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어머니 기도 녹음한 릴 테이프.. 당신의 추억을 수리합니다"

김성윤 기자 2020. 6. 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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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수리수리협동조합 이승근 이사장
세운상가 수리수리협동조합 사무실은 온갖 전자기기와 부품, 수리도구로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 나름의 질서에 따라 묘하게 정돈된 공간이었다. 그 한복판에서 이승근 수리수리협동조합 이사장은 손님의 추억과 사연이 담긴 기계를 수리한다.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세운상가 2층 '수리수리협동조합' 사무실은 '마란츠' '피셔' '티악(TEAC)' 'RFT' '인켈' 등 가물가물 희미해진 브랜드의 앰프와 턴테이블,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 스피커, CD플레이어로 가득했다. 진공관, IC회로, DC모터, 스피커 유닛, 방열판, '도란스'(변압기) 등 전자 부품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소설가 황정은이 세운상가에서 음향 기기 수리 일을 하는 60대 남자를 주인공으로 쓴 '웃는 남자'에서 묘사한 대로 "전류가 흐르는 쇳덩어리의 냄새, 납과 구리, 기계 속에 감춰진 코일이 달궈지는 냄새, 먼지 타는 냄새"가 공기에 가득했다.

어수선하고 복잡하지만 그 나름의 질서에 따라 묘하게 정돈된 공간 한복판에서 이승근(75) 수리수리협동조합 이사장이 기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일본 컬럼비아(Columbia)사에서 1970년대 생산한 포터블(휴대형) 턴테이블이었다. "턴테이블 수리가 이상하게 많이 들어와요. 한 2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이 턴테이블을 고쳐달라고 가져오네요. LP가 인기인가 봐요."

이승근 이사장은 세운상가에서 오랫동안 전자 기기를 다뤄온 수리 장인 5명과 함께 2017년 수리수리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다른 곳에서는 도무지 고칠 수 없는 오래된 전자 기기를 수리수리 마술처럼 되살려낸다.

―조합은 어떻게 설립됐나요.

"세운상가 재생을 위한 서울시의 '다시, 세운' 프로젝트 담당자들과 2015년 추억과 사연이 있는 전자제품을 고쳐주는 프로젝트 '수리수리얍' 워크숍을 3차례 진행했어요. 5개월 동안 수리 요청 142건을 접수해 제품을 70건 수리할 정도로 호응이 컸어요. 더는 자신의 기술을 찾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던 수리 장인의 자부심을 높이고 보람을 느끼는 계기가 됐지요. 취지에 공감하는 후배들과 의기 투합해 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조합원 숫자가 의외로 적습니다.

"정식 조합원은 여섯이지만 실제 따지고 보면 세운상가의 모든 수리 장인이 조합원이나 다름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여기(조합)로 수리 문의가 들어오면 우리가 알아서 '이 사람은 이거 전문, 저 사람은 저거 전문' 이렇게 분담해서 수리하거든요. 조합을 통해서 세운상가 일대가 다 같이 융합이 되는 거죠."

―조합 설립 3년째입니다. 여전히 수리 문의가 많은가요.

"엄청 들어와요. 오디오뿐만 아니라 안마기, 고데기, 믹서기, 선풍기 등 전기를 사용하는 기계는 다 문의가 들어와요. 문의는 한 달에 100여 건이고 이 중에서 접수 신청을 받아 수리하는 건 60~80건쯤 됩니다."

―접수하는 기준이 있나요.

"처음에는 '고치기 어렵지만 꼭 고쳐야 하는 이유와 추억이 깃든 물품'이라는 기준을 세웠어요. 하지만 요즘은 물건을 보고 고칠 수 있겠다 싶으면 다 받아줘요. 웬만하면 해줘요. 고쳐달라는데 사연이 없다고 안 받을 수는 없더라고요. 그리고 오래된 기계는 사연 없는 게 없어요. 수리가 안 되는 건 반드시 안 된다고 말씀드려요. 그러면 개운하잖아요.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아니까 다신 고생 안 하죠."

―수리 비용이나 기간은 어떻게 되나요.

