스포츠 기업 CEO로 인생 2라운드 스타트
은퇴 후 3년 정도는 한국에 있으면서 골프 관련 해설과 일, 행사 등을 했어요. 골프 선수라는 인생 1막을 마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데 골프와 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잖아요. 바즈 인터내셔널은 골프 관련 교육 콘텐츠 제작과 골프 아카데미, 글로벌 스포츠 이벤트 기획 사업 등을 전개하는 회사예요. 후배들을 잘 관리해주고 싶은 제 마음이 담겼지요. 특히 교육적인 부분에 집중해 골프 아카데미 등을 통해 선수들이 체계적으로 관리받으며 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주니어 유망주들을 발굴해서 프로 선수로 잘 뻗어나가도록 돕고 싶어요. 기부는 제가 하는 일에 항상 포함되어 있는데 저소득, 취약 계층의 유소년 선수를 지원하는 등 지금까지 받은 사랑과 관심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싶어요. 아직 회사 규모가 작고 직원 수도 많지 않아 구성원들 모두 일인다역을 하고 있어요. 저 역시 현역 시절 못지않게 몸으로 직접 뛰며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판 낸시 로페즈를 꿈꾼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살아 있는 LPGA 전설’로 불리는 낸시 로페즈는 제게 롤 모델 같은 존재예요. 선수 생활에서도 많은 기록을 갖고 있지만, 예전에 대회 때 보면 한 인간으로서 그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은퇴 전부터 좋은 일을 많이 하셨고, 그런 모습이 제게 큰 깨달음을 줬어요. 저와도 친분이 있어서 미국에 갔을 당시 도움의 손길을 주셨고, 겸손도 배웠지요. '박세리가 예전에 잘했던 선수였지’가 아니라 '존경받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분을 보며 생각하게 됐어요. 특히 후배들에게 믿고 존경받는 선배가 됐으면 해요.
요즘 인간 박세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관심사는요.
아직까지 특별히 해보고 싶은 걸 찾지 못했어요. 지금은 일하는 게 더 즐거워 일에 열심히 매진하고 있답니다. 이를 위해서는 건강이 우선이겠지요. 건강하려면 잘 먹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꾸준히 다이어트 중이지만 삶에 있어 먹는 즐거움만 한 게 있겠어요(웃음)! 건강한 것을 찾아 먹고, 먹는 양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은퇴 후 바쁘다 보니 운동할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규칙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도 찾고 있고요.
제가 효과 본 날씬해 보이는 비법 중 하나는 바로 태닝이에요. 피부가 까무잡잡하면 셰이프가 생기면서 힘이 있어 보이잖아요. 선수 생활 관두기 몇 년 전부터 꾸준히 태닝을 했어요. 요즘에는 기계도 많이 좋아졌더라고요. '태닝 전도사’라 불릴 만큼 주변에 태닝을 권장하고 있습니다(웃음).
앞으로의 계획은요.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만큼 베푸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나눔이나 자선 사업과 관련해 폭넓게 일하고 싶어요. 자선 사업을 통한 나눔 행사 같은 걸 구상하고 있기도 해요.
IMF 당시 포기하지 않는 정신으로 국민들에게 많은 힘을 주셨잖아요. 코로나19로 힘든 요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은 어려울 때 다 함께 극복하며 이겨내는 힘이 큰 것 같아요. 힘들면 '으쌰으쌰’ 하며 이겨내잖아요. 또 서로 의지하며 위로하는 게 자연스럽고요.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힘들수록 많이 웃고 마음의 여유를 찾으며 서로에게 힘을 줬으면 해요.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며 차근차근 일어서면 또 한 번 단단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USGA 미국골프협회 홈페이지
글 강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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