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워야 남이 들린다.. 세종의 소통[Monday DBR]

2020. 4. 27. 03: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매우 독선적인 리더였다. 그 자신이 항상 표준이고 최고였다. 그래서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잡스의 이런 성향은 다른 경영진과의 마찰을 초래했고 1985년 그가 애플에서 쫓겨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997년 애플에 복귀한 후 스티브 잡스는 직원들에게 자신을 “Chief Listening Officer(CLO)”라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 ‘최고경청자’란 의미다. 변방을 떠도는 과정에서 깊은 성찰이 있었고 그것이 그러한 자기반성 겸 선언으로 이어졌다. 지시하는 리더에서 듣는 리더로, 잡스의 리더십 반전이 있은 후 애플은 실리콘밸리의 또 다른 신화를 써 내려갔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는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대화 습관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 단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경청하는 습관을 들 것이다.” 잡스에게 딱 어울리는 경구다.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에게도 이 경구는 그대로 적용된다. 세종의 취임 일성은 “그대들의 의견을 듣겠다”였다. 세종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 중 하나도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는 표현이다. 한자로 들을 ‘청(廳)’이라는 글자는 귀 이(耳), 임금 왕(王), 열 십(十), 눈 목(目), 한 일(ㅡ), 마음 심(心)으로 구성돼 있다. 어진 임금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큰 귀와 밝은 눈으로 신하들의 말과 몸짓을 잘 듣고 잘 살펴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 있다는 의미다. 이 덕목을 가장 잘 실천한 임금이 바로 세종이었다.

청각에 이상이 없는 한 모든 사람은 듣는다. 그러나 듣는다고 해서 다 듣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골라서 듣는 경향이 있다. 귀에 거슬리는 말은 대체로 흘려듣는다. 그래서 입으로는 “그래, 알았어”라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알았으니 그만해”라고 장벽을 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정치권에서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통에서 필요한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래서 경청(傾聽)이다.

경청의 조건은 비움이다. 수납장이 가득 차면 더 이상 물건을 집어넣을 수 없듯이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잡다한 지식이나 경험, 자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은 타인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다 아는 걸 굳이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유형의 리더는 조직을 경직되게 만들고 퇴화시킨다. 스티브 잡스가 깨우친 것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채우기 전에 먼저 비워야 한다.

세종은 지식이나 학식에서 신하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역사와 철학, 음악, 과학 등 다방면에 걸친 독서와 학습으로 스스로 문리를 터득했다. 그러나 세종을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으로 만든 것은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지식이나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자신을 비운 후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경청의 리더십이었다.

다양성의 인정 여부는 경청 리더십의 성패를 가늠하는 또 다른 척도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경청의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또 너야? 됐어, 그만해” 하면서 괴짜나 아웃사이더의 말에 손을 내저으면 조직 내 소통을 활성화시킬 수 없다. 삐딱한 말도 들어주는 리더라는 평판이 나야 직원들이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세종 시대의 허조(1369∼1439)는 유명한 아웃사이더였다.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허조는 늘 소수 의견을 냈다. 모든 신하가 찬성할 때도 허조는 “혹시 이런 폐단이나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다”며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회의의 흐름이 끊기고 분위기가 경직될 수도 있었지만 세종은 단 한 번도 허조의 말을 가로막지 않았다. “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허조의 소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엉뚱한 물음표를 던지는 직원을 가로막을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심을 헤아리고 등을 두드려줄 수 있는 리더가 CLO의 자격을 갖춘 리더다.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이 원고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95호에 실린 ‘귀 기울이려면 먼저 비워라’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