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北 고려왕릉] ⑱왕비를 기리며 설계한 공민왕 부부 쌍릉 '현·정릉'

박진희 2020. 5. 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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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직접 설계한 고려 첫 쌍릉 형식의 무덤
고려 왕릉 양식 완성이자 조선 왕릉 본보기
9년간 영전(影殿)공사로 민중 생활 피폐 부작용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8. 조선 시대 왕릉의 모본(模本)이 된 공민왕릉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이 잠들어 있는 현릉(玄陵)은 태조 왕건릉에서 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봉명산의 남쪽 봉우리인 무선봉과 아차봉 사이에 있으며, 개성 남대문에서 10km 정도 거리이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개성시 해선리에 속한다.

공민왕릉의 외관상 특징은 왕비의 능인 정릉(正陵)과 나란히 쌍릉 형식으로 조성돼 있다는 점이다. 원래 고려의 능제에서는 왕과 왕비를 합장하거나 무덤을 별도로 조성했다.

태조 왕건부터 7대 목종(穆宗)까지는 왕과 왕비의 합장묘로 만들었고, 8대 현종(顯宗)부터 30대 충정왕(忠定王)까지는 일반적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따로 조성했다. 현재 개성지역에서 확인되는 왕비의 무덤으로는 충렬왕비의 고릉(高陵)이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현·정릉처럼 왕과 왕비의 무덤이 나란히 쌍릉 형태로 조성된 것은 고려 시대 때 처음 나타난 양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의 무덤과 조선 시대의 왕릉으로 이어졌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정릉(正陵) 전경. 왼쪽이 현릉이다. 현릉은 공민왕이 죽기 전 직접 설계하고 준비해 둔 고려 시대 유일의 수릉(壽陵)이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있는 고려 34대 공양왕(恭讓王)과 순비(順妃) 노 씨의 능. 1394년(태조 3)에 축조됐으며, 공민왕릉과 같은 쌍릉 양식으로 조성됐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두 개의 능 중 서쪽에 있는 것이 공민왕의 현릉이고, 동쪽에 있는 것이 왕비의 무덤인 정릉(正陵)이다. 남쪽에서는 통상 ‘공민왕’이라고 부르지만, 북쪽에서는 최근 ‘경효대왕(敬孝大王)’이란 시호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효대왕’은 후계자인 우왕(禑王)이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이고, 공민왕은 우왕 11년에 명나라가 보낸 시호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정릉(正陵) 앞에 서 있는 표석과 정자각. 2013년 세계문화유산 등록과 국보 유적 123호로 지정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과거 북한은 공민왕릉으로 표기했지만, 최근에는 ‘경효왕릉’으로 표기하고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공민왕(재위 1351년∼1374년)은 어렸을 때 원나라에 볼모(볼모) 생활을 10년 동안 했고, 그곳에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했다. 공민왕의 이름은 왕전(王)이고, 충선왕(忠宣王)의 손자이자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이다. 볼모로 있는 동안 쇠락해가는 원나라의 실상을 목격한 그는 왕위에 오른 후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를 통해 신진사대부를 등용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로 고려 중흥에 나섰다.

변발과 오랑캐 옷 등 몽골식 생활 풍습을 금지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원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99년 만에 되찾기도 했다. 원나라의 공주였던 노국대장공주는 이러한 공민왕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원의 압력으로부터 공민왕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왕비가 죽은 후부터 공민왕은 정사를 멀리하고, 죽은 왕비의 능과 영전(影殿, 초상을 모신 전각) 건설에만 몰두했다. <고려사> 따르면 공민왕은 즉위 14년(1365년)에 왕비가 산고(産苦)로 죽자, 왕비를 위해 직접 무덤을 설계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이때 왕비릉 옆에 자신이 묻힐 능을 함께 조성했고, 왕비 사후 9년이 지난 1374년에 승하해 이곳에 묻혔다.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는 무덤을 수릉(壽陵)이라고 하는데, 공민왕릉은 고려 시대 유일한 수릉이다.

특히 7년간이나 공을 들여 조성한 현·정릉은 건축과 설계 면에서 당시 고려 사람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 건축술, 조형예술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역사유산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공민왕의 현릉과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을 직접 가서 석물을 하나하나 보면 세심한 설계와 정밀한 조각기법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왕비에 대한 공민왕의 사랑이 지나친 게 문제였다. 왕비가 사망하자 공민왕은 왕비의 무덤과 혼전을 짓기 위해 엄청난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당시 “영전(影殿)과 정릉(正陵)의 공사가 크게 벌어져서 모든 관원이 하는 일은 토목의 범위를 넘지 않았고 일반 사무는 거의 정지되었으며 창고는 비었고 왕궁의 호위는 허술하였다”고 한다.

