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의 詩편지](33)매일의 삶에서 맛보는 기쁨
[경향신문]
어떤 행복
하늘이 바다인지
바다가 하늘인지
기쁨이 슬픔인지
슬픔이 기쁨인지
삶이 죽음인지
죽음이 삶인지
꿈이 생시인지
생시가 꿈인지
밤이 낮인지
낮이 밤인지
문득문득 분간을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분간을 잘 못하는
이런 것들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네요
그냥 행복하네요
이런 행복을
무어라고 해야 할지
그냥
이름없는 행복이라고 말할래요
- 시집 <작은 기도> 중에서
어떤 결심 하나
내 사랑하는 이들의
외딴 무덤가에
풀들이 자라는 동안
나는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고
마음을 모읍니다
그들이 못다 한 사랑까지
다 하고 가려면
한순간도
미움을 허락해선 안 됩니다
눈만 뜨면 할 수 있는
조그만 사랑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동그란 무덤가에
바람이 부는 동안
나는
더 많이 웃어야겠다고
노래해봅니다
그들이 못다 한 웃음까지
다 웃고 가려면
한순간도 우울할 틈이 없습니다
눈만 뜨면 발견하는 조그만 기쁨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 시집 <작은 기쁨>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동기 수녀 중 한 명을 저세상으로 보낸 6월의 첫날, 뻐꾹새 소리를 들으며 하얀 나비들의 춤을 보노라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네’ 하는 생각에 슬픔도 잠시 잊어봅니다. 고별사에서 저는 과묵하고 덕이 넘쳤던 그녀의 일생을 초록빛 침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6월에 먼 길 떠난 친구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합니다. 요즘은 거의 매일 누군가의 아프고 슬픈 사연을 듣고 뜻하지 않은 사고와 병으로 죽어간 이들의 부음을 들으니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잘 웃게 되질 않습니다. 우리 수녀원 성당 앞 게시판에는 거의 매일 다른 교구 사제나 수녀들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우리집 수녀들의 부모나 형제들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붙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자’ 이런 말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해봅니다. 어쩌다 가끔은 죽은 이들이 꿈속에 나타나 기도를 부탁하거나 살아 있는 동안 더 열심히 살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체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할 적마다 일상의 길 위에서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사랑하고 죽을 힘을 다해 용서하고 죽을 힘을 다해 기도한 적이 있는가 반성하곤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작은 사랑과 기쁨을 만드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예민함에서 아주 조금만 이타적인 예민함으로 건너가는 용기일 것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방콕, 집콕, 자가격리, 물리적 거리 두기라는 단어 자체가 소외감과 단절을 느끼게 해서인지 오랜만에 외출이 허락되어 못 보던 친지를 만나게 되면 전보다 훨씬 반갑고 따뜻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소박한 행복이 아닐는지요. 딱히 치매에 걸리지 않더라도 살다보면 정신없고 무언가 잘 식별이 안 되는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힘들고 부끄러워 숨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햇빛 속에 살아서 사랑하는 이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기쁨을 새롭게 감사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이가 하나의 점과 선처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재발견해 가는 기쁨도 감사하면서 먼저 세상 떠난 이들의 ‘살고 싶었던 몫’까지 살아야겠다는 욕심을 가져봅니다.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면 죽을 때도 기쁨과 행복을 끌어안는 사람이 될 것이라 믿으며 가만히 두 손 모읍니다.
이해인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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