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감같은 아이들에게 달콤한 홍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잘못"

김종철 2020. 4. 1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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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공교육 모델' 덕양중 이준원 전 교장(상)
폐교위기 학교가 공교육 모델 돼
교사-학생 수시로 대화하고 토론
학부모도 학교운영 당당한 주체
학생들 성적 눈부신 향상은 덤
평교사에서 공모 통해 교장 발탁
소통·헌신으로 학교 변화 이끌어
"사춘기 거친 행동은 부모 탓
인격적 대우 하면 중2병 없어"
“아이들은 감에 비유하면 떫은 땡감입니다. 달콤한 홍시가 될 때까지 기다려줘야 합니다.” 이준원 전 덕양중 교장이 지난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기 전 사진을 찍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체벌이나 교내 폭력, 등교 때 복장 단속 등의 낡은 행태는 거의 사라졌지만, 학교는 여전히 학생들에게 재미없는 곳이다. 몇몇 특수학교나 대안학교를 빼고는 대부분의 초·중·고에서는 선생님들이 가르쳐주는 지식을 외우고 익히는 데 급급하고, 친구들끼리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사무적으로 대하고, 부모들은 학교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일쑤다. 이런 일반적인 모습과 너무나 다른 학교 하나가 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교무실뿐 아니라 교장실까지 수시로 드나들고, 선생님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한다. 수업은 자체로 만든 교재를 이용해 토론식으로 이뤄지며, 시험도 5지선다형이 아니라 서술형이다. 선생님들은 수업만 끝나면 가방 챙겨 퇴근하는 대신에 학습공동체를 꾸려 아이들 교육을 위한 공부를 한다. 부모들도 모여 마음치유 공부 등을 하면서 소통하고, 학교 운영에 주체적으로 참가한다. 꿈같이 느껴지는 이 학교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덕양중학교다. 2009년 경기도 혁신학교가 된 이후 조금씩 변해왔지만, 지금의 모습은 지난 8년간 교장을 지낸 이준원(63·이하 호칭 생략) 교장의 리더십을 빼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지난 2월 정년퇴임한 그를 6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퇴임한 뒤 어떻게 지내세요?

“그동안 바빠서 못 했던 일들을 하고 지냅니다. 교사, 학부모 대상 강의가 코로나19 사태로 다 취소돼 시간이 생겨서요. 대신 새로운 경험도 많이 합니다. 컴퓨터를 이용한 실시간 화상 강의, 유튜브 제작 등을 배우고 있어요. 그동안 충실하지 못했던 가족과도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고요.”

우연한 교장직 응모

이준원은 1984년 대학(충북대 체육학과)을 졸업한 뒤 곧바로 체육교사(경기도 광주동중)가 됐다. 수석교사(교수-학습법 연구와 동료 교사 지도 등의 업무를 하는 전문성이 높은 교사)와 파견교사(다른 기관에 나가서 일정 기간 가르치거나 연구에 종사하는 교사)를 거쳤으며, 내부 공모를 통해 2012년 2월 덕양중 교장이 됐다. 교장은 보통 교감 자격증을 가진 사람 중에서 승진하지만, ‘내부 공모’ 때는 평교사도 지원할 수 있다.

―최근 방송된 다큐(<무엇이 학교를 바꾸는가> 1부, EBS)를 보니까 졸업식 때 학생들이 교장 선생님 품에서 울더군요. 담임이 아니라 교장 선생님한테 그러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어요.

“전임 교장 선생님들이 악역을 잘해주셔서요.(웃음) 농담이고요. 요즘 아이들이 대부분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성적으로만 인정받잖아요. 학교나 가정,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저희 학교에서 그런 경험을 해서 그런 것 같아요. 덕양중에 가면서 굳게 맹세한 게 있어요. ‘감시하고 억압하고 질책하고, 자신의 잣대나 틀 안에 들어왔느냐 아니냐 하는 걸로 잔소리해서는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엄격한 경계 세우기는 하되 교사와 학부모뿐 아니라 아이에 대해 한명 한명의 존재 자체를,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자. 교장 대 학생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자. 말이 아니라 행위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여주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교장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군요.

