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중고 거래..'올드'에서 이젠 '유니크'로

전준범·이소연 이코노미조선 기자 2020. 5. 25.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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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조선]
르포 20조원대로 급성장한 중고 시장

모든 분야에서 넘쳐나는 생산과 소비, 너무 빠른 유행 전환은 여전히 쓸모있는 것들의 퇴장을 날마다 강요한다. 중고(中古) 경제는 과잉 시대의 필연적인 결과다. ‘평생 소유’보다 공유와 처분에 능한 실용주의 세대의 등장, 개성 표출 욕구가 강한 개인주의 세대의 등장은 중고 거래 시장을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꿔놨다. 남녀노소 누구나 필요한 물건을 찾아 중고 장터를 헤매고, 기업은 그런 소비자를 위한 사업 모델 구상에 몰두하는 세상이 됐다. ‘이코노미조선’이 업계 추산 20조 원대로 성장한 중고 경제를 집중 분석한 이유다. [편집자 주]

중고에 대한 거부감 사라져
플랫폼 가입자 4000만 돌파
돈이 되는 중고 시장

◇"이런 게 요새 유행이라고요?"

믿거나 말거나 이런 패션이 요즘 젊은 패셔니스타 사이에서 최고 인기란다. 자칭 ‘구제 마니아’이자 고려대 패션비즈니스학회 회원인 김예진(22)씨가 ‘옷 무덤’에서 들어 올린 옷은 소매가 너덜너덜한 셔츠였다. 촌스럽다고 손사래 치는 기자에게 김씨는 "이렇게 ‘아재’가 입을 것 같고 딱 봐도 오래된 옷이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빈티지 룩"이라며 웃었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오라면 가야지 어쩌겠는가. 유행 감각이라곤 ‘1도 없는’ 패션 문외한은 이날 모든 권한을 김씨에게 위임했다.

일요일이던 5월 10일 오후 3시, 서울시 숭인동 동묘구제시장은 구성진 트로트 가락과 쾌쾌한 담배 냄새의 틈바구니에서 "바닥에 있는 옷은 3000원!"을 연발하는 상인과 거리를 빽빽이 메운 시민의 열기로 뜨거웠다. 성인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는 거대한 헌 옷 무더기를 향해 20대 초반의 젊은 남녀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까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이 옷 저 옷 꺼내 보기 바빴다. 세련된 옷을 쫙 빼입고 도도하게 옷가지를 집어 드는 젊은 ‘패피(패션 피플의 줄임말로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구부정한 자세로 한 시간 넘게 옷을 찾다 보니 허리가 아팠다. 잠시 고개를 들자 이동식 옷걸이에 걸려 있는 다양한 패턴의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상인에게 물어보니 "바닥에 있는 옷 중 비교적 새 옷 같은 걸 따로 걸어뒀다"고 한다. 통이 넉넉한 청바지는 세월 탓에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가격은 4000원. 아버지의 1980년대 애장품이었을 법한 알록달록한 셔츠와 1990년대 직장인이 입었을 것 같은 넉넉한 사이즈의 외투도 보였다. 김예진씨는 "젊은 패피가 한참 줄 서서 수십 벌씩 사가는 홍대 구제숍 ‘TLAK’나 성수동 ‘밀리언 아카이브’도 이런 올드한 느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김씨가 골라준 옷은 초록색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셔츠. 새마을운동 유니폼처럼 보였으나 그는 이것이야말로 최신 유행인 ‘스트리트 무드의 스트라이프 셔츠’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며 4000원을 결제했다.

김씨가 패션의 완성은 모자라며 또 어디론가 끌고 갔다. 벙거지라 불리는 검정 ‘버킷해트’를 5000원 주고 샀다. 테두리에 부드러운 천이 둘려 있는 모자로, 30여 년 전 가수 서태지가 착용하면서 인기를 끌었단다. 지금의 젊은 세대 패션 아이템으로 다시 떠오른 이 모자까지 쓰고 나니 단돈 1만3000원짜리 ‘동묘 코디’가 완성됐다. 전신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전송하자 "이소연 많이 컸다"며 다들 킥킥 웃는다. 아, 패션의 세계는 어렵구나.

