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수업'과 n번방 앞에서 윤리란?

2020. 6. 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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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33)
'인간수업', 스마트폰을 통해 벌어지는 21세기판 '죄와 벌'
‘인간수업’의 한 장면. 출처: 아이엠디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로 영화관에 가거나 모임에 참여하기 어려워진 많은 사람이 넷플릭스와 같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하는 가운데, 엔(n)번방 사건이 밝혀지면서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 있습니다. 김진만 감독이 연출하고 진한새 작가가 각본을 쓴 ‘인간수업’입니다.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스마트폰을 통해 성매매를 알선하는 일을 하는 설정이 나오자 10, 20대 청년들이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성착취물을 제작, 판매한 엔번방 사건과 유사성을 놓고 작품의 인지도가 높아졌으며, 흡인력 있는 연출과 그동안 국내에서 볼 수 없던 과격하고 강렬한 각본, 등장인물들의 호연으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인터뷰에서 진한새 작가는 “죄는 왜 나쁜가”라는 질문을 다시 탐구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1] ‘인간수업’에서 주인공인 오지수(김동희 분)는 자신이 하는 성매매 알선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극이 전개되면서 자신이 벌인 일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합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그에겐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이 있고, 이를 위해 학업과 병행 가능한 쉬운 일을 선택했다고 굳게 믿기에 벌어진 사건을 죄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주인공을 그렇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이런 구도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사회 기생충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여 주변에 이익을 가져다주고자 하며, 그렇기에 자신의 행위는 악행이 아니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런 그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가 소설 속 등장하는 논문에서 밝히는 이후 초인(超人)으로 불리는, 비범한 사람은 기존 사회의 규범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합리를 믿은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정당화하려 하다가 결국 허물어져 갑니다.

‘죄와 벌’ 라스꼴리니꼬프와 ‘인간수업’ 오지수 사이에는 150년이라는 시간과 함께, 세상을 완전히 바꾸고 있는 기계가 놓여 있습니다. 스마트폰입니다. 2007년 1월9일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소개한 지도 10년이 넘었으며, 이미 컴퓨터와 디지털화가 촉발했던 변화를 스마트폰은 직접 사회에 구현해 왔습니다. 벌써 스마트폰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 어렵고, 2020년 세계를 뒤흔든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데도 스마트폰은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에도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엔번방 사건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인간수업’에서 오지수가 벌이는 범죄 행각도.

스마트폰이 잘못은 아니며, 스마트폰이라는 가공할 양날의 검을 잘못 휘두른 사람을 탓하는 것이 우리에게 간편하고 익숙한 생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이전에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하고 있다면, 그 변화를 그저 인간의 편에서만 사고하는 것도 충분한 고찰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도구의 관점에서 살핀다면 ‘죄와 벌’과 ‘인간수업’이 구도도 비슷하고 핵심 질문도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주인공이 도끼를 든 인간과 스마트폰을 든 인간이라는 차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를 각각 도끼 인간과 스마트폰 인간이라고 불러보면 어떨까요. 두 인간의 차이를 한번 진지하게 살펴보는 것은 두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죄의 문제를, 아마 ‘죄와 벌’이 쓰인 19세기 말과 지금 여기, 21세기 초 인간 조건의 차이를 정밀하게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선 먼저 ‘인간수업’의 얼개를 훑고, 이를 ‘죄와 벌’과 비교해 도끼 인간과 스마트폰 인간을 구분해보려 합니다. 여기에서 스마트폰 인간의 특징을 찾아낸다면, 엔번방 사건이 우리에게 강력히 요구한 ‘스마트폰의 윤리’라는 이름으로 나아가는 입구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1세기 범죄의 평범함을 그리는 ‘인간수업’

‘인간수업’의 오지수는 고등학교에서 조용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학생입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원 다니느라 정신없이 지내는 ‘아싸’인 지수에겐 비밀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부양 능력이 없는 지수는 학교에 다니기 위해 돈을 버는 수단으로 조건 만남 알선을 활용합니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삼촌’이라는 가명으로 조건 만남 일을 하는 여성들을 관리하는 겁니다. 만남을 원하는 남성을 이들에게 연결하고, 혹시 문제가 생기면 안전을 관리하는 이 실장(최민수 분)을 통해 여성들을 구해냅니다. 지수는 이 일이 여성들을 보호하는 ‘경호 사업’이라고 생각해 잘못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지수의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것입니다. 대학을 가고 직업을 얻는 평범한 삶을 위해 그는 계속 발버둥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 자신이 하는 일은 괜찮다고 믿습니다. 이런 지수를 비난하기 쉽지 않은 것은 그를 주변의 누구도 돌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능력한 아버지(박호산 분)는 지수를 부양하기는커녕, 그래도 돈이 있는 지수 어머니에게 접촉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수를 사용해 왔습니다. 극에서 사진으로만 등장하는 지수 어머니 또한 지수를 돌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히 혼자, 가족도 친구도 없이 고립된 지수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나름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학교에서 완전 ‘인싸’이고 부잣집 딸인 배규리(박주현 분)입니다. 규리는 친구 관계도, 공부도, 집에서의 모습도 완벽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규리를 향한 부모의 기대는 무척이나 높고, 이런 삶에 규리는 숨 막혀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규리는 돈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학교 부서 활동으로 우연히 엮인 지수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상당한 돈을 만지고 있음을 알게 된 규리는 지수의 돈을 훔치려 합니다.