“제가 이해의 폭이 더 넓다고 생각했나 봐요. 자기 선생님들께 못 할 말도 와서 저한테는 다 이야기했어요. 비밀이 지켜지고 공감받고 지지를 받으니까 엄마 아빠의 관계까지도 얘기하죠. 그런 애들이 졸업식 때 통곡했던 거 같아요. 이번에는 좀 덜한데 2년 전 아이들은 식을 진행하지 못할 정도로 울어서 제가 ‘이제 그만 울자’고 진정시켜야 했어요. 교장이 어설프기도 하고 자신들과 세대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아이들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요즘 아이들이 정말 사랑에 굶주려 있구나, 좋은 관계에 목말라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성적으로 줄 세우고 외모로 평가하는 데 대해 아픔이 컸던 것 같아요.”

이준원 경기 고양 덕양중 전 교장이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에 있는 덕양중학교는 8개 학급의 학생 200명인 작은 학교다. 주변이 오랫동안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는데다가 학교 옆에 군부대가 있다. 한때 18개나 됐던 학급 수가 2007년에는 6개로 줄어들어 폐교 위기에 놓였다. 학생들은 점점 부적응자가 늘어났으며, 교사들은 기회만 되면 다른 학교로 떠나려고 했다. 돌파구로 찾은 게 내부 공모를 통한 교장 선출이었으며, 평교사 출신의 김삼진(68) 교장이 초빙됐다. 2008년 2월에 취임한 김 교장은 ‘지역사회와의 네트워크’, ‘재미있는 학습, 즐거운 학교’, ‘교사 학습공동체 강화’ 등을 내세워 대대적인 변화를 꾀했다. 이듬해 덕양중은 경기도 혁신학교에 선정됨으로써 새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2012년 이준원이 교장으로 오면서 변화가 가속화되고 깊어졌다.

―어떻게 해서 덕양중 교장으로 가게 됐어요?

“우연이었어요. 저는 90년대 후반부터 공교육에는 희망이 없고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대안학교 운동에 참여했어요. ‘붕어빵처럼 똑같이 찍어내는 교육은 가라!’고 외치면서 저희 아이들 둘 다 대안학교로 보냈고요. 2011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1년 동안 파견교사로 나가 있을 때였는데 함께 공부하던 한 선생님이 덕양중에서 교장을 공모하는데 저한테 딱 맞을 것 같다고 얘기해서 알았어요. 학교경영계획서에서 학부모와 학생, 교사의 내면을 치유하고, 소통하는 학교, 행복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학교를 지향하겠다고 썼는데 그것을 높이 평가했던 것 같아요.”

이준원 전 덕양중 교장은 지난 6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른바 중2병을 병이라고 본다면 흰머리도 병”이라며 ”중2병은 없다”고 말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국어, 10명 중 9명이 보통학력 이상

이준원은 약속대로 학교를 운영했다. 학칙 대신에 도입한 ‘생활협약서’를 학생들이 토론을 통해 교사, 학부모와 함께 만든다. 학생은 단순한 피교육자를 넘어 배움의 주체다. 학부모 역시 방관자가 아니라 ‘학부모 교실’과 ‘학부모 아카데미’ 등을 통해 학교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교사들은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토론식 수업의 진행자이자, 내면이 치유된 본래 의미의 ‘교육자’다. 학생, 교사, 학부모 3자의 유기적인 협력은 학력 향상으로도 나타났다. 2009년만 해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에서 보통학력 이상의 학생이 국어는 32%, 수학은 23%, 영어는 30%에 불과했다. 10명 중 2~3명꼴이었다. 그러나 2015년의 같은 평가에서는 보통학력 이상이 국어 90%, 수학 72%, 영어 71%였을 정도로 크게 늘었다.

