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넘어 아늑한 바다

글·사진 서산=김동욱 기자 2020. 5. 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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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충남 서산 지방도 647호선을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길 양쪽 구릉에 초록빛 목초지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벚꽃이 피는 봄이나 눈으로 뒤덮인 겨울에는더욱 풍경이 빛난다.
충남 서산은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봄의 풍경이 그렇다. 넓은 들판과 야생화, 짙어만 가는 초록의 향기를 품은 산과 그 속에 담긴 사찰,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갯벌…. 신이 정성스레 빚은 자연이 눈앞에 펼쳐진다. 드러내놓고 화려하진 않다. 하지만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에까지 담고 싶은 그런 풍경이 서산에 있다.

서산 지방도 647호선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특히 서산 운산면 태봉리 서산목장에서부터 신창리 현대목장까지 이어지는 약 4.7km 구간은 이국적이고 이색적이다. 유럽의 전원 마을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길 양쪽 구릉에 초록빛 목초지가 펼쳐져 있다. 완만한 곡선의 구릉이 솟았다가 내려갔다 하면서 한참 이어진다. 드문드문 나무들이 구릉에 자란다. 마치 풀 뜯는 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주려는 듯. 아름다운 문장 사이의 쉼표 같은 느낌이랄까.

봄이면 개심사 명부전 앞마당에 청벚꽃이 피는데 푸르스름한 빛의 꽃이 눈길을 끈다.
지방도 647호선 주변 목장은 1960년대 후반 조성됐다. 당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삼화축산주식회사를 설립해 수년에 걸쳐 개간해 만들었다. 주민들은 오랫동안 이곳을 ‘김종필 목장’으로 불러 왔다. 정식 명칭은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 4.40km²로 여의도 면적(윤중로 제방과 한강시민공원 포함)과 비슷하다. 국내에서 5% 안에 드는 우수 종모우를 길러내는 곳이다. 1998년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방북하며 몰고 갔던 소들이 여기 출신이다.

소 방목이 시작되는 봄이면 벚꽃과 민들레 등 갖가지 들꽃이 목초지에 핀다. 초록색 도화지에 여러 색의 물감을 흩뿌린 그림을 연상케 한다.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수령 30년 이상의 벚나무 1000여 그루가 목초지를 배경으로 터널을 이루는 장관도 볼 수 있다. 지방도에서 목장 능선을 따라 전망대에 이르는 500m 길이의 길 양쪽에 벚꽃이 늘어서 있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는 풍경은 사랑스럽다.

목장 주변에 커피를 마시며 쉴 카페나 휴게소는 없다. 외부인의 목장 출입도 금지하고 있다. 펜스 밖에서 사진을 찍거나 풍경을 보는 데 만족해야만 한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봄의 기운을 얻기에는 충분하다. 봄 풍경을 놓쳤다고 해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여름, 가을, 겨울에도 색다른 풍경이 연출되기에 언제든 방문해도 좋다.

지방도 647호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충남 4대 사찰 중 하나인 개심사가 있다. 654년 백제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했다. 이후 1350년 고려 충정왕 2년에 처능대사에 의해 중수됐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솔숲을 따라 올라가는 길에서는 수령이 60년 정도 된 어린 소나무들이 반긴다. 빽빽하게 늘어서 있으면서 다양하게 휘어진 모양을 감상하다 보면 10분 정도의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보원사는 주변에 암자 100개를 거느릴 정도로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절터만 남았다.
절은 아담하다. 조선 성종 15년(1484년)에 중창한 대웅전(보물 제143호)을 포함해 14점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다. 고려 때 세운 5층 석탑도 보인다. 개심사 기둥들은 위아래 굵기가 다르다. 휘어진 기둥도 있다. 나무를 손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 그대로 갖다 사용했기 때문이다. 개심사의 매력으로 이 기둥들을 꼽는 사람들도 많다.

부처님오신날 전후로 벚꽃이 가득 피어 사찰을 감싼다. 벚꽃이 활짝 필 땐 사찰이 이렇게 화려해도 되는지 의아할 정도다. 대웅전 앞에는 진달래가 풍성하게 폈다. 심검당 앞에는 백매화와 홍매화가 만발했다. 명부전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청벚꽃은 초록을 살짝 머금은 겹벚꽃인데,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다.

