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드러낸 세상..끝없이 진화하는 마스크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2020. 5. 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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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 전 세계인의 얼굴을 덮다
의료용, 복면, 가면, 스포츠 용구 등 용도도 다양
"계급장 떼고.." '복면가왕' 장수프로로 정착
얼굴 전체 가리고 두는 암흑바둑도 등장

이런 세상도 살아본다. 사람들의 얼굴이 사라졌다. 어디를 가도 마스크만 둥둥 떠다닌다. 코와 입은 완전 실종이고 여차하면 턱마저 숨어버린다. 상대 머리끝서 발끝 사이에서 정체를 식별할 유일한 창구는 두 눈 뿐이다. 이름 석자 외에 모든 정보를 시커멓게 지운 명함을 건네받을 때 기분이 이럴까. 마스크 천국, 민낯 실종의 시대다.

코로나 바이러스란 놈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대첩(大捷)이다. 인류 역사를 뒤집어 놓은 병원균은 수없이 많았지만, 이처럼 압도적 승률로 전 세계인의 입을 틀어막은 녀석은 없었다. 마스크 제조 여건 또는 품질을 국가 서열의 새 척도로 바꿔놓을 기세다. 마스크 보유량이 GNP나 핵무기 숫자를 대체할 날도 멀지 않아보인다.

◇프로레슬러, 자객, 강도 복면도 같은 식구

마스크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착용자와 세상의 차단막이다. 자신을 우주 삼라만상으로부터 유리(遊離) 시키겠다는 당찬 의지가 천 한 조각에 담겨있다. 언택트(untact)의 최전선이자, 1인칭이 2인칭과 3인칭을 향해 내던지는 한시적 절교선언이다. 거리를 넘실거리며 떠다니는 마스크 행렬에서 인간 자존감(自尊感)과 자위(自衛) 본능의 극한을 본다.

‘대표선수’는 역시 의료용 마스크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 그 위력이 입증되고도 남았다. 마스크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 몇 십배 더 많은 환자가 발생했을 테니까. 하지만 마스크를 외부 병원균 차단용 안면(顔面) 가리개로만 알고 있는 건 잘못이다. 기능과 용도가 엄청 다양하기 때문이다. 마스크 가계(家系)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복면(覆面) 강도는 동 서양 구분 없이 꽤 오랫동안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사양 직종’으로 추락했다. 경제 난국에도 은행 실적은 여전히 양호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이 직업이 인기 높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설비투자 비용이 거의 안 든다는 점이었다. 단 2가지 준비물만 갖추면 바로 실전 투입이 가능했다. 약간의 무기, 그리고 복면이었다.

복면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게 핵심이다. 제 얼굴 공개엔 두려움이 없는 의료용 마스크와 차별화된다. 자객, 밀정(密偵) 등 복면강도와 유사 직종들 역시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 고성능 원격 살상 무기들의 대거 출현이 이들을 일터에서 내쫓았다. 출동 나갈 때마다 유니폼(마스크)을 매번 세탁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영세(零細) 강도들의 폐업이 애처롭다.

복면은 정치 동네도 외면하지 않는다. 홍콩 시위가 가열되던 무렵 시민들이 복면을 두른 채 경찰에 저항했다. 역시 신분 노출 회피가 주목적이었다. 경우는 약간 달랐지만 국내 시위에서도 복면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2015년 박근혜 대통령 시절 집시법 개정안에 복면시위 금지법이 포함되자 시위대가 복면 시위로 맞섰다.

◇포수 마스크, 야구 경기 필수 용품

복면가왕(覆面歌王)이란 TV 예능프로가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계급장 떼고 겨루자‘다. 선입관을 떠나 오직 노래만으로 실력을 평가하기 위해 얼굴을 가린다고 했는데 거의 전신을 다 가렸다. 강도나 자객용 복면도 눈구멍만은 뚫어놓건만 그런 자비조차 없었다. 아무튼 이 프로그램은 실제 숨겨진 보석들이 기성 가수를 꺾는 이변이 속출하면서 5년째 롱런 중이다.