이준원을 만든 시간들

―덕양중의 현재 모습은 혁신학교를 넘어 전체 교육 현장의 모델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젊었을 때 꿈꿨던 대안학교 이상의 교육과정이 덕양중에서 운영되고 있고, 교사 공동체가 만들어졌어요. 다큐에서 한 선생님이 ‘내가 있던 학교 중에 가장 힘든 학교, 하지만 가장 행복한 학교’라고 말했던 것처럼 저도 몸은 힘들고 바빴지만 참 행복했어요. 아파트 모델하우스처럼 교육에서 덕양중이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학교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왔었는데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아요.”

이준원은 첫 임기 4년을 마치고 다른 데로 옮겨가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덕양중 학부모와 교사들이 극구 만류해서 덕양중에서 정년을 마치기로 마음을 돌렸다.

―학생들의 변화에 대한 얘기부터 듣고 싶어요. 미성숙한 중학생들을 존중하고 경청한다는 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려운 일일 텐데 어떻게 가능했어요?

“제가 내면 치유를 꾸준히 공부했으니 그 부분은 전문가라고도 할 수 있겠죠.(웃음) 그래서 알게 된 것이 중학생들이 성품이 나쁘거나, 선생님이나 학부모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거나,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보복하려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들은 성장기에 있는 ‘땡감’(홍시나 곶감이 아닌 떫은 감)이거든요. 아직 덜 익고 떫은맛을 낼 수밖에 없는 시기의 아이에게 달콤한 홍시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죠. 땡감이 하루아침에 홍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어른들이 기다려주고 존중해주고 공감해주고 때로는 엄격한 훈계를 해주면서 그 시기를 잘 견뎌야 되는데, 대한민국은 그들을 존중하고 공감해주어야 할 인간이나 교육의 주체로 봐주지 않고 그냥 가르쳐서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하죠. 그러니까 더 튀는 거예요. 싸움이 일어나고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들과 부모님들께 계속 강조했어요. 먼저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 아이의 행동이 변하는 거다, 심한 갈등 상황을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배움이 일어나고 아이의 성장과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요. 아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면서 좋은 관계를 만든 다음에 교육을 해야 해요.”

―늘 온화하게만 대하지는 않겠죠?(웃음)

“물론이죠. 존중하고 경청하되 경계 세우기를 하는 게 매우 중요해요. 저는 한번 결정적인 순간에 꾸짖기 위해 사소한 건 그냥 넘어가요. 그랬다가 이때다 싶으면 교장실로 불러 파티션 뒤에서 단호하고 엄격한 표정을 짓고 말하죠. 그러면 아이들이 깜짝 놀라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죠. 그걸 위해서 평소에는 아끼는 겁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사항은 혼낼 때 그 아이의 히스토리나 인격을 들먹이지 않고 딱 그 문제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해요. 한번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아이가 흡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장실로 불렀어요. 그 아이를 교장실 파티션 뒤로 데리고 가서 엄격하게 ‘왜 부른 거 같아?’ 하고 물었더니 ‘담배요’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단호하게 ‘넌 아직 어리고 성장기인데 깨끗한 폐 속에 담배 연기가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교장 선생님 마음이 찢어지게 아파’라고 꾸짖으면서 ‘담배 끊을래, 교장 선생님과 관계를 끊을래? 관계를 끊는다는 건 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거야’ 그랬더니 담배를 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매일 점심시간마다 생수 한통 가져와서 앞에서 같이 마시고 했어요. ‘저 선생님은 나를 정말 사랑하셔. 나를 위해서 목숨도 내어주실 것 같아’라는 느낌이 전달되면 엄하게 꾸짖어도 집에 갈 때 헤헤 웃으며 ‘고맙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가요. 아이와 그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꾸짖었다가는 교육이 안 되죠. 그걸 잘 조정해야 하는데 한국의 선생님이나 부모들은 한쪽으로 치우쳐요. 사랑이란 이름으로 방치하든지, 교육이란 이름으로 너무 훈계하고 잔소리하고 누르죠. 그렇게 극단으로 가면 아이들은 막 나갑니다. 그러면 버릇없이 크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공부 잘해서 출세를 해도 사회를 힘들게 하고요.​”

덕양중 교장실의 이준원 전 교장. 그의 뒤쪽 벽에는 전교생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 이준원 제공

“아이들은 땡감, 기다려야 홍시 돼 잔소리로는 아이들 변하지 않아 좋은 관계 먼저 만드는 게 중요”

고부갈등도 내가 문제였더라

―덕양중의 학생 생활지도도 다른 학교와 다르던데요.