<고려사> 공민왕 편에서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즉위 후 온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며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신돈(辛旽)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쓸데없는 건축공사(노국공주 영전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공민왕은 정사를 소홀히 하면서 정릉과 영전 역사에 집중했고, 공주의 기일, 생일을 비롯해 틈만 나면 정릉과 왕륜사(王輪寺) 동남쪽 영전 건설 현장을 찾았다. <고려사>에는 “왕은 심히 취하면 공주를 생각하고 울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결국 공민왕은 재위 23년 만에 암살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현재 공민왕릉의 능 구역은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3개 층 단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3단과 경사면 중앙으로는 계단을 두어 능으로 오를 수 있도록 했고, 경사면 아래 평지에는 복구한 정자각이 있다. 현릉과 정릉은 동서 40m, 남북 24m 정도 되는 상단 한가운데에 나란히 조성돼 있다.

현릉의 봉분은 지름 13.7m, 높이 6.5m이고, 주위로 돌난간을 돌렸으며, 화강암으로 12각의 병풍석(호석)을 돌리고 면석에 12지신과 연꽃무늬를 조각했다. 병풍석의 위와 아래로는 다양한 종류의 석재를 배치하여 병풍석이 고정되도록 했다.

[서울=뉴시스] 1910년대에 촬영된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정릉(正陵) 전경. 일제가 발굴 보수하기 전(왼쪽)과 보수 후의 모습.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사진3>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정릉(正陵) 정면 모습. 장대석을 이용하여 동서 50m, 남북 45m의 규모로 축조된 능계 3단과 남쪽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사면과 능계의 중앙으로는 계단을 두어 능으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으며 경사면 아래 평지에는 정자각을 두었다. 2020.05.02. photo@newsis.com


병풍석의 바깥으로 위치한 난간석은 병풍석과 평행하게 돌렸는데, 현릉과 정릉이 겹치는 부분을 생략하고 각각 10각이 되도록 연결되어 있다. 돌로 만들어진 난간의 바깥으로는 호랑이와 양(羊) 모양의 석수를 각 4기씩 번갈아 가며 배치했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정릉(正陵)의 뒤쪽 모습.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번갈아 가며 배치돼 있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현릉과 정릉의 봉분 앞쪽에는 각각 상석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1단의 동서 양쪽에는 망주석을 세웠고, 2단에는 능의 정면에 장명등이 하나씩 배치돼 있다. 장명등의 좌우와 3단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2쌍씩 총 8기가 배치되어 있다. 공민왕릉은 현재 고려왕릉 중 유일하게 무인석이 확인되는 사례로, 이러한 전통은 이후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서쪽에 서 있는 문인석, 무인석.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정릉(正陵)과 동쪽에 서 있는 문인석, 무인석.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 앞 서쪽에 서 있는 문인석과 무인석. 고려 왕릉 중에서는 유일하게 문인석과 무인석을 나눠 함께 세웠다. (사진=미디어한국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1950년대에 북한의 발굴조사에 따르면 묘실은 가로 2.97m, 세로 3.0m, 높이 2.3m이며, 화강암 판 돌로 쌓고 평천장으로 했다. 묘실의 중앙에 관대가 놓여 있다. 묘실의 동, 서, 북 세 벽면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이 각각 4상씩 배치되어 있다. 북쪽 벽에는 술(戌)·해(亥)·자(子)·축(丑)의 신상이, 동쪽 벽에는 인(寅)·묘(卯)·진(辰)·사(巳)의 신상이, 서쪽 벽에는 오(午)·미(未)·신(申)·유(酉)의 신상이 그려져 있다. 12지신상은 대체로 70∼75㎝의 크기이고, 구름을 타고 손에 홀을 쥐었으며, 머리에 관을 쓴 인물로 형상되어 있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무덤인 현릉(玄陵)의 묘실에 그려져 있는 벽화와 천장의 별자리. 벽화는 동·서·북의 세 벽면에 12지신상이 각 면에 4구씩 배치되어, 북쪽 벽에는 술(戌)·해(亥)·자(子)·축(丑)의 신상이, 동쪽 벽에는 인(寅)·묘(卯)·진(辰)·사(巳)의 신상이, 서쪽 벽에는 오(午)·미(未)·신(申)·유(酉)의 신상이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해와 북두칠성, 삼태성(三台星)이 그려져 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무덤인 현릉(玄陵)의 묘실 동쪽 벽화와 유혼혈(遊魂穴). 벽에 가로 38cm, 세로 43cm의 문이 새겨져 있고,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왕비의 무덤인 정릉(正陵)과의 연결을 표시했다. (사진=미디어한국학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묘실의 동벽에는 가로 38cm, 세로 43cm의 문이 새겨져 있고, 그 밑에 네모난 구멍을 뚫어 정릉과의 연결을 표시했다. 죽어서도 공주와 함께하고자 했던 공민왕의 사랑이 느껴지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이 공민왕릉의 묘실을 발굴했을 때는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었다. 1910년대 북한이 조사할 당시에도 동전과 철제 가위 등이 출토됐을 뿐이다.