◇유행 주도하고, 가성비 챙기고

다음 날인 5월 11일에는 동묘시장 인근에 있는 황학동 주방·가구 거리를 찾았다. 400여 개 점포가 밀집한 이곳은 중고 주방용품과 가구를 합리적인 가격에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집을 나서는 30대 육아 대디 기자에게 아내가 준 이날의 미션은 ‘어린이 식판 사오기’. 아이는 물론 집에 자주 놀러 오는 동네 친구들이 쓸 식판까지 넉넉하게 챙겨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또 다른 당부 사항. 중고여도 예뻐야 한다는 것. 배웅하는 눈빛을 보니 이게 핵심인 듯했다.

오후 1시. 남녀노소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는 전날의 동묘 열기를 황학동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모든 직장인에게 우울한 월요일의 영향인 것 같기도 했고, 주말 새 다시 커진 이태원 클럽발(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공포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취재하는 입장에선 그림이 안 나와 아쉬웠지만, 소비자로서는 쾌적한 쇼핑 환경이 마련돼 좋았다.

길게 이어진 가게 안팎으로 수북이 쌓인 제품들은 방문자의 시선을 끌 만했다. 미션을 망각한 채 주방용품점과 가구점, 도매상과 소매상, 새 상품과 중고 제품이 혼재한 거리를 탐색했다. 대형 커피 추출기, 팝콘 기계, 얼음 냉장고, 밀가루 반죽기 등 일반 가정에서는 접하기 힘든 업소용 주방용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전국 외식 업체 주방용기의 80%가 황학동에서 조달된다는 인터넷 글이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부쩍 관심이 커진 와인 냉장고 앞에 30여 분간 머물렀다. 금속 재질 외관에 원목 선반, 200병까지 보관 가능한 1t짜리 중고 제품. 주방은커녕 거실에도 두기 힘든 덩치였으나 가격표를 보니 괜한 미련이 생겼다. 오래된 디자인이기에 풍길 수 있는 중고품 특유의 감성이 붉은색 술을 절로 불렀다. 일단 지르고 볼까. 와인 대신 내가 저 안에 들어가야 할 수도 있겠지.

정신을 가다듬고 크고 작은 중고 주방용품이 가득한 근처 상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찾은 어린이 식판은 개당 2000원. 별 고민 없이 각기 다른 색깔로 3개를 골랐다. ‘예뻐야 한다’는 기준은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식판이니까. 백화점에서 1만6000원 주고 산 식판과 동일한 걸 황학동에서 8분의 1 가격에 구했다는 말이다. 사장님이 돈을 받으며 "두 번밖에 안 쓴 것들입니다"라고 했다. 당연히 믿지 않지만, 그만큼 양호한 상태인 건 분명했다. 임무 완수 소식을 들은 아내가 기뻐하다가 와인 냉장고 이야기를 꺼내자 말없이 통화를 끝냈다.

◇4000만 회원…중고 거래의 대중화

두 기자가 다녀온 동묘구제시장과 황학동 주방·가구 거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중고 마켓이다. 같은 옷을 두고 20대 대학생과 70대 노인이 경쟁하는 동묘에서도, 백화점보다 8배 싼 동일 상품을 구할 수 있는 황학동에서도, 중고(中古) 경제는 예의 매력을 뽐내며 매일 힘차게 작동하고 있다. 그 안에서 소비자는 돌고 도는 유행 코드를 접하고,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주는 소소한 행복을 만끽한다.

‘이코노미조선’은 중고 경제 속으로 한 발 더 들어가기 위해 이번 커버 스토리를 준비했다. 젊은 세대가 중고 시장을 거부감 없이 찾는다는 건 ‘중고’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와 다른 의미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제 중고는 오래된 것, 남이 쓰던 것, 그래서 싼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개성을 부각하는 양념이자 그를 복고 열풍의 선봉장으로 만드는 비결이다. 중고 거래 역시 더는 남몰래 개최하는 비밀 행사가 아니다. 희귀 아이템 확보의 필수 과정이다.

이 같은 입지 변화를 증명하듯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중고 장터가 쑥쑥 크고 있다. 거래 플랫폼만 하더라도 네이버 카페 ‘중고나라’ 한 곳으로 모든 게 통하던 시절을 지나, 현재는 번개장터·당근마켓 같은 경쟁사가 첨단 기술과 사용 편의성을 앞세워 환영받고 있다. 이들 빅 3 기업의 가입자 합은 4000만 명에 이른다. 국민 대다수가 중고 거래를 자주 하거나, 적어도 한 번은 해봤다는 뜻이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중고 시장 규모는 2008년 4조원에서 2018년 20조원으로 10년 새 5배 커졌다.