하지만 규리의 시도는 갑자기 나타난 지수 아버지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지수 아버지가 지수에게 큰돈이 있음을 알고 돈을 들고 달아납니다. 지수는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의 환경을 규리에게 털어놓게 되고, 규리는 자신도 이 일에 끼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지수와 규리가 변화한 상황을 무마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상황은 혼란에 빠져듭니다. 학교 일진, 조직폭력배, 경찰이 지수와 규리의 일에 끌려들어 오면서 일은 호미난방 격이 되어 가는데, 지수와 규리는 몰아치는 폭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인간수업’의 오지수는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점점 파국으로 밀려가는 그리스 고전의 주인공을 닮았다. 고전의 구성에 현재의 설정을 얹는 것은 좋은 선택인데, 인간의 원초적 질문은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처: 넷플릭스

사건이 휘몰아치는 것을 잘 그려낸 ‘인간수업’은 우연이 겹치는 후반 때문에 아쉽다는 평을 듣습니다. 사실 고립된 주인공이 자신의 성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이것이 환경의 영향으로 복잡해지는 전개는 뒤이어 살필 ‘죄와 벌’에서, 그리고 그리스 비극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구도입니다. 이들 작품이 최종 해결을 우연에 맡기고 있다는 점도. 무엇보다 ‘인간수업’에 등장하는 이들의 죄엔 어떻게든 벌이 가해지는데, 이것이 어떤 장치 없이 상황이나 사건의 내적 구성에 따라 자연스레 구현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벌이 가해져야 할까요? 특히 주인공 지수의 경우 그가 돈을 벌고자 했던 것은 탐욕 때문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에게 꼭 어떤 벌이 가해져야만 하는 걸까요? 이를테면 지수는 극 중간에서 그동안 모든 돈을 다 잃고 조건 만남 알선 일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정직한’ 일을 통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택배 업무를 수행한 결과, 지수는 중간고사에서 처참한 성적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평범하고자 하는 지수가 뭐 그리 잘못한 걸까’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작품에서 조건 만남 알선이라는 일이 그렇게 나쁘지 않고, 지수가 말한 것처럼 오히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조건녀’를 보호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수는 성매매 알선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여기엔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극에서 중요한 것은 지수가 어떻게 파멸할 것인가, 그리고 그는 죄 앞에서 어떻게 고뇌할 것인가가 됩니다. ‘인간수업’ 초반에서 지수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구구절절 묘사하고 아버지를 통해 그동안 모든 돈까지 모두 날리게 만드는 것은 시청자가 지수의 고뇌를 같이 느끼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와 오지수의 공통점

이런 구도는 말씀드린 것처럼 ‘죄와 벌’에도 똑같이 나타납니다.[2] 고립된 채 극도의 가난에 처해 있는 법과대학생 라스꼴리니꼬프는 어떤 생각에 빠져듭니다. 세계엔 평범한 인간과 비범한 인간 두 종류가 있는데, 평범한 인간은 사회의 관습에 매여 살지만 비범한 인간은 관습을 넘어서는 일을 해도 처벌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훌륭한 일이라고 칭송을 받는다는 겁니다. 나폴레옹이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나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고 당대의 영웅이 된 것처럼.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비범한 인간인지 알고자 하며, 이를 위해 사회적 쓰레기인 고리대금업 노파를 살해하고자 합니다. 노파는 죽으면 가진 돈을 모두 기부한다고 유언장을 써 놓았는데, 이 시기를 당기는 것은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한 달 내내 고민하고 계획한 라스꼴리니꼬프. 그는 계획을 포기할 뻔하기도 하지만, 우연에 이끌려 노파와 그의 자매 리자베따를 도끼로 살해합니다.

