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한땀 한땀 글씨가 예술이네

2020. 5. 15.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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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
붓·펜 타입으로 나뉘는 캘리그래피
캘리그래피 무드등 만들어 보니 즐거움 커
요즘 '디지털 캘리그래피'도 인기
학원·유튜브 등 배울 곳 많아
부업으로 뛰어든 이들도 느는 추세
작품 판매 가능한 사이트 활용해볼 만
사람을 닮는 글씨. 캘리그래피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이 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개미공방’ 신은경 캘리그래피 강사가 ‘한 땀 한 땀 글씨가 예술이네’라는 ESC 기획의 제목을 직접 써줬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손 글씨를 써본 게 언제였던가? 학창 시절에는 당연히 필기가 일상이었다. 군대에서는 지금의 아내에게 연애편지를 많이도 썼다. 아마 다른 할 일이 딱히 없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하지만 글씨를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는 늘 수첩과 볼펜을 지니고 다녔다. 거리에서는 물론, 식사나 술자리에서도 수첩에 뭔가를 기록하는 일이 흔했다. 일분일초가 숨 막히는 취재 현장에서, 수첩의 글씨들은 본인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날아다녔다. 중요한 정보를 적어놓은 수첩을 펼쳐 놓고,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 낭패에 빠진 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퇴직한 이후에는 손에 펜을 쥐는 일 자체가 드물다.

손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시대다. 요즘은 대학생들도 필기를 하지 않고 노트북이나 태블릿 피시를 활용한다는데, 거꾸로 손 글씨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캘리그래피’ 열풍이다.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는 말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시인이자 소설가, 예술 평론가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름답다는 뜻의 그리스어 ‘칼로스’(kallos)와 그리다는 의미의 ‘그라페’(graphẽ)가 합쳐진 말이다. 아름답게 쓰고 그린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글씨도 시만큼 아름다워야 한다는 시인의 바람이 빚어낸 경지랄까. 영어로는 동양의 ‘서예’를 아예 캘리그래피라고 번역한다. 따지고 보면 옛사람들은 모두 캘리그래퍼가 아니었던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다. 풍채, 말과 글, 그리고 판단력이 인품의 네 가지 요소라는 뜻이다. 이제 와서 성형 수술이라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기술도 여간해선 잘 늘지 않는다. 판단력? 사람의 깜냥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하나. 하지만 글씨야말로 개선의 여지가 큰 분야다. 그 경지의 끝도 없겠지만,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지금보다 현저하게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선인들은 쓰고, 그리는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오랜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난 추사 김정희는 ‘난 치는 법’을 배우겠다며 찾아온 석파(石坡) 이하응에게 조언한다. 석파가 바로 훗날의 흥선대원군이다. “난화는 비록 작은 기술에 불과하나 그 지극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격물치지(格物致知·사물을 대하여 그 근본적 이치를 깨달음)의 공정에 다를 것이 없다.” 지필묵을 대하는 선생의 태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스승인 추사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석파는 나중에 난 그림의 대가로도 이름을 날리게 된다.

우리 모두 명필가가 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에라도 종이와 펜만 있으면 도전할 수 있다. 어려움을 느끼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배우면 된다. 단지 ‘예쁜 글씨’를 써보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한 선물이나 기념품을 직접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자신의 작품을 웹사이트에 등록해 판매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다. 요즘 한국영화 포스터의 99%는 캘리그래피 작품을 활용한다고 한다. 영화 포스터뿐 아니라 각종 인쇄물과 광고, 뮤직비디오 등에서까지 캘리그래피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최근엔 태블릿 피시를 활용한 ‘디지털 캘리그래피’가 20~30대에겐 더 주목받고 있다. 바야흐로 손 글씨도 디지털 시대다.

봄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핀다. 당신이 한 땀 한 땀 흰 종이에 써 내려 가는 아름다운 글씨들은 어쩌면 그 봄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캘리그래피 전문 공방 `개미공방'에서 교육 받고 있는 송호균 객원기자. 무드등 재료가 될 캘리그래피 ‘세상의 모든 즐거운 ESC’와 ‘한겨레 1만호 만번의 도전 만번의 다짐’을 쓰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조금 비뚤어져도 괜찮아요. 공간을 신경 쓰면서 글씨를 그린다고 생각해보세요.” 지난 8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개미공방’에서 캘리그래피 강사 신은경(32)씨를 만났다. 캘리그래피는커녕, 손 글씨를 써본 지도 오래됐다. 배우는 과정을 수첩에 기록하는데, 날아가는 글씨체가 은근히 부끄러웠다.

학원 캘리그래피 강의는 크게 ‘붓 타입’과 ‘펜 타입’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잉크와 붓을 사용하는 붓 타입 캘리그래피는 사실상 전통적인 의미에서 서예라고 생각하면 되고, 펜 타입은 상황에 맞도록 각종 붓 펜이나 드로잉 펜 등을 사용한다. 진입장벽은 물론 펜 타입이 훨씬 낮다고 한다. “붓으로 쓰는 캘리그래피는 선 긋기 연습부터 시작해요. 하지만 펜 타입은 원하는 문구를 바로 써볼 수 있죠.” 혼자 붓을 다루며 일정한 수준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주 1회 기준으로 최소 6개월 이상 수강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반면 펜 타입은 3개월이면 충분하다. 물론 하루 수업을 듣고 직접 간단한 기념품까지 제작해보는 ‘1일 교육’ 코스는 보통 펜 타입으로 이뤄진다.