"병원에서 사람이 치료받는 것과 똑같죠. 암처럼 길고 힘든 수술을 해야 하는 병이 있는 반면, 주사 한 방이면 낫는 병도 있지요. 기계도 비슷해요. 간단한 수리는 1~2시간이면 되지만, 어려운 건 몇 달 걸리기도 하지요. 수리비도 2만~3만원부터 30여 만원까지 천차만별이에요. 일단 기계를 봐야 말씀드릴 수 있어요."

―조합 만들고 수입도 늘었나요.

"거기서 거기예요. 조합 안 해도 오래된 단골이 많아서 일은 꾸준히 있어요. 추억을 되찾아드린다는 보람으로 하는 거지 돈 때문에 하는 일은 아니지요."

이 이사장은 이 상가의 최고참 수리 장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3년부터 라디오 등 전자 기기를 만들고 수리하다 1968년 상가가 만들어지면서 입주했다. 진공관 앰프 등 빈티지 오디오 전문인 그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음향 기기를 다룰 줄 알고, 부품이 단종됐거나 대체품을 찾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고칠 수 없는 음향 기기는 없다"고 단언했다.

―고칠 수 없는 음향 기기가 진짜 없나요.

"기본은 다 똑같아요. 모양이 달라질 뿐이죠."

―어떻게 수리 장인이 되었나요.

"어려서부터 이쪽을 좋아했어요. 청계천에 온갖 망가진 부품이 널려 있었어요. 집이 근처라서 초등학교 때 구경 삼아 걸어 나와서 길바닥에 떨어진 전깃줄이나 배터리 따위를 주워다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그랬어요. 어릴 때부터 이게 재밌어서 다른 건 아예 관심이 없었죠. 고등학교도 전기과로 갔고요. 옛날 이 근처에 '무전기 골목'이라고 있었는데, 거기 길에다가 진열장 놓고 라디오도 만들고 부품도 팔았어요. 그러다 가게 얻어서 장사하다가 1968년 세운상가가 세워지고 들어왔죠."

―그 뒤로 쭉 있었으니 그야말로 세운상가의 산증인인 셈이네요.

"세운상가의 전성기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예요. 그때는 게임기가 많았죠. 1992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노래방 기계 판매와 수리가 활발했어요. 1995~1996년쯤부터 침체되기 시작하면서 전자제품 판매점들이 용산전자상가 등으로 빠져나갔어요. 수리하는 사람들은 계속 남았죠. 어딜 가나 똑같으니까요."

―빈티지 오디오 등 음향 기기로 특화한 이유가 있나요.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세탁기 같은 다른 전자제품은 고장 나면 고치지 않고 버리고 신제품을 사지요. 하지만 빈티지 오디오는 특유의 음색(音色)을 선호하는 마니아가 많아서 고쳐 쓰고 오래 써요. 그러다 보니 음향 계통 기기 수리 문의가 많이 들어오죠."

―60년 가까이 해왔는데, 지겹지는 않은가요.

"지겹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재미있죠. 기계를 고친다는 건 재밌는 거예요. 먹통이 된 기계를 한참 수리해서 소리 날 때가 가장 기분 좋죠."

―가장 기억에 남는 수리는 뭔가요.

"릴(reel) 테이프 오디오를 고쳐달라는 남자분이 있었어요. 평생 자식 걱정하며 기도하던 어머니가 생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기도가 담겨 있다고 하셨죠. 어머니의 내리사랑을 자식들에게 가보로 남겨주고 싶다는 사연이 담긴 물건이었어요. 이처럼 부모님이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고쳐 갈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자기 부모를 다시 만난 것처럼 기쁘다고들 해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가 제일 보람 있죠."

인터뷰를 마칠 때쯤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배낭을 열어 1995년 생산된 삼성전자 8㎜ 비디오카메라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비디오테이프 넣는 곳 뚜껑이 닫히질 않아요. 얼마 전까지 멀쩡했거든요. 저희 가족의 추억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집에 많은데, 이 비디오카메라가 없으면 틀어 볼 수가 없어서요. 고칠 수 없을까 싶어서 가져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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