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량 위주 공급은 옛말.. '맞춤형 임대주택'으로 패러다임 바꾼다

황재성 기자 2020. 4.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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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임대주택 30년] <2> 변신하는 임대주택
서울 도봉구 방학천문화예술거리 ‘문화인마을 3차’(오른쪽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선 황선무 씨. 그는 배우이면서 코미디 퍼포먼스 극단 ‘우카탕카’ 대표이기도 하다. 문화인마을 3차는 황 씨 같은 배우를 비롯해 독립영화 감독, 웹툰 작가, 가수 등 문화예술계 종사자 13가구가 살고 있는 맞춤형 임대주택이다. 황재성 기자 jsonhng@donga.com
“5층 집에서 마음 편히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서울 도봉구 방학천을 따라 조성돼 있는 문화예술거리 한가운데 위치한 ‘문화인마을 3차’. 붉은색 벽돌의 5층짜리 이 건물은 서울시가 맞춤형 주거복지 사업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임대주택이다. 이곳에서 10일 만난 코미디 퍼포먼스 극단 ‘우카탕카’의 대표이자 배우 황선무 씨(32)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것 같은 반지하방을 이곳저곳 전전하며 10년 정도 살았다”며 “현재 살고 있는 집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다”고 말했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배우의 꿈을 찾아 스무 살 때 상경한 뒤로 그는 궁핍한 예술가의 삶을 이어가야 했다. 특히 쉴 곳이 문제였다. 공연장이 밀집한 대학로가 가까우면서도 임차료가 싸고 생활비가 덜 드는 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구한 집들은 한겨울에 보일러가 터지기 일쑤였고, 수시로 바퀴벌레가 출몰할 정도로 열악했다. “영화에서처럼 방에서 오줌 싸는 취객을 지켜보는 일도 흔했습니다.”

고진감래라고 2018년 기회가 왔다. 그해 8월 이 임대주택 13가구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고 그는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첫 번째 입주자가 됐다. 현재 집은 5층에 전용면적 48㎡ 넓이로 방과 거실, 욕실을 갖춘 화장실이 있다. 언제든 따뜻한 물이 나오고 바퀴벌레는 눈 씻고 찾아도 없다. 임차료도 주변 시세의 30% 이하 수준이다. 무엇보다 같이 사는 입주민들이 예술계 종사자들이라 서로 의지할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수입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방예리(방학천문화예술거리)’에서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빌라에 산다는 건 자랑거리”라며 활짝 웃었다.

● 아파트부터 도심 빌라까지 다양해진 공공임대주택

공공임대주택이 변신 중이다. 1990년 첫 영구임대주택인 서울 강북구 번동 주공아파트를 시작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장기공공임대아파트는 도입 초기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는 방식에 치중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도심의 기존 주택을 매입하거나 임차한 뒤 입주시키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가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면 민간 사업자가 그에 맞는 임대주택을 짓는 방식(매입 약정테마 주택)까지 도입됐다. 대상 주택은 85㎡ 이하 크기의 다가구부터 다세대, 연립주택, 오피스텔, 원룸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입주 대상자도 초기에는 기초생활수급자를 중심으로 사회취약 계층에 국한됐지만 최근에는 신혼부부나 홀몸어르신, 청년창업가 등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서울 도봉구 노해로 51길에 위치한 임대주택은 문화인마을3차와 함께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름부터가 ‘만화인마을’인데 도심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한 5층 높이의 신축 빌라이다. 2017년 국내 최초로 만화 분야 종사자들을 위해 조성된 공공임대주택이다. 이곳에 처음부터 입주해 살고 있는 심정민 작가(44)는 애니메이션회사에서 PD생활을 12년 간 하다 뒤늦게 작가로 전업했다. 그도 작업과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저렴한 집을 찾아서 반지하집을 전전하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입주에 성공했다. 그는 “창작자는 외톨이로 지내면서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 며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지역사회 행사에도 기여할 수 있어 더할 수 없이 좋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또 2018년 ‘양적 공급’에 치중했던 공공주택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뒤 임대주택 다양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관악·노원·마포·용산·영등포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모두 125개 동 2275채의 수요자 맞춤형 주택을 공급했다. 유형도 청년근로자를 위한 원룸주택(강남구)부터 가죽패션 분야 종사자를 위한 ‘가죽창작마을’(강동구), 청년부터 홀몸어르신, 신혼부부 등이 같이 사는 ‘소셜믹스 복합단지’(금천구), 의료 약자용 임대주택 ‘신내의료안심’(중랑구) 등 다채롭다.