“덕양중에 가면서 처벌보다는 회복에 중점을 두는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것을 가지고 갔어요. 회복적 대화하기, 담임과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서클 참석하기, 최종적으로는 교장과 면담하기 등 여러 단계로 이뤄집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이들이 1학년 때 학교 인근 군인 아파트에서 ‘벨튀’(벨을 누르고 튀어 도망가는 것)를 하다가 적발됐어요. 그런 경우 저희는 학교폭력위원회 이전에 ‘서클’을 합니다. 학폭위에서 ‘넌 나쁜 짓을 했어. 그러니 덕양중을 떠나’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학생과 교사, 부모, 관계자 등이 둥글게 앉아서 대화를 합니다. 피해 주민을 바로 부르기 힘드니까 선생님들이 피해 주민 역을 맡았어요.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이 사건으로 인한 자신의 마음을 얘기합니다. 담임들은 ‘우리 학급의 평화가 깨져서 담임으로서 안 좋아’라고 하고, 피해 주민(대역 선생님)은 ‘벨이 울려서 나갔는데 아무도 없으면 불안하고, 화날 것 같아요’라고 얘기했어요. 아이들은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 줄 몰랐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말했죠. 그래서 다 같이 사과문을 쓰는 쪽으로 하고, 교장과 담임, 벨튀 학생 4명이 사과 편지를 써서 그 집으로 같이 걸어가는데 아이들이 후회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는 거예요. 피해자 집 벨을 눌렀더니 굉장히 긴장한 얼굴의 할머니가 나오셨어요. ‘아이들이 사과드리러 왔다’고 하니까 ‘그런 일로 교장까지 오시냐’며 깜짝 놀라더군요. ‘벨튀 일로 어떠셨냐’고 여쭤보니까 ‘이웃집 어린애들을 돌보고 있어서 더 걱정스럽고 불안했다’고 하셨죠. 그러니까 아이들이 스스로 죄송하다며 무릎을 꿇더라고요. 할머니는 ‘앞으로 안 그러면 되지, 일어나라’고 말씀하셨고요. 교장과 담임 선생님도 거듭 죄송하다고 하니까 아이들은 울기 시작했어요. 할머니가 ‘앞으로 안 그러면 된다’고 아이들 등을 두들겨주시더라고요. 그 사건 이후로는 덕양중에서 벨튀 사건은 없어졌죠. 만약에 그때 반성문만 쓰고 끝났으면 처절한 반성이 없었을 거예요. 아이들 간에 싸움이 일어났을 때 ‘너희들 이리 와! 왜 싸워, 또 싸우면 혼난다!’고 야단치고 끝내면 10초면 끝나요. 반면에 서클을 통한 해결 방식은 왜 싸웠는지 다 이야기를 듣고 하다 보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어떤 경우는 아이들이 진실된 자기 내면을 직면하기까지 3~4개월도 걸려요.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으로 누르는 문화에서는 자녀와 부모, 어른과 아이가 대화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지만, 저희는 전문가를 불러 공부해가면서 실천해왔어요.”

―선생님이 평소 ‘중2병은 없다’고 강조하시는 게 이런 경험에서 나온 거군요.

