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어둠에 갇힌 슈만의 고통 이제야 이해된다

통영=김경은 기자 2020. 6. 9.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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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그날 아침 백건우는 시장통 골목 밥집에서 시래깃국과 해초 무침으로 배를 채웠다. 그러곤 시외버스 터미널 옆 마트에 가서 셔츠를 사 입었다. 3만원짜리였다. 65년째 전 세계를 돌며 부지런히 활동한 그이지만 자신에겐 도통 돈을 쓰지 않는다. 한여름마냥 눈부신 빛이 쏟아진 그날도 일흔넷의 정상급 피아니스트는 허름한 구두에 반들반들한 손가방만 들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였다.

경남 통영에서 3만원을 주고 산 셔츠를 입고 바닷가 바위에 걸터앉은 백건우.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녘이면 통영 주민들은 항구 주변을 산책하며 스마트폰으로 들꽃이나 돌멩이를 찍는 그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빈체로

두 살 연상 아내 윤정희가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다고 밝힌 지 7개월. 그는 파리에서 머물다 지난달 한국에 들어왔다. 9일 서울에서 독일의 본 베토벤 오케스트라와 내한 공연을 할 예정이었으나 여전히 기승인 코로나 탓에 취소됐다. 백건우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강원도의 한 펜션에서 자가 격리한 뒤 곧장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으로 내려가 톤마이스터 최진과 함께 슈만 신보(도이치 그라모폰) 녹음에 들어갔다. 그는 오전 10시부터 텅 빈 홀에서 혼자 피아노를 쳤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슈만의 도시' 뒤셀도르프의 슈만홀에서 했을 작업이다. 지난달 30일 통영에서 만난 백건우는 "거기서 슈만을 생각하면서 하고 싶었지. 아쉽긴 한데 온 세계가 다 그러니까" 하며 탄산수를 삼켰다. 아기자기하고 부드러운 '아베크 변주곡'부터 내면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낸 '유령 변주곡'까지 낭만적이면서도 고통으로 얼룩진 슈만의 다양한 얼굴을 담는다.

2017년 그는 서른둘인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일주일 동안 연주했다. 2011년엔 북한의 포격을 받은 서해 연평도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지난해엔 쇼팽 야상곡 전곡 음반을 냈다. 슈만은 더더욱 만만치 않은 작곡가다. '구도자(求道者)'라는 별명답게 매번 어려운 길을 찾아 도전하는 것 같다는 말에 그는 "어느 순간 그 음악에 꽂히면 내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뭔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했다.

아리도록 아름다운 곡들을 남기고 간 슈만은 아홉 살 어린 천재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결혼했지만 그 자신은 피아니스트로서도, 작곡가로서도, 평론가로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평생 열등감에 시달렸고, 결국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슈만을 파고들기 위해 몇 달간 악착같이 매달렸다는 백건우는 "젊을 때 본 슈만과 지금 보는 슈만은 그 농도가 다르다. 참 복잡한 인생이고, 그만큼 아픈 삶도 없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헤르만 헤세는 슈만의 음악이 스스로를 집어삼킨 어둠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했는데, 여러 가지를 경험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나도 그의 깊은 바닥부터 이해가 되는 거죠." 그래서 "더 애처롭고 사랑스럽고 정확하게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나 역시 콤플렉스가 굉장히 많았던 사람이거든요."

피아노와 살게끔 초석을 깔아준 아버지는 피아노를 못 쳤다. 교습소를 운영한 어머니는 밥벌이를 하느라 정작 아들에겐 피아노를 가르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그에게 하루 대여섯 시간씩 연습을 강요했다. 순했고, 상상력이 풍부했던 소년은 죽도록 피아노만 쳤다. 열다섯 살에 혼자 뉴욕에 유학 간 까닭도 그런 아버지와 떨어져 살겠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해 몸에 밴 '나쁜 버릇'은 유령처럼 그를 따라붙었다. '나는 좋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그를 평생 쫓아다녔다.

1972년 뮌헨에서 처음 만난 윤정희와 44년을 어깨 비비며 함께 살았다. 외롭지 않으냐고 물으니 "피아니스트는 원래 혼자 싸우는 직업"이라고 했다. 아내가 유일하게 알아보는 사람이 그다. 그러나 기억력은 3분을 못 넘긴다. 돌아서면 잊는 아내를 떠올리며 달변이 아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지금도 최대한 하고 있고…."

연주 하나하나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경쟁에서 64년을 버텼다. 신보가 나오면 누구에게 제일 먼저 줄 거냐 물으니 그가 흐흐흐 웃으며 말했다. "그건 묻지 않아도 알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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