범행을 들키지 않은 라스꼴리니꼬프는 이윽고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로 인해 끔찍한 고뇌에 빠져들게 됩니다. 여기에 여동생 두냐와 구혼자이며 속물인 루쥔의 이야기, 라스꼴리니꼬프가 우연히 만난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와 그 가족,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소냐의 이야기가 겹칩니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총명한 두냐는 가난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택하려 하고, 이 상황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충족하려 하는 루진과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라스꼴리니꼬프와 충돌합니다. 한편, 술에 중독되어 형편없이 망가진 마르멜라도프는 마차에 치여서 사망하고, 그의 죽음은 아무 관계가 없던 라스꼴리니꼬프와 소냐를 연결합니다.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자신의 옳음을, ‘양심’을 추구하던 라스꼴리니꼬프를 ‘구원’하는 것은 배움도 없고 가장 천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냐입니다. 자기 일이 죄가 아니라고 계속 부정하던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를 통해, 그것이 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2015년 펭귄 클래식이 내놓은 ‘죄와 벌’ 영역본 신판은 조하 라자르의 인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을 담았다. 자신의 합리성을, ‘정신’을 증명하기 위해 노파를 도끼로 살해한 라스꼴리니꼬프는, 도끼와 피의 물질성에서 달아나지 못한다. 출처: 아마존

‘인간수업’의 오지수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 사이에는 유사점이 여럿 보입니다. 우선, 둘 다 끔찍한 고립에 처해 있습니다. 둘 다 아파트 옥상에 살고 있으며, 이야기 터놓을 사람 없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갑니다. 둘을 괴롭히는 가장 큰 이유는 가난이죠. 어디 의지할 데도 없이 궁핍에 내몰린 청년들. 오지수는 고등학생이고 라스꼴리니꼬프는 대학생이지만, 둘 다 뛰어난 학습 능력을 보입니다. 1등급의 오지수, 주변에 지적 능력을 인정받고 논문도 발표한 휴학생 라스꼴리니꼬프. 하지만 둘의 가장 큰 유사점이라고 한다면, 계속 자신의 범죄를 부정하려 한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 이유 또한 뛰어난 인간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겹쳐 있습니다. 오지수는 범죄로 벌어들인 돈을 통해 평범한 삶을 꿈꾼다고 말하지만, 그가 목표하는 곳은 ‘스카이’, 즉 명문 대학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살해를 저지르는 이유는 자신의 비범함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지요.

스마트폰 인간이 된 우리의 과제

두 사람의 차이라면, 역시 도구입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도끼를 들어 노파와 리자베따를 살해합니다. 오지수가 고등학생임에도 거리낌 없이 성매매를 알선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끼 인간 라스꼴리니꼬프와 스마트폰 인간 오지수에게 엄청난 차이를 부여하는 것은 도구의 물성입니다. 도끼 인간은 도끼의 자국을 지우기 위해서 안간힘을 씁니다. 우연히 손에 넣은 도끼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려 들킬 위험을 감수하는가 하면, 도끼를 숨기기 위해 외투에 붙였던 올가미, 피가 묻은 바지, 주머니, 양말이 자신의 범행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까 봐 소설 내내 전전긍긍합니다. 그를 몰아세우는 것은 열병을 앓는 그의 편집증적 불안이며, 불안의 원인은 꼼꼼히 숨겨놓은 범행의 흔적들입니다. 도끼 인간은 범행을 은폐하려 어떻게든 노력하지만, 도끼는 자꾸 자신의 흔적을 드러내며 탈은폐합니다.

반면, 스마트폰 인간에게 스마트폰은 인간의 육체를 지우는 도구가 됩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연락하기에 고등학생 오지수는 연령 미상인 ‘삼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스마트폰이라는 연막 뒤에 숨어 성매매 과정을 지휘하고, 여기에서 스마트폰은 흔적을 지움으로써 범행을 작동시킵니다. 스마트폰 인간이 위기에 처하는 것은 스마트폰이 노출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마트폰이 가리고 있는 그의 모습이 노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흔적을 감춰야 하는 도끼와 달리, 범죄자의 몸도, 범죄 흔적도 감추는 은폐의 도구가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 인간이기에, 그는 흔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2020년 5월11일 검거된 엔번방 운영자 ‘갓갓’의 사례는 스마트폰 인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텔레그램 메신저에 비밀방을 만들어 피해 여성의 정보와 성착취물을 올린 그.[3] 절대 잡히지 않는다고 공언한 바 있는 ‘갓갓’은 경찰이 디지털 수사기법을 통해 제시한 증거 앞에서 결국 범행을 자백했습니다.[4] 그가 자신만만할 수 있던 것은 스마트폰이라는 은폐의 도구가 그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피해 여성을 성착취한 것도, 결코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만이 없었다면 행해지기 어려웠겠지요.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는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있다고 하여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흔적을 지울 방법이 퍼져가고 그것이 고도의 컴퓨터 지식을 지니지 않더라도 가능해지고 있는 지금, 이 지워져 가는 흔적이란 현상은 응당 주목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성을 보장받는 것,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될 수도, 흔적이 없는 유령이 될 수도 있는 것은 현실과 다른 정체성을 시험하고 실천할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폭력과 가혹함을 선 없이 표출하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범죄로 이어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여기에 해결책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감시일 겁니다. 은폐하는 것을 드러내는 감시라는 실천. 문제는, 감시와 검열 사이 선이 모호하다는 것이죠. 예컨대, 엔번방 사건을 놓고 감시를 강화하는 법이 논의되었고 이는 검열이 아니냐는 비난의 목소리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5월 7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한 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온라인을 통해 유통되는 불법 촬영물을 차단·삭제하는 의무를 부가통신사업자에게 부과했습니다.[5] 이는 사적 정보 침해 우려가 있다는 사업자의 반발을 샀으나, 방송통신위원회는 검열이 아니라고 답했습니다.[6] 사적 대화를 대상에 포함하지 않고 자체적 모니터링 의무를 부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인데요. 그러나, 여기에서 감시와 검열은 쉽게 나뉘지 않으며, 보호를 위한 감시는 쉽게 통제와 지배를 위한 검열로 바뀌곤 합니다.