코를 박고 있는 형상의 코끼리바위. 주위는 몽돌해변으로 파도에 돌 부딪치는 소리가 정겹다.
개심사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보원사지는 사람들이 많이 찾지는 않지만 운치 있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보원사가 있었던 터다. 통일신라 시대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원사는 100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1000여 명의 승려가 수행했을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 고려 시대에도 융성했던 절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폐사됐다. 조선의 억불숭유(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함) 정책 때문에 폐사됐다거나 불이 나서 사라졌을 거라는 이야기만 전한다.

절터의 넓이는 약 10만 m², 축구장 13개 정도 규모다. 현재는 입구에 우뚝 선 두 개의 돌기둥인 당간지주와 5층 석탑, 법인국사탑과 탑비만 있을 뿐이다. 절터에서 출토된 신라와 고려 시대의 유물은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됐다. 높지 않은 산줄기 사이에 터를 잡은 덕분에 햇빛이 들면 아늑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때문에 텅 빈 절터인데도 황량한 느낌은 덜하다. 녹색으로 물든 주변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찬란했던 옛 시절의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물이 빠져야 걸어갈 수 있는 간월암은 태조 이성계 때 창건된 작은 암자다. 밀물 때는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여 연화대로도 불린다.
간월도는 물이 빠져야만 걸어서 갈 수 있는 섬이다. 원래 태안군 안면읍에 속했지만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부석면과 연결되면서 서산시에 편입됐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간월암이란 암자가 이 섬의 전부인, 아주 작은 섬이다. 간월암은 물이 찰 때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비슷하다고 해서 연화대라고도 불린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무학대사가 이 암자에서 수도하던 중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조선 시대에 폐사되었다가 1941년 만공선사가 중창했다.

물때를 잘 맞춰야만 간월암에 닿을 수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밀물 때 배를 이용했지만 지금은 운항하지 않는다. 육지에서 간월암까지 1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물이 차면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간월암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간월암을 둘러보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간월암에서 보는 주변 바다와 섬 풍경이 빼어나 계속 머물고 싶어진다. 물이 빠질 때는 갯벌과 갯바위를 오가며 산책도 할 수 있다. 붉은 노을빛을 배경으로 한 해질 무렵의 섬 실루엣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깨달음을 얻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물이 빠질 때만 들어갈 수 있는 섬이 서산에 하나 더 있다. 곰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 웅도란 이름이 붙은 섬이다.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자주 바다에 잠기는 탓에 따개비 등이 다리에 붙어있다. 섬에 들어가면 나무 덱으로 만든 바다 산책길을 만날 수 있다.

섬에서 육지로 탈바꿈한 곳도 있다. 서산의 북서쪽 끝에 있는 황금산이다. 예전에는 섬이었지만 1980년대 후반 주변에 화학공단이 들어서면서 육지와 이어졌다. 황금산은 원래 항금산이라 불렸다. 금이 발견되면서 황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서쪽 바위절벽에 금을 캤던 동굴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긴 어렵다. 산 정상에는 예로부터 풍년과 안전을 기원했던 당집을 복원해 놓았다. 요즘도 이 당집에서 매년 봄 제향을 지낸다.

황금산은 해발 156m의 낮은 산이다. 30분 정도 걸어 산을 넘으면 코끼리바위와 몽돌해변이 있는 아름다운 해안절벽을 감상할 수 있다. 비슷한 크기의 돌들로 이뤄진 몽돌해변에 서 있으면 파도가 들어가고 나갈 때 돌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파도 소리와 어울리며 오케스트라 화음처럼 들린다. 이곳에 코끼리바위가 있다. 코끼리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전국 여러 곳에 있는데 이 바위가 가장 코끼리를 닮았다고 한다. 코를 바다에 처박고 있는, 바닷물로 막 목욕을 시작하려는 모습이다. 나무 계단을 통해 코끼리바위 양쪽을 오갈 수 있다.

아름다운 서산의 풍경이 눈과 귀, 그리고 마음에 깊숙이 침잠할 뿐이다.

글·사진 서산=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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