“네. 이른바 사춘기인 ‘중2병’을 병이라고 한다면 제 흰머리도 병이죠. 사춘기 아이들이 보이는 특성은 성장하는 시기에 꼭 거쳐야 할 과정일 뿐이죠. 즉, 땡감인 거지 병이 아닙니다. 사춘기에 아이들이 정서적 표현을 더욱 심하게 하는 원인은 부모나 선생님 등 기성세대에 있어요. 어릴 때부터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다독여주면서 소통하고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적절히 경계 세우기를 했으면 중학생이 되어도 그렇게 심각하게 나타나지 않거든요. 억압하고 권위적인 환경에서 큰 아이일수록 중학교 때 반항적인 태도가 심해요. 생존본능이 있어서 그런 거죠.”

2014년 덕양중학교 교사와 학부모들이 학교 식당에 놓을 식탁을 직접 만들고 있다. 맨 왼쪽이 이준원 당시 교장. 이준원 제공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이준원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을 따라 원주로 이사 갔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장학금을 받는 체조선수가 돼 고교 2학년까지 활약했다. 연습 도중 다치는 바람에 선수생활을 접었다. 교사가 된 뒤 그는 학생들의 체육수업뿐 아니라 내면 치유에 관심을 두고, 1996년 대학원에 진학해 상담 분야 공부를 했다.

―학생들의 고민이나 상처를 치유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뭔가요?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여러 아픈 경우를 많이 봤죠. 가출하고, 일탈하는 학생들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보면서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또 교장 등 동료 선생님들 가운데에도 내면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많이 봤고요. 개인적 계기도 있었어요. 사실 저희 집에 고부갈등이 굉장히 심했거든요. 제가 엄청나게 효자여서(웃음) 집사람이 부모님에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집사람이 갑갑해서 죽을 지경이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학교를 마친 뒤에는 서울 서초구에 있는 치유상담연구원(원장 정태기. 현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에 가서 5~6년 동안 임상공부를 계속했죠. 그때서야 14년 고부갈등의 주범은 저였다는 것을 깨달았죠. 고3 부장교사 시절에 동료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교사 내면 치유를 시도했죠. 아이들과 의외로 갈등을 겪는 선생님들이 많거든요. 저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내면에 있는 상처를 얘기하니까 선생님들 반응이 아주 뜨거웠어요. 그 뒤 다른 학교에도 불려다니기 시작했죠.”

“미안하다” 편지 써 아이와 화해

―가정 문제 해결에 물론 도움이 됐겠죠?

“고부갈등이 해결되고 집사람도 숨을 쉬게 됐죠.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면 제가 ‘아들을 행복하게 해주시려면 이 가정을 침범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죠. 아들의 그런 태도에 어머니가 많이 놀라셨지만 계속 설득하고 간곡히 부탁드렸어요. 일종의 경계 세우기를 했죠.”

―자녀들과의 갈등은 없었나요?

“애들을 키울 때는 저도 실패했어요. 초등학교 때까진 너무 좋은 아빠였는데 아이가 중학생이 된 뒤에는 공부만 강조했거든요. 아이들이 전교 1등을 못하면 무척 창피하게 생각해서 엄격하게만 대했죠. 집사람은 집에서 영어, 수학, 과학을 가르치고, 저는 국어 등을 담당해서 놀 틈도 없이 잠잘 때까지 시간표를 짜서 돌렸어요. 아이가 좋아했던 가수의 포스터만 방에 붙어 있어도 엄청나게 혼을 냈고요. 두달도 안 지나 엄마에게 죽고 싶다고 얘기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죠. 제가 더 데리고 있다가는 아이들이 망가질 것 같아서 전북 완주의 한 대안학교로 보냈어요. 저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는 미안하다고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어요. 첫째 아이는 빨리 회복됐는데 둘째는 늦게 회복됐어요. 이런 경험 때문에 학교에서 내면 치유를 교육에 접목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다음회에 계속)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

▶김종철: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현재는 토요판팀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국가나 사회, 민족 등 추상적인 단어보다 그 실질을 이루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김종철의 여기’는 4주에 한 번 연재된다. ▶네이버 뉴스판에서 한겨레21을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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