페이스북의 자동 검열은 명화를 차단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위 사진은 벨기에 플랑드르의 ‘루벤스 하우스’에 걸린 루벤스의 명화를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페이스북 측에 보내는 벨기에의 풍자용 뉴스 영상이었다고 한다. 출처: 케이비에스[7]

이는 국내에서 소셜미디어 서비스와 메신저 등이 전달하는 내용 중 위해한 것을 차단하기 위해 어디까지 감시할 것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외국에서도 2019년 3월 뉴질랜드 이슬람 사원에서 벌어진 테러가 페이스북 동영상으로 퍼지면서 관련 논의가 촉발되었던 적이 있었지요.[8] 이것은 소셜미디어 서비스에 올라오는 내용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관한 기술적 논의로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시행되고 있는 감시와 검열 사이 선을 어디에 그을 것인가에 관한 윤리적 논쟁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가 페이스북의 감시를 중국 동영상 애플리케이션 틱톡의 검열과 대비할 때,[9] 그리고 그런 페이스북 또한 검열로 인해 비난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10] 감시의 선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은 우리에게 또한 주어지고 있습니다. 윤리를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의 논의라고 본다면,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란 바로 여기에 있겠지요. 어느 선까지 감시할 것인가, 그리하여 범죄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어디까지 사생활의 영역으로, 자유의 공간으로 놓아둘 것인가 하는.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남지은. ‘인간수업’ 진한새 작가 “n번방 사건처럼 끔찍한 현실, 드라마로 반추했으면”. 한겨레 [Internet]. 2020년 5월 14일 [cited at 2020년 5월 21일]. Retrieved from: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44981.html.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홍대화 옮김. 죄와 벌. 열린책들; 2009.

엄지원, 이재호. 마침내 붙잡힌 n번방 시초 ‘갓갓’…유료회원 수사 속도. 한겨레 [Internet]. 2020년 5월 11일 [cited at 2020년 5월 29일]. Retrieved from: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44528.html.

남효선, 이민. ‘갓갓’ 문형욱, 2015년 7월부터 유사범행 진술…“성착취 피해자 50명”. 뉴스핌 [Internet]. 2020년 5월 14일 [cited at 2020년 5월 29일]. Retrieved from: http://www.newspim.com/news/view/20200514000520.

정진우. 법 어겨서라도 전국민 대화 감시하라…’n번방 방지법’의 역설. 중앙일보 [Internet]. 2020년 5월 13일 [cited at 2020년 5월 29일]. Retrieved from: https://news.joins.com/article/23775314.

김윤정. 방통위 “n번방 방지법, 사적검열 우려 없다”. 피디저널 [Internet]. 2020년 5월 15일 [cited at 2020년 5월 29일]. Retrieved from: http://www.pd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71336.

[디지털 광장] 페이스북 검열에 맞선 벨기에 미술관들. KBS NEWS [Internet]. 2018년 7월 30일 [cited at 2020년 5월 31일]. Retrieved from: http://mn.kbs.co.kr/news/view.do?ncd=4016554.

구본권. 인공지능 뽐내더니, 왜 ‘테러 영상’확산 못막았나. 한겨레 [Internet]. 2019년 3월 19일 [cited at 2020년 5월 29일]. Retrieved from: http://www.hani.co.kr/arti/science/future/886509.html.

권성근. 저커버그, 틱톡 콘텐츠 검열 비판 “페이스북은 달라”. 뉴시스 [Internet]. 2019년 10월 18일 [cited at 2020년 5월 31일]. Retrieved from: https://www.newsis.com/view.html?ar_id=NISX20191018_0000802604.

Kang C, Issac M. Defiant Zuckerberg Says Facebook Won’t Police Political Speech. The New York Times [Internet]. Oct 17, 2019 [cited at May 31, 2020]. Retrieved from: https://www.nytimes.com/2019/10/17/business/zuckerberg-facebook-free-speec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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