조선 중기 유학자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던 유호인(兪好仁)은 개성답사기에서 “무덤을 처음 만들 때 구슬과 비단, 옥으로 된 상자, 금으로 만든 오리, 은으로 만든 기러기 등 많은 보물로 장식하여 여산에 있다는 진시황의 무덤과도 비견할 만하였다”라고 표현했다. 그 많은 부장품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북한의 연구에 따르면 러일전쟁 시기에 일제가 공민왕릉을 도굴해 수많은 유물을 가져갔다고 한다. 일제가 도굴을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화승총까지 들고 저항한 지역민들에 의해 실패를 거듭하자, 1905년 헌병대까지 동원해 도굴을 감행해 10여 대의 수레에 유물을 나눠 싣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공민왕릉에서 약탈해간 유물 중 황금용두잔, 황금합, 황금 장신구 4점은 몇 년 전에 국내에 입수돼 공개됐다.

그나마 공민왕은 진영(眞影)이 사진으로나마 전해지는 유일한 고려의 임금이다. 원래 고려는 왕과 왕비의 초상화인 진영을 개성 경령전에 봉안(奉安)했고 경령전 외에도 원찰(願刹)에 왕과 왕비의 진영을 봉안하는 진전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와 고려 왕들의 진영이 대부분 폐기됐다. 세종(世宗) 9년에는 고려 태조 진영 3점을 왕건릉 옆에 묻었고, 다음 해에도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려 태조와 2대 혜종(惠宗)의 진영을 능 옆에 묻었다.

그리고 세종 15년에는 고려 여러 왕의 진영을 역시 능 옆에 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개성 영통사에 문종(文宗)과 선종(宣宗)의 진영이, 개성 광명사에 목종의 진영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그 후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공민왕의 진영 한 점은 1910년대까지 개성 화장사(華藏寺)에 보관돼 있었다. 1540년 <중종실록>에 따르면 화장사에 있던 초상화 중 조선 정종 어진으로 추정되는 것을 대궐로 들였다가 당시 도화원에 소장되어있던 조선 정종 어진들과 비교해 보니 보습이 달라서 화장사로 되돌려 보냈다. 이때 도화원에 있던 공민왕 진영도 함께 화장사로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진영도 진본은 사라지고, 일제가 1916년에 촬영한 사진만 남아 있다. 이외에도 조선 시대에 그린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 초상’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초상화의 원본은 태조 이성계가 종묘(宗廟) 창건 (1395, 태조 4) 당시 경내의 신당(神堂)에 봉안했던 것으로, 현재 보관된 초상화는 임진왜란 (1592~1598) 때 불탄 건물을 광해군(光海君) 때 복원하면서 모사한 것이다.

[서울=뉴시스] 화장사에 있다가 한국전쟁 때 불탄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 공민왕의 초상화 사진(1916년 촬영). 공민왕은 사진으로나마 진영(眞影)이 전해지는 유일한 고려 임금이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조선 시대에 그려진 공민왕·노국대장공주 부부의 초상화. 공민왕 부부의 영정 그림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종묘(宗廟) 창건 (1395, 태조 4) 당시 경내의 신당(神堂)에 봉안(奉安)했던 것인데 임진왜란 (1592~1598)으로 불타버리자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移模)한 것이라고 한다. 공민왕은 사진으로나마 진영(眞影)이 전해지는 유일한 고려 임금이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개성시 오산리에 있는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의 무덤인 현릉(玄陵) 입구에 남아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 이 비는 공민왕(恭愍王)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광통보제선사의 건립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일본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정릉의 오른쪽에 서 있었는데, 북한이 공민왕릉을 보수하면서 입구로 옮겼다. (사진=평화경제연구소 제공) 2020.05.02. photo@newsis.com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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