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⑲100명 넘는 왕후·왕비묘는 어디 있을까

박진희 2020. 5. 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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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충혜왕묘는 일제강점기 이후 소멸
8대 현종(顯宗) 이후 왕후릉 별도 조성
능주 모르는 왕릉 대다수 왕후·왕비 무덤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 대부분 능주를 알 수 없는 왕비릉

고려 시대에는 태조 왕건부터 공양왕까지 34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중 강화도 천도 이후 왕위에 오른 21대 희종(熙宗), 22대 강종(康宗), 23대 고종(高宗)은 강화에 묻혀 있거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강종의 무덤이 개성 동북쪽에 있다는 설도 있음). 그리고 32대 우왕(禑王)과 33대 창왕(昌王)은 시호와 능호가 전해지지 않으며, 마지막 공양왕의 무덤은 현재 고양시에 남아 있다.

따라서 고려 때 왕위에 오른 왕의 무덤 중 28기의 왕릉이 개성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지역에 있는 28기의 재위(在位) 왕릉 중 태조(1대), 정종(3대), 광종(4대), 경종(5대), 성종(6대), 현종(8대), 문종(11대), 순종(12대), 예종(16대), 명종(19대), 신종(20대), 원종(24대), 충목왕(29대), 충정왕(30대), 공민왕(31대) 등 15명의 왕릉 위치와 능주에 대해서는 남북의 학계에 큰 이론이 없다.

다만 29대 충목왕의 명릉(明陵)에 대해서는 남한학계에서 능주가 잘못 비정(比定)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있다. 묘실 내부 구조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왕후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북한은 2000년 황해북도 장풍군 고읍리에 있는 ‘고읍리 1릉’을 18대 의종(義宗)의 희릉(禧陵)으로, ‘고읍리 2릉’을 13대 선종(宣宗)의 인릉(仁陵)이라고 발표했지만, 남한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최근 몇 년간 2대 혜종(惠宗)의 순릉(順陵), 9대 덕종(德宗)의 숙릉(肅陵), 10대 정종(靖宗)의 주릉(周陵), 15대 숙종(肅宗)의 영릉(英陵) 등 4기의 왕릉을 발굴하거나 조사한 후 위치와 능주를 확정 발표했다. 아직까지 충목왕의 명릉, 선종의 인릉, 의종의 희릉은 능주가 확정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개성지역에 있는 고려 왕의 무덤 중 7대 목종(穆宗)의 의릉(義陵), 14대 헌종(獻宗)의 은릉(隱陵), 17대 인종(仁宗)의 장릉(長陵), 25대 충렬왕의 경릉(慶陵), 26대 충선왕의 덕릉(德陵), 27대 충숙왕의 의릉(毅陵), 28대 충혜왕의 영릉(永陵)의 소재만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동구릉(東龜陵) 전경. 고려 초기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되며, 동쪽에 묻힌 것으로 기록돼 있는 고려 7대 목종(穆宗)의 의릉(義陵)이나 14대 헌종(獻宗)의 은릉(隱陵)일 가능성이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5.09.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목종의 의릉과 헌종의 은릉은 <고려사>에 개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로서는 의릉과 은릉은 송악산 동쪽과 동북쪽에 남아 있는 동구릉(東龜陵), 용흥동 무덤군, 고읍리 무덤군, 전재리무덤군 등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다만 조선 순조 때 출간된 개성부의 읍지인 <송경지(松京誌)>에 은릉이 “송림현”에 있다고 기록돼 있는데, 송림현은 영통사가 있는 오관산 남쪽에 있었다.

충렬왕의 경릉, 충선왕의 덕릉, 충숙왕의 의릉은 명릉군에 있는 2개의 왕릉 중 하나이거나 명릉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은 1368년에 3월에 고려 태조의 현릉(顯陵), 부왕(父王)인 충숙왕의 의릉(毅陵), 충숙왕의 왕비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의 선릉(善陵)에 참배하고 왕비의 무덤인 정릉(正陵)까지 갔다. 3년 뒤인 1371년에도 태조의 현릉(顯陵)에 참배하면서 충렬왕의 경릉, 선릉(善陵), 충렬왕비의 고릉(高陵), 충선왕의 덕릉(德陵)을 함께 참배했다.

또한 공민왕비의 무덤인 정릉(正陵)을 지을 때 “덕릉(德陵)의 나무를 거의 전부 쳐서 재실(齎室)을 짓는데 덕릉의 능지기는 감히 금하지 못하였다”라고 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무덤은 태조 왕건릉과 공민왕릉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개성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종의 장릉과 충혜왕의 영릉은 일제강점기까지 남아 있었지만, 사진으로만 남아 있고, 현재는 무덤 자체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충혜왕의 영릉 전경. 개성 진봉산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5.09.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재위 왕릉 외에 개성지역에는 추존(追尊) 왕의 무덤이 3기 남아 있다. 세조(世祖, 태조 왕건의 아버지)의 창릉(昌陵), 대종(戴宗, 태조 왕건의 아들, 6대 성종의 아버지)의 태릉(泰陵), 안종(安宗, 태조 왕건의 아들이자 8대 현종의 아버지)의 건릉(乾陵) 등이다.