가면(假面)은 복면(覆面)의 사촌쯤 될까. 얼굴 가리는 게 목적이란 점에서 사실 둘은 큰 차이 없는 마스크 들이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무도회도 하고, 프로레슬링도 한다. 쇼로 분류되는 프로레슬링에서 가면은 선수의 자존심이자 최후의 보루로 설정된다. 패할 때 마스크를 벗고 얼굴을 공개해야 하는 규정 때문이다.

마스크는 얼굴 은폐뿐 아니라 보호 목적으로도 사용된다. 야구 경기 포수(捕手) 마스크가 대표적이다. 쭈그리고 앉아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그가 강민호인지, 양의지인지 관객들은 귀신같이 안다. 펜싱 마스크도 대표적 안면 보호용 호구(護具)인데, 요새는 여기에 총천연색 국기까지 그려 넣어 별개의 볼거리로 등장했다.

예전엔 이발관에 가면 이발사 아저씨 또는 면도사 아가씨가 마스크를 쓰고 작업했다. 손님과 종업원 중 누구를 위한 장치였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요즘 연예인들은 또 왜 그렇게 마스크를 애용하는지…. 필자는 재판 받고 나오는 재벌 영감님들의 마스크 무한 사랑을 보면서, 그들의 계열 기업에 마스크 공장도 들어있는 게 틀림 없다고 확신했었다.

바둑 게임에도 마스크가 등장한 적이 있다. 2019년 국제대회로 진행된 ‘복면기왕(覆面棋王)‘이란 대회다. 행사 이름에서 짐작 되듯 ’복면가왕‘ 짝퉁 프로그램이라고 보면 된다. 출전 선수들은 마스크 틈새에 마련된 구멍을 통해 바둑판을 보면서 대국했다. 마지막에 가면을 벗은 우승자 박정환은 이렇게 말했다.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대국할 수 있어 좋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마스크 쓰고 싸우고 싶어요.”

◇눈까지 가리고 300수 ‘암흑 바둑’... 최고 난도 마스크 게임

마스크를 씌우더라도 눈구멍만은 뚫어놓는 게 게임의 기본이다. 그런데 코와 입은 물론 눈까지 두꺼운 수건으로 가리고 맞붙는 바둑이 있다. 맹기(盲棋)라고도 하고 암흑바둑이라고도 불리는 게임이다. 상대의 착점 위치를 보조원이 좌표로 불러주면 이를 자신의 뇌에 입력해 암보(暗譜)로 두어가는 방식이다.

2006년 바오윈이라는 중국 아마추어 기사가 한 명도 아닌 2명과 암흑 바둑을 두어 승리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목진석 9단이 두 차례 맹기를 시도했었다. 전맹(全盲) 기사 송중택씨는 마스크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 특수 제작된 점자 바둑판에서 상대 착점을 감지한 뒤 자신의 돌을 끼워넣는 방식으로 맹인 바둑대회를 휩쓸었다. 어떤 철벽 마스크도 그의 심안(心眼)까지는 가리지 못 했다.

얼굴 한 구석에서 유일하게 버텨온 눈마저 마스크 속으로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 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얼굴 대신 마스크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시하고 다니는 세상이 올 것 같다. 남자는 귀찮게 매일 수염 안 깎아도 되고, 여성들은 값비싼 성형수술 따위 할 필요가 사라진다. 마스크(mask)엔 원래 ‘얼굴’이란 뜻도 있다니 억울할 것도 없다.

마스크는 시대를 상징하는 깃발 같은 것인지 모른다. 보호·은폐·실험 등으로 기능을 확장해 가더니 이제는 패션 용품으로 진화하는 단계까지 왔다. 칼라 무늬에 온갖 그림과 글자까지 새겨 넣는 아름다운 마스크가 속출 중이다. 트럼프도, 아베도 썼다. 마스크의 종착역은 어떤 모습일지, 마스크로 사람을 식별해야 하는 시대가 정말로 닥쳐오는 건 아닐지 무섭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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