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의 시화기행>외면당한 몽환.. 색과 빛 속으로 홀로 들어가다

기자 2020. 6. 1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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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생각하는사과, 30×40㎝, 종이에 혼합재료, 2020.
김병종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35) 고향 프로방스에서 안식 찾은 폴 세잔

비례·형태 맞지 않는 작품들

처음 볼 때부터 불편함 가득

철학적 분석 책 보고 깨달음

마음으로 그려낸 화가 이해

‘파리 정복’ 각오로 나선 세잔

관객·평단 비난받고 상처만

낙향 뒤 맘껏 자연·사람 표현

새로운 심미적 체험 이뤄내

세잔에 대한 내 최초의 불편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아마 미술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양 미술사 시간에 본 슬라이드 영상 화면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이라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한눈에 비례나 형태가 맞지 않아 보였다. 우측 팔은 너무 길고 얼굴을 고인 좌측 팔은 나무토막 같았다. 형태를 의도적으로 재구성한 것 같지도 않았다. 남자와 여자의 좌상들에서도 대충 뭉그러뜨린 듯한 손들, 분명 앉아 있는데 엉거주춤 서 있는 듯한 모습들이 눈에 거슬렸다.

나중에 오르세 미술관에서 다시 보게 된 ‘귀스타브 제프루아의 초상’, 그리고 도판으로 본 ‘빅토르 쇼케의 초상’, ‘세잔 부인의 초상’ 같은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 다시 서툰 소묘의 인체와 손 모양들의 그 불편한 그림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원래 재주가 여기까지였을까 아니면 재능을 숨기고 일부러 대충 그린 걸까. 그렇다 하더라도 나병 환자의 그것처럼 뭉툭한 손이며, 분명히 얼굴을 고이고 있는데 떠 있는 듯한 손 모양은 뭐람. 하긴 원래 동양에서도 최고 경지의 그림을 졸품(拙品)이라고 했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작가가 일부러 서투르고 못 그린 듯한 그림을 지향하긴 했지.

왜 아니겠는가. 피카소 또한 뛰어난 데생력의 소유자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의도적 못 그리기’를 시도했으니까. 그러나 그 교만하고 자신만만한 ‘못 그리기’ 속에는 그의 순발력 있고 뛰어난 데생 실력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세잔은 분명히 모델을 앉혀 놓고 그리기는 한 건데 머릿속으로는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는 듯한 느낌을 내보인다. 대상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져 보이는 것이다. 사실 세잔 그림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한 것은 나 이전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고 대표적인 것이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였다. 그는 미술관에 걸린 세잔의 불편한 그림을 만나게 되면 얼른 다른 작가의 작품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 불편함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었다고 고백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잔의 그 불편한 그림 속에서, 세잔이 본래 지향하는 세계가 A가 아닌 B였다는 것을 밝혀낸다. A가 아닌 B. 모델을 그리되 모델의 재현보다는 그 모델이 앉아 있는 장소성이며 시간성, 즉 공간과 공기 같은 것이 그의 머릿속에 더 선명하게 보였으니 눈앞의 유기체적 덩어리로서의 형체에는 무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논지이다.

그러다 세잔 그림에 대한 나의 불편함이 해소되는 계기가 왔다. ‘세잔의 사과’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국내 미술사가 전영백 교수가 쓴 이 책은 말하자면 세잔 그림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었다. 메를로퐁티는 물론 프로이트, 들뢰즈, 라캉 같은 철학자, 미학자들이 동원되고 있었다. 책장을 덮으면서 비로소 느끼게 됐다. ‘맞아, 이 작가는 눈과 함께 마음을, 손과 함께 정신을 동원하고 있구나. 그래서 형태보다는 그 형태의 구조를, 그 형태가 담긴 공간을 그리고 그 공간이 다시 시간과 섞이는 것을 응시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그의 대충 그린 듯 두루뭉술한 그림들, 대상이 배경과 잘 분리되지지 않는 그림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세잔 보기에서 세잔 읽기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문명의 사과 세 개. 뉴턴의 사과, 스티브 잡스의 사과 그리고 폴 세잔의 사과. 어떻게 붉디붉은 그 과일 하나가 저마다에게 ‘유레카!’일 수 있었을까. 폴 세잔. 그의 고향인 프랑스 남쪽 엑상프로방스. 황토와 초록 그리고 붉은 지붕, 흰 회벽의 오래된 도시. 그는 유년시절 이곳에서 같은 반 친구 에밀 졸라를 만난다. 건축가 장 바티스탱 바유와 함께. 세 소년은 죽이 맞아 어울렸다. 특히 아버지 없이 가난한 집 아이였던 데다 근시에 병약했던 졸라는 또래들에게 자주 놀림을 당했고 그때마다 덩치 큰 부잣집 아들 세잔은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이것이 고마워서 어느 날 그는 세잔에게 사과 한 알을 건넨다. 나중에 화가가 되기로 하고 무작정 상경해 파리로 왔을 때 세잔은 옛날의 그 사과를 떠올리며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사과로 파리 화단을 정복하겠다는 각오와 함께. 그러나 에콜 데 보자르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공모전에서도 연달아 낙선하면서 그는 침울하고 의기소침해졌다. 아버지의 집요한 요청을 차마 떨칠 수 없어 다녔던 법대마저 때려치우고 도전한 화가의 길이었지만 파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발표할 때마다 그의 그림은 평론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비호감으로 찍혔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안정한 구도와 입체감 없이 분산되며 뭉개지는 듯한 형태들은 아름답기보다는 모호했고 사물을 마치 공중부양하듯 요모조모 뜯어보고 분석하는 식의 그의 그림은 눈에 설었다. 급기야 자연은 원기둥과 구 그리고 원뿔로 돼 있다는 등의 자의적 예술관을 내밀면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했다.

