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⑳ 조선 정종 후릉·제릉 2기만 유일하게 북한에
한강 하구와 인접해 위치
남북 함께 세계문화유산 등록 서둘러야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20. 개성 인근에 있는 2기의 조선 왕릉
개성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80km 정도다. 개성에서 임진각까지는 22km다. 개성에서 한국의 가장 서쪽에 있는 강화도 평화전망대까지 직선거리로 20km에 불과하다. 75년간의 분단으로 마음으로는 멀리 느껴지지만, 지리적으로는 굉장히 가깝다.
송악산(489m)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용수산(178m)을 거치면서 산줄기가 둘로 갈라진다. 진봉산(310m)~부소산~한이산(219m)~백마산(191m)으로 이어져 한강 하구인 조강(祖江)에 도달하는 줄기와 용수산~광덕산(146m)~봉황산(79m)~전좌산(80m)으로 이어져 조강에 도달하는 줄기다.
이 두 산줄기 사이에 고려 왕릉을 비롯해 많은 무덤이 현존한다. 그중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조선 2대 정종(定宗)의 무덤인 후릉(厚陵)이다. 조선 왕릉(왕과 왕비, 추존왕과 왕비의 무덤)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그 중 제1대 태조의 비 신의왕후(神懿王后) 제릉(齊陵)과 제2대 정종(定宗)의 후릉(厚陵)만 북한지역에 있다.
1412년(태종 12)에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 김 씨가 왕대비(王大妃)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백마산 동북쪽 언덕에 능을 조성했고, 7년 후 정종이 노상왕(老上王)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이듬해인 1420년(세종 2)에 정안왕후의 능 옆에 쌍릉 형식으로 무덤을 조성했다.
정종은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직후 동생 정안군(태종)을 왕세자로 책봉한 후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됐고, 1418년에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상왕이 됐다. 세상을 떠난 후 묘호를 올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묘호를 올리지 않았고 명나라에서 내린 공정왕(恭靖王)이라는 시호로 불리다가 숙종 7년(1681)에 이르러서야 묘호를 정종이라 올렸다.
정안왕후가 한양이 아닌 고려의 도성인 개성 남쪽에 묻힌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정종이 왕위에 오른 후 ‘1차 왕자의 난’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수습하고자 한양에서 개경(개성)으로 천도해 약 6년간 지낸 인연이 고려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후릉은 쌍릉의 형식으로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묘인 현·정릉(玄正陵)과 아주 유사하다. 공민왕릉이 조선왕릉 묘제의 본보기가 됐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능 구역은 4단으로 조성됐고, 2단과 3단에는 문·무인석 각 2쌍씩, 석마·석양·석호가 각각 4쌍씩 배치되어 있다. 이런 형식은 현재 서울 서초구에 있는 3대 태종의 헌릉(獻陵)과 같은 형식이다. 정자각은 터만 남아 있고, 영조 31년(1755)에 세운 표석이 남아 있다.
표석에는 ‘조선국 정종대왕 후릉 정안왕후 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 고종 때 후릉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는데, 난간석 등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후릉을 조성한 인물은 공조판서였던 박자청(朴子靑)으로, 그는 조선 초기 경회루와 각종 왕릉의 공역(工役)을 책임졌다. 노비 출신인 박자청은 고려 말 왕실의 주요 토목사업을 책임졌던 환관 김사행을 따르며 토목 관련 지식을 배웠고, 조선 초기에 제릉과 건원릉 공사 감독, 한양 도성의 구축, 청계천 조성, 창덕궁과 성균관 문묘, 경회루 건설 등을 맡아 감독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의 설계자가 정도전(鄭道傳)이었다면, 이를 실현에 옮긴 건축가는 박차정이었던 셈이다. 공민왕릉~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능)~후릉~헌릉으로 이어지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조성된 왕릉 양식의 유사성은 그를 통해 유추해 볼 수도 있다.
그가 조성 책임을 맡은 제릉은 후릉에서 동북쪽으로 4km 정도 올라간 곳에 있다. 개풍군 대련리 부소산(扶蘇山) 남쪽 기슭이다.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경천사십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 국보 제86호)에 원래 세워져 있던 경천사가 이곳에 있었다.
제릉은 조선 태조의 이성계의 첫 번째 왕비이자 정종과 태종(太宗)의 모후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 씨가 묻힌 곳이다.
능 구역에는 문·무인석 각 1쌍씩, 석마(石馬) 4개,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했고, 그 아래에 정자각, 비각이 남아 있다. 비각 안에는 1744년(영조 20)에 다시 세운 신도비(神道碑,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와 1900년(광무 4)에 세운 표석이 있다. 제릉의 현재 모습은 6·25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파괴된 것을 북한이 복구한 것이다.
신의왕후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개성 남쪽에 묻혔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절비(節妃)로 추존됐고, 1398년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의왕후로 다시 추존됐다.
후릉과 제릉은 2009년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 빠졌다. 따라서 조선 왕릉이 완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남북이 협력해 북한지역에 존재하는 2기의 왕릉까지 추가 등재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개성에 남아 있는 조선 시대의 문화유산으로는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건국 전 거주했던 목청전(穆淸殿)을 들 수 있다. 이성계가 살았던 옛집으로,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진전(眞殿) 중 한 곳으로 사용됐다. 현재 정자각과 재실, 비각이 복구돼 남아 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무역도시로 번성했던 개성은 분단 이후 군사도시로 변모되면서 도시 발전이 정체됐다. 북한은 1990년대에 개성경공업 단과대학을 고려 성균관으로 개칭해 경공업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2000년대에 개성공단을 조성함으로써 개성을 남북협력의 거점도시로 삼았다.
또한 2007년부터는 남북 공동으로 개성 만월대터 발굴사업을 시작했고, 2013년에는 만월대를 포함한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현재 개성공단은 폐쇄되었고, 만월대 터 발굴사업도 중단된 상태이다. 개성 시내 외곽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기존 건물에 색깔을 입혔지만, 여전히 개성시는 여전히 낙후된 도시로 남아 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개성은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남북경제협력의 거점이지만 남북 문화협력, 관광도시로서의 잠재력도 풍부하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왕릉도 그중의 한 문화자산이다. 고려 왕릉 중에서 태조 왕건릉, 공민왕릉, 명릉군, 칠릉군 등 개성 도성의 서쪽에 있는 일부 왕릉들이 ‘개성역사유적지구’에 포함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과거보다 보존, 관리상태가 확연히 개선됐다.
그러나 여전히 대다수 고려 왕릉을 비롯한 고려의 문화유산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남북공동 발굴조사가 중단된 만월대 터에는 아무런 제한 없이 관광객들이 찾고 있어 훼손이 우려된다.
과거 개성을 다녀온 역사학자들은 “아직은 괜찮지만, 현재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현재 개성 주민의 삶을 이롭게 하면서 역사 도시로 가꾸어가는 장기 구상과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장기적으로 개성을 통일경제특구의 한 축으로 삼더라도 남과 북의 공동의 문화유산인 고려와 조선 시대의 역사유적을 보존하면서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제언이다. 개성과 강화도에 흩어져 남아 있는 고려 왕릉을 연계해 남과 북이 공동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도록 노력하는 것도 현실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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