신은경 강사(사진 왼쪽)가 기자에게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최근 ‘디지털 캘리그래피’가 인기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강사의 설명에 따라 국산 문구사의 ‘제노(xeno) 붓펜’을 손에 쥐었다. 문구점에서 1000원이면 구할 수 있다. 신씨가 건넨 교안에는 ‘우리 행복하자’,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해피엔딩’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말 그대로 하나하나가 작품이었다. 긴장감에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지 글씨를 쓰는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 글자들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크기의 획을 조합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섬세한 작업이었다. 그저 ‘예쁜 글씨’를 쓰는 것도, 일필휘지로 휘갈기는 것도 아니었다. 신씨는 단어와 조사를 ‘테트리스 하듯’ 끼워 맞추며 조형미를 창조하면서도 ‘가독성’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희미한 색의 형광펜으로 강사가 연습지에 써준 문구를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도 땀이 났다. 마치 글씨 쓰기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빈 종이에 스스로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는 문구의 캘리그래피 작품을 완성했다. 여기저기 잉크가 번지거나, 획이 비뚤어져 간 부분이 눈에 걸렸지만, 처음으로 직접 만든 캘리그래피였다. 강사가 쓰는 것을 보니 10초도 안 걸렸는데, 기자는 획 하나하나를 그려가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단지 ‘예쁜 글자’를 쓰는 것을 넘어, 획을 이루는 ‘공간’을 신경 써야 하는 캘리그래피는 ‘종합 시각 디자인’이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서울 강남구 대치동 ‘개미공방’의 벽면을 수놓은 수많은 캘리그래피 작품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몇 차례의 연습을 거친 끝에 드디어 오늘의 목표인 ‘무드등 만들기’에 도전했다. 까칠까칠한 감촉의 종이에 원하는 문구를 적고, 간단히 접은 뒤 작은 등을 부착하면 근사한 기념품을 만들 수 있다. 기자는 ‘세상의 모든 즐거움 ESC’라는 문구를 써보기로 했다. 강사의 지도에 따라 시안을 만들고, 연달아 연습지를 버려가며 진땀을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나마 봐줄 만한 캘리그래피를 그려냈다. “이 느낌대로 가볼게요!” 바로 이어서 실전에 도전하기로 했지만, 결과물은 연습 때만 못한 것 같았다. 자음과 모음 사이의 공간이 너무 떠버렸고, 마지막 ‘ESC’ 글자의 크기가 너무 커서 접히는 부분의 경계를 살짝 넘어갔다. 그래도 뿌듯했다. 압착해 말린 작은 꽃잎을 풀로 붙였다. 모양을 잡아 등까지 켜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펜과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보낸 몇 시간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이게 캘리그래피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신 강사는 ‘한겨레 1만호’ 발간을 앞둔 슬로건인 ‘한겨레 1만호, 만번의 도전 만번의 다짐’이라는 문구를 직접 쓴 무드등을 만들어줬다.

완성된 무드등. 초보자도 하루 만에 간단한 기념품을 제작할 수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종이에 사람의 손으로 쓰는 캘리그래피도 있지만, 요즘은 ‘디지털 캘리그래피’도 있다. ‘프로크리에이트’라는 전용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부분 아이패드에서 작업을 한다. 태블릿 피시를 사용하기 때문에 화려한 효과를 마음대로 넣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했다. 입체감을 주는 글씨부터 다양한 색상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작품, 간단한 애니메이션 효과까지 가능하다. 신씨가 보여준 작품에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문구는 글씨가 마치 춤을 추듯 움직였다. “장단점이 분명히 있어요. 아이패드로 작업하면 다양한 효과를 활용할 수 있고, 결과물을 디지털화하는 과정이 따로 필요 없다는 점도 매력이죠. 종이도 버려지지 않고요. 하지만 배우는 데 시간이 걸리고, 또 손으로 종이에 쓰는 질감은 아무래도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한다고 봐야 해요.” 신씨는 아이패드를 활용한 교육 동영상을 담은 유튜브 채널 ‘캘리그라피은개미’를 운영하고 있다.

학원에서 캘리그래피를 배우는 수강생들은 대부분 순수한 취미 목적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펜을 쥐고 ‘예쁜 글씨’를 그리며 찾는 마음의 평화랄까. 직접 문구를 그려 넣은 다양한 캘리그래피 소품들은 지인이나 가족에게 선물하기에도 좋다. 반면 상업적 영역에서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만큼 부업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접 공방을 차리거나, 자신의 캘리그래피 작품들을 디지털화해서 이미지를 판매하는 ‘스톡 사이트’에 등록해 수익을 창출하는 식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셔터 스톡’, ‘유토 이미지’ 등이 대표적인 스톡 사이트들이다.

‘개미공방’과 같은 학원에 직접 가 캘리그래피를 배우면 수강생의 수준에 따라 즉각적인 피드백이 이뤄지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기자가 도전한 ‘1일 교육’ 코스는 무드등, 엽서, 손거울, 포스터 등 최종적으로 제작하는 기념품의 종류에 따라 3만~8만원이 든다.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면 수강료는 주 1회 강의를 기준으로 매월 10만원이라고 한다.

집 밖에 나서기가 꺼려지는 요즘에는 온라인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각종 취미활동에 대한 동영상 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 ‘클래스101’에서는 각종 캘리그래피 강의를 들을 수 있는데, 강의 종류에 따라 비용은 매달 4만~5만원대다. 유튜브 채널 ‘글림’이나 ‘함께하는 동행캘리’ 등을 통해 무료로 기초 강좌를 접할 수도 있다.

송호균 객원기자 gothrough@naver.com,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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