국토교통부가 3월 공개한 ‘주거복지 로드맵 2.0’은 이 같은 공공임대주택의 변신에 가속도를 붙일 것으로 기대된다. 로드맵 2.0에 따르면 2025년까지 △청년 및 독신가구용 맞춤형 주택 35만 채 △고령자 전용 임대주택 9만 채 △신혼부부 맞춤형 주택 40만 채 △다자녀가정 맞춤형 주택 3만 채 등이 신규 공급될 예정이다. 김석기 국토부 주거복지정책과장은 “지역전략산업에 종사하는 청년근로자를 위한 ‘지역전략산업지원주택’이나 ‘기숙사형 청년주택’ 등과 같이 일자리와 연계하거나 청년층에 특화한 임대주택 등을 개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임대주택을 보급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1인 가구 급증 등 사회 변화에 적응

이처럼 ‘소품종 대량생산’에 치중했던 공공임대주택이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변신하는 이유는 임대주택 재고물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에 육박하면서 양적 부족 문제에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주거복지의 핵심적인 기반시설인 장기임대주택이 전체 주택에서 차지하는 비중(임대주택 재고율)은 2018년 기준 7.1%다. OECD 전체의 평균 임대주택 재고율(8%)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3.3%) 일본(3.1%) 독일(2.9%) 등을 크게 웃돈다. 정부가 추진하는 주거복지 로드맵 2.0이 계획대로 시행되면 2025년까지 재고물량은 240만 채에 육박하고 재고율은 10%를 넘어선다. 이에 따라 임대주택을 단순히 사회취약계층의 사회안전망으로 활용하는 수준에서 탈피해 저출산, 고령화, 청년실업 등과 같은 사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1, 2인 가구의 급증과 ‘부부+자녀’ 가구의 급감도 임대주택 다양화를 촉발시켰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2.7%에서 2017년 28.5%로 20여 년 사이 배 이상으로 커졌다. 현재 추세대로면 1인 가구 비중은 2027년(32.9%)에는 30%대를 넘어서고, 2047년에는 37.3%로 올라설 것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4인 가족용으로 설계된 아파트를 벗어나 다양한 크기와 유형의 주택을 필요로 하는 사회취약계층이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박미선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보다는 남성, 특히 중장년 남성이 1인 가구 증가를 선도하고 있다”며 “이에 맞는 임대주택 개발과 주거복지 시스템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고 설명했다.

● 맞춤형 관리방안 마련과 품질 제고 위한 노력 필요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런 임대주택의 변화하는 방향이 긍정적이라는 반응이다. 다만 주택 다양화에 걸맞은 관리 시스템과 입주민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급속도로 양을 늘리면서 발생하는 후속 문제에 대한 대비가 부족하다는 우려가 많다. 진미윤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은 “소규모의 임대주택이 다양하게 흩어져 있어 관리 효율성이 떨어지는 점을 보완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나 개별 주택 단위로 관리사업자를 선정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광역 단위로 관리사업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진 연구위원은 또 “대규모 단지형으로 조성된 아파트처럼 시설 노후화에 대비한 ‘노후시설 개선보조금’과 같은 재정적 지원을 마련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도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공공임대주택 자체의 품질 제고도 필요하다. 장경석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임대주택 면적이 너무 작아 입주민의 생활 불편을 초래하고, 임대주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고착화시키고 있다”며 “보완책 마련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조사관에 따르면 공공임대주택의 가구당 평균 주거면적(2017년 말 기준)은 45.9㎡로 일반주택(67.3㎡)의 3분의 2 수준에 불과하다. 또 영구임대주택(94%)이나 신혼부부 사회초년생용 임대주택인 행복주택(97%)의 대부분이 40㎡ 미만이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이의 심각성이 잘 드러난다. 국내 공공임대주택의 경우 면적 40㎡ 미만이 46.7%으로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하지만 우리보다 작은 아파트에 산다는 인식이 강한 일본의 경우엔 23.7%에 불과하다. 최소 면적 아파트 기준을 50㎡ 미만으로 두고 있는 영국도 26.3%에 머문다. 반면 인기가 많은 중소형 아파트인 60~85㎡ 미만이 한국은 11.3%로, 일본(60~90㎡ 미만·28.3%) 영국(70~90㎡·31.3%) 등과 큰 차이를 보인다.

아파트 단지 설계부터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김영욱 세종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입주민이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고층 위주의 아파트 건설 방식부터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등 주거복지 선진국처럼 최대 8층 이하의 저층 아파트 단지로 조성하고 입주민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도록 동선을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황재성 기자 jsonh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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