부풀어진 빛과 색의 견고한 내부로 들어가 새로운 심미적 체험을 하고 싶었던 그의 열망은 파리에서 재주 없는 화가의 잠꼬대쯤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는 더는 견딜 수 없어 어느 날 짐을 꾸려 낙향한다. 꿈에도 그리던 물과 햇빛과 라벤더 향기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생트빅투아르산을 비롯한 풍경들을 그리고 사람들을 그렸으며 물론 수없이 많은 사과를 그렸다. 누구의 마음에 들 필요도 없고 인정받고 싶은 이유도 없이 홀로 그리고 그렸다.

그렇게 창밖에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고 다시 눈 내리고 새싹이 나도록 그는 고향의 자연과 사람들을 화폭으로 초대했다. 그렇게 과학 같은 그림을 외롭게 그리던 어느 날 손에서 붓을 떨구고 숨진다.

엑상프로방스, 넓고 푸른 벌판, 흔들리는 나무, 저만치 솟아 있는 생트빅투아르산 그리고 그 옛날 친구로부터 받았던 사과 몇 알의 추억을 건져 올려 탁자에 놓인 사과들. 그것들과 함께 그는 고향의 느리게 가는 시간과 따뜻하면서도 푸근한 공기를 바라본다. 그 시간 속에서 섞여 흐르는 손에 잡힐 듯한 바람, 그리고 그 바람이 실어온 라벤더 향기를 그리고 싶어진다. 아아 저 산을 에워싸는 그리고 이 탁자의 정물들과 섞여드는 그 시간의 냄새마저 그릴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파리에서 실패한 화가 폴 세잔. 그는 비로소 고향에서 다시 일어선 것이다.

오래된 남쪽 도시 엑상프로방스. 물의 도시, 라벤더 빛의 도시. 너르고 푸른 벌판을 지나면 닿게 되는 인상파의 그림 같은 그 도시. 붉은 기와. 하얀 회벽 군데군데 흙길 그리고 푸른 나무들의 정겨운 동네들. 미라보 거리의 로통도 광장, 세잔이 드나들었다는 카페 레 되 가르송과 그가 홀로 그림 공부를 했던 그라네 박물관. 그리고 그의 옛 아틀리에. 나는 풍경을 통해 하염없이 세잔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폴 세잔, 그는 아직도 엑상프로방스에서 은둔자로 살아 있었다.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

■ 폴 세잔과 에밀 졸라

절친에서 절교로… 소설이 갈라놓은 30년 우정

화가 폴 세잔(1839∼1906·왼쪽 사진)과 작가 에밀 졸라(1840∼1902·오른쪽)는 엑상프로방스 부르봉 중학교 동기생이었고 절친이었다. 유복한 은행가의 아들 세잔과 편모슬하에서 자란 가난하고 병약했던 졸라는 함께 엑상프로방스의 강과 산을 쏘다니며 예술가적 감성을 키웠다. 먼저 파리로 가서 작가 수업 과정을 거치던 졸라는 수시로 세잔에게 편지를 써서 망설이지 말고 화가의 길로 나서라고 권유하곤 했다.

당시 은행장 출신의 아버지는 세잔에게 한사코 미술가가 아닌 법률가의 길을 걷도록 강요하던 상황이었다. 결국 다니던 법대를 중퇴하고 파리로 간 세잔은 그러나 별로 주목받지 못한 채 살롱전에서도 연거푸 낙선하고 결국 고향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미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가 된 졸라가 신작 ‘작가’를 엑상프로방스의 세잔에게 보내면서 30년 우정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세잔은 그 소설에 나오는 실패한 화가 랑티에가 바로 세잔 자신이었다고 생각했고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졸라가 책을 보냈다고 생각했던 것. 그는 1886년 4월 4일 정중한 절교의 편지를 졸라에게 보냈고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1902년 9월 어느 날 졸라가 벽난로의 가스중독으로 사망했을 때 세잔은 누구보다 애통해하며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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