창릉은 예성강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영안성 안에 있고, 태릉은 공민왕릉의 동북쪽 인근에 있다. 추존 왕은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떠난 뒤에 왕으로 높여 묘호(廟號)가 내려진 경우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대종(戴宗)의 태릉(泰陵) 전경. 대종은 왕건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버지로, 고려 6대 성종 때 왕으로 추존(追尊)됐다. 개성시 해선리 공민왕릉 동북쪽에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5.09.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한강과 합류하는 예성강 하구의 최근 모습. 사진 오른쪽에 연안성이 있고, 그 안에 고려 태조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世祖)의 창릉(昌陵)이 남아 있다. 강 상류로 올라가면 고려 시대 대외무역항으로 번성한 벽란도(碧瀾渡)가 나온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9. photo@newsis.com


후에 무릉(武陵)으로 개칭된 건릉은 황해북도 장풍군 월고리에 있고, 50m 정도 남쪽에 헌정왕후(憲貞王后)의 원릉(元陵)이 함께 조성돼 있다. 헌정왕후는 5대 경종의 왕비로, 경종이 사망한 후 안종(安宗)과 불륜으로 현종을 낳았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됐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칠릉군 전경. 모두 능주가 확인되지 않았고, 고려중기부터 후기까지 시기에 조성된 왕후와 왕비,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2020.05.09. photo@newsis.com


개성지역에는 고려의 왕후와 비(妃)의 무덤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에는 적실을 왕후, 후비를 부인(夫人)이라 칭하였고, 중기에는 왕후와 왕비로 나뉘었다. 원 간섭기 때는 왕비를 공주(公主)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때는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가 존재해 왕후가 1명이 아닌 경우도 있었다. 단적으로 태조 왕건에게는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이 있었다. 현재 고려 왕후와 부인은 총 109명 정도로 추산된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개성시 해선리에 충렬왕비의 무덤인 고릉(高陵)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2020.05.09.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공민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정릉(正陵) 모습.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나란히 조성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에 남아 있는 순경태후(順敬太后)의 가릉(嘉陵). 순경태후는 고려 24대 원종(元宗)의 태자비로 결혼한 지 9년 만에 사망했고, 25대 충렬왕의 모후(母后)이다. 인근에 원덕왕후(元德王后)의 곤릉(坤陵)도 남아 있다. 곤릉은 고려 22대 강종(康宗)의 비(妃) 원덕태후(元德太后)의 능이다. (사진=미디어한국학) 2020.05.09. photo@newsis.com


그러나 이들의 능은 왕과 합장된 경우 외에는 대부분 능호와 위치가 소실됐다. 현재 30여 명의 왕후와 추존 왕후의 능호가 확인되지만, 무덤의 위치가 확인된 것은 몇 기가 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태조 현릉 남쪽에 있는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안평공주)의 고릉을 들 수 있다. 태조 왕건의 다섯째 비(妃)이자 안종의 모후인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정릉(貞陵), 헌정왕후의 원릉도 현재 개성 남쪽과 동쪽 외곽에 남아 있다.

추촌 왕후로는 원창왕후(元昌門后, 태조 왕건의 할머니)의 온혜릉(溫鞋陵)이 국보 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온혜릉은 현재 남아 있는 왕릉급 무덤으로는 유일하게 개성 도성 안에 조성된 사례이다.

고려 태조부터 7대 목종까지, 그리고 후대 임금 중 선종의 인릉(사숙태후 합장), 의종의 희종(장경왕후 합장), 명종의 지릉(의정왕후 합장) 등은 합장묘로 조성됐다.

그 외 왕과 왕후의 능은 따로 조성됐다. <고려사> 등의 기록과 현재 확인된 왕후릉을 통해 볼 때 왕과 왕후의 무덤은 가깝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상으로 충렬왕과 왕후의 능인 경릉과 고릉, 충숙왕과 왕후의 능인 의릉과 선릉이 인접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추존 왕과 왕후이긴 하지만 안종의 무릉과 현정왕후의 원릉은 50m 정도 떨어져 있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칠릉군 제2릉 전경. 이 무덤에서는 11세기 후반에 유통된 청동 화폐가 다수 출토돼 12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2020.05.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개성시 해선리에 있는 칠릉군 제6릉 전경. 이 무덤에서는 명나라 건국 직후 사용된 대중통보(大中通寶)가 출토돼 고려 말기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867년(고종 4년)에 세운 표석이 남아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2020.05.09. photo@newsis.com


이러한 사례를 일반화할 수 있다면 현재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왕후와 왕비릉은 해당 왕의 무덤 인근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능주(陵主)를 알 수 없는 선릉군, 칠릉군, 소릉군, 냉정동무덤군, 월로동무덤군, 동구릉, 서구릉 등은 2~3기를 제외하고는 재위 왕의 능이 아니라 왕후와 왕비의 능으로 추정된다.

[서울=뉴시스] 송악산 북쪽 개성시 용흥동에 있는 소릉군 제2릉 전경. 원종(元宗)의 소릉 주변에 남아 있는 4개의 무덤 중 하나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사진=평화경제연구소) 2020.05.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표> 현존 고려 왕릉(왕후, 왕족 추정 무덤 포함)의 분포도. 2020.05.09.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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