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52] 매일 아침 생일 맞은 희생자에게 꽃 헌정.. 미국은 영원히 널 기억할거야

뉴욕/송동훈 문명 탐험가 2020. 5. 27.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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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9·11 메모리얼 뮤지엄]
- 누구도 잊히지 않는다
2001년 9월11일 월드트레이드센터서 숨진 2977명과 1993년 테러 희생된 6명, 검은 청동 패널에 음각으로 이름 새겨
- 생일엔 반드시 꽃 한 송이
가족 대신해 국가 이름으로.. 추모관 입구엔 로마 시인 버질의 詩 '시간의 기억 속에 단 하루도 못잊어'
- 국가의 자격을 묻는다
500명 넘는 삼풍백화점 희생자는 변두리 밀려나고 그 자리엔 주상복합이 우뚝
'무엇이 강대국을 만드나' 다시 생각한다

9·11 테러 현장을 찾은 건 3월 중순이었다. 그날 아침은 추웠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간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세계화를 상징하던, 미국의 힘을 자랑하던 거대한 쌍둥이 빌딩은 사라지고 없었다. 20세기의 바벨탑이 서 있던 자리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쌍둥이 ‘풀(Pool)’로 변해 있었다. 풀 안쪽은 더 깊은 사각형의 무저갱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안으로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는 눈물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슬픔? 분노? 아니면 망각일까? 상념에 잠겨 다가간 사각 풀은 검은 청동 패널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위로는 촘촘하게 사람들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총 2983명. 9·11 테러로 희생된 2977명에, 1993년 2월 26일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 희생자 6명을 더한 수치다. 숙연해졌다. 희생자가 너무 많은 탓이다. 이름을 읽으며 걷다 흰 장미 한 송이를 보았다. 검은 청동 패널과 대비가 강렬했다. 가까이 가보니 ‘Melanie Louise de Vere’란 여성의 음각된 이름에 꽂혀 있었다. 딱 한 송이뿐이었다.

장미 한 송이의 가치

누가, 왜 꽂았을까? 9·11 메모리얼이 오픈하기 전 이른 아침이었으니 방문객은 아니었다. 추운 날씨에도 장미가 탐스럽고 싱싱한 걸로 보아 며칠 지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날 아침에 꽂은 것이었다. 느낌이 왔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관리자에게 물었다. "저희 직원들이 아침마다 그날 생일을 맞은 희생자들 이름 위에 장미 한 송이를 꽂습니다."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했다. 여기 이름을 남긴 3000명 가까운 희생자는 모두 같은 날 사망했다. 그날은 많은 미국인이 기억하고 추모하는 날이다.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희생된 날에 그들을 추모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들이 테러에 희생되지 않았다면 여태껏 살아 맞이했을 생일조차 가족과 친구를 대신해 챙기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희생자 추모 기념 공원에는 희생자 이름이 빼곡하게 음각된 검은 청동 패널이 있다. 아침마다 생일을 맞은 희생자 이름에는 장미 한 송이가 꽂힌다. 희생자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국가의 의지인 동시에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를 상징한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9·11 테러

9·11 테러는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1957~2011)이 이끄는 테러 조직 '알카에다'가 자행했다. 그날 아침 테러리스트 19명은 비행기 4대를 공중 납치한 후 세계화의 상징인 뉴욕 맨해튼의 월드트레이드센터, 미국 힘의 상징인 워싱턴D.C.의 국방부 청사 펜타곤,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워싱턴D.C.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향했다. 그들은 쌍둥이 빌딩인 월드트레이드센터를 완전히 파괴했다. 펜타곤 일부를 부수는 데도 성공했다. 그 과정이 방송으로 생중계되면서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냉전(冷戰)이 종식되고, 소련과 동구 공산권이 해체된 지 10여 년 만에 다시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세상은 절대로 이전과 같지 않게 됐다. 미국은 테러 배후로 지목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상대로 긴 전쟁을 시작했다.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를 섬멸하기 위한 비밀 작전도 진행됐다. 오사마 빈라덴은 2011년 5월 파키스탄에서 미군 특수부대에 살해됐다. 테러를 자행한 지 10년 만이었다. 테러범을 추격해 응징하는 것과 별도로 미국 정부는 '9·11'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한 작업도 시작했다. 그 결과가 월드트레이드센터가 있던 자리에 들어선 야외 추모 공간과 9·11 메모리얼 뮤지엄이다(2014년 5월 개관).

2017년 9월 11일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 마천루를 배경으로 두 빛줄기가 밤하늘로 치솟고 있다. 이는 매년 9·11 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행사의 하나인데, 빛줄기가 보이는 곳이 원래 쌍둥이 빌딩인 월드트레이트센터가 있던 자리다.