중고 시장의 세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도 눈에 띄게 늘었다. 중고차 시장의 ‘엔카닷컴’과 ‘KB차차차’, 중고책 분야의 ‘알라딘’, 중고 명품 영역의 ‘구구스’ 등이 대표적이다. 골프 마니아의 성지(聖地) ‘골마켓’과 육아하는 부모라면 꼭 찾게 되는 ‘코너마켓’ 등도 주목받는 중고 거래 장터다. 중고 악기 거래 사이트 ‘뮬’은 음악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다. 최근에는 리셀러(reseller·한정품을 사 비싸게 되파는 사람)가 중고 시장의 핵심축으로 떠올랐다.

이번 기획에서 ‘이코노미조선’은 중고 거래 플랫폼의 원조 중고나라 창업자를 만나 사업 전략을 듣고 ‘타도 중고나라’를 외치는 경쟁 업체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분석했다. 경영학자와 소비자 심리학자를 찾아가 중고 시장에 관한 성장 전망도 경청했다. 각기 다른 학문 분야에서 이뤄지는 시장 분석이 신선하게 다가갈 것이다. 또 각 비즈니스 영역에서 활약 중인 중고 거래 기업 사례를 모으고, 해외 중고 장터 분위기도 탐색했다. 열정 넘치는 막내 기자의 중고 거래 체험기도 담았다. 어느 때보다 합리적 소비가 요구되는 어수선한 시기, 중고 경제 커버 스토리가 독자 여러분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Interview]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
"소유 가고 공유…중고 경제, 실용적 공유의 신호탄"

N세대 이후 실용성 중시
구매만큼 처분에도 관심
중고 거래로 개성 드러내

"옛 소비자는 ‘기술’에 반응했어요. 신기술이 나오면 잘 몰라도 일단 환영하는 식으로 말이죠. 197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N세대부터는 ‘기능’을 더 중시해요. 광(光)마우스가 처음 등장했다고 칩시다. 젊은 소비자는 ‘So what?(그래서 뭐?)’을 외쳐요. 내게도 쓸모가 있어야 열광하겠다는 태도죠."

소비자 심리학 전문가인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5월 12일 서울 대현동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이코노미조선’과 만나 "중고 거래 활성화는 기능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가 소비 시장의 주축이 된 시대 흐름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라고 분석했다.

양 교수는 기능을 따진다는 건 의사 결정을 실용적으로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전쟁 치르고 배고픈 시절 견디며 경제 발전에 기여한 세대는 소유욕이 강했어요. 보상 심리랄까요. 쟁취 욕구가 컸죠. 게다가 집단주의 사회였잖아요. 집단 내에서 어떤 소유물로 나라는 존재를 부각하려는 심리가 늘 있었습니다. 요즘 소비자는 달라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라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덜하죠. 개인주의 사회다 보니 남에게 보이는 것도 신경 안 쓰고요."

이런 소비 심리 변화가 소유의 시대를 ‘공유의 시대’로 빠르게 바꿔가고 있다고 양 교수는 진단했다. 중고 마켓의 성장은 공유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 중 하나다. 여기에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 세대’ ‘88만원 세대’ 등의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녹록지 않은 경기 여건도 부담스러운 소유 대신 실용적인 공유를 선호하게 만든 배경이 됐다.

"무엇인가를 평생 소유한다는 개념은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어요. 구매만큼 처분이 중요한 세상이죠. 쓰던 물건이 필요 없어지면 남에게 팔고, 그 돈으로 타인에게서 다른 필요한 걸 사는 소비자가 늘어나는 건 당연해요. 제 경우 사용했던 교재를 중고가로 파는 학생들을 매 학기 봅니다."

양 교수는 개성 표출 의지가 확고한 젊은 소비자 특성도 중고 시장 성장과 연결해 볼 만하다고 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중고 명품 가방을 사고, 중고 레코드판을 수집합니다.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나’를 드러낼 때는 또 거침이 없죠. 절제 안에서 소박하게 사치를 부리는, 이른바 ‘즐김의 미학’을 추구합니다. 이들에게 중고 시장은 개성 표출을 극대화해주는 공간인 셈이에요."

양 교수는 중고 거래에 나서는 소비자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품종 대량생산이 주를 이루던 시절에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명확히 구분됐습니다. 지금은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죠. 내가 저걸 못 가졌어도 괜찮아요. 대안이 많거든요. 집 마당에서 창고 세일(Garage sale)을 하는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안 쓰는 물건을 이웃끼리 사고파는 문화가 점점 보편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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