누구도 잊히지 않는다

추모 박물관은 거대한 지하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내려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게 '메모리얼 홀'이다. 홀 입구에는 이곳의 존재 이유와 정신을 상징하는 한 문장이 콘크리트 벽면에 크게 새겨져 있었다.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Virgil'

심장이 멎는 느낌이었다. '시간의 기억 속에서 단 하루도 당신을 지울 수 없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언제나 조국은 당신을 기억하겠다는 약속이며 다짐이었다. 이 문장의 필자가 '버질(Virgil)'이란 사실도 놀라웠다. 우리에겐 '베르길리우스(Vergilius BC70~BC19)'로 잘 알려진 버질은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제국의 대시인이었다. 대표작 '아이네이스(The Aeneid)'는 로마제국의 탄생을 그린 대서사시다. 미국은 무려 2000년 전 서사시의 한 문장을 따 9·11 추모 박물관의 입구를 장식한 것이다. 인간은, 국가는, 문명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소멸한다. 비켜 갈 수 없는 운명의 굴레다. 그러나 그 필멸의 운명 속에서도 누군가는, 혹은 어떤 사건은 절대로 잊히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버질이 살던 2000년 전에도 있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있다. 미국에 9·11 테러 희생자들은 나라가 존속되는 한, 단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메모리얼 홀 중앙에 위치한 'IN MEMORIAM'이란 실내 추모 공간의 벽면은 2983명의 사진으로 장식돼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희생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설명이, 그를 기억하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동료들 음성으로 흘러나오고, 벽면에는 프로젝트 빔이 생전 모습을 비췄다. 국적을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 눈물을 참기 힘든 공간이었다.

9·11 추모 기념 공원을 찾은 추모객들이 청동 패널에 적힌 희생자들 이름을 읽고 있다. 외롭게 꽂힌 성조기가 이채롭다.

국가의 자격을 묻다

그곳에서 문득 우리의 처지가 떠올랐다. 예전에 서울 강남 요지에 삼풍백화점이 있었다. 1995년 6월 29일 그 백화점이 무너졌다. 개장한 지 불과 6년 만이었다. 부실 공사가 원인이었다. 500명이 넘게 죽었고, 1000명 가까이 다쳤다. 몇 개월 동안 온 나라가 난리가 났다. 부실과 비리에 대한 개탄에 땅이 꺼졌고, 소유주와 공무원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뿐이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리는 무너진 백화점과 그 희생자들을 잊었다. 사고 현장에는 초대형 주상 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희생자를 생각하는 추모비는 엉뚱하게도 양재시민의숲 구석으로 밀렸다. 희생자 가족에게조차 그곳은 낯설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인명 피해'라는 표현만 무색하게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성수대교 붕괴(1994년)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비는 강변북로에 섬처럼 고립돼 있다. 이들의 희생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책임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그런 곳에 위령비를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 터지면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난리를 치지만 결국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반성도 개선도 없다. 슬픈 민낯이다.

미국은 비극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자리, 뉴욕 맨해튼의 월가에 추모 공간을 조성했다. 그곳에선 아침이면 직원들이 가족을 대신해 국가 이름으로 생일을 맞은 희생자에게 장미 한 송이를 꽂고 있다. 국가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과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희생당한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부가 국민에게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고, 국가가 존재하는 최소한의 근거다.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한 노력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미국은 그 기본을 알고 실천한다. 강대국이 된 이유다. 뉴욕 맨해튼 9·11 현장의 추모 공간에 놓인 장미 앞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국적을 떠나 가슴이 따스해진다.

[구조견도 영웅… 활약상까지 낱낱이 기록]

9·11 메모리얼 뮤지엄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구조견 인형.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9·11 테러라는 미증유의 위기도 마찬가지로 영웅을 낳았다. 진정한 영웅이 누군지 알려면 메모리얼 뮤지엄 안의 기념품 가게로 가면 된다. 그곳에는 9·11 현장에서 인명을 구하기 위해 헌신한 소방관, 경찰관, 의료진을 기리는 기념품과 자료집이 즐비하다. 영웅에는 구조견들도 포함된다. 구조견을 다룬 책 중에 가장 인상적인 건 ‘Dog Heroes of September 11th’였다. 책 내용은 방대하고 자세했다. 개 수백 마리의 세부 사항과 9·11 테러 현장에서 벌인 활약을 기록하고 있다. 개들은 무너진 잔해 안으로 들어가 생존자들을 수색하고 구조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줬다. 미국인에게 영웅은 바로 이런 존재다. 위기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돕기 위해 노력하면 개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외면하는 사람